생명은 본래 타자의 죽음을 먹고 자란다

<어쩔수가 없다>를 중심으로 본 생명의 포식성

by 이명

※이 글은 영화 『어쩔수가 없다』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어쩔수가 없다』의 주인공 만수는 외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악인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가족과 삶을 지키기 위해 망설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기꺼이 빼앗아가는 그의 모습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행위로 보인다. 게다가 결론부에서 그는 그가 저지른 범죄에 합당한 처벌도 받지 않으면서 기어이 목표를 달성하고야 만다. 우리들 대부분은 틀림없이 만수가 '어쩔수 없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면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만수는 정말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 가능성을 실행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했을까? 전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는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만수는 정정당당하게 몇 번의 면접과 불합격을 거치며 재취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경력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자의 질문, 즉 그러한 선택이 만수에게 실질적으로 유효한 선택이었는가? 가는 질문의 답변은 간단하지 않다. 영화는 끊임없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강조한다. 만수의 '가족', 특히 외부와 일반적인 방식으로 소통이 어려운 막내딸 리원과 두 반려견의 존재는 선택을 외견상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행복한 삶을 가지게 해주고 싶은 가족들이 있고, 살인이 아닌 다른 방식을 선택할 때 가족의 행복한 삶은 상실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가족'은 만수가 선택을 강요받았던 가장 큰 이유이다.

이 상실 가능성은 일차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 개개인이 겪게 되는 모순적 상황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충분한 지적인가? 자본주의 사회를 탈피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을 겪지 않는 것이 가능해질까? 제지회사의 노동자로서 겪는 상황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른 곳으로 단지 옮겨가는 것 같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사회에서도 가족을 지키겠다는 욕망이 생길 것이고, 이는 폭력적 사태로 우리를 충분히 이끌 수 있다. 가족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활동의 필연적 부산물에 가깝다. 혹자는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재산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한다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수가 선택을 강요받았던 두 번째 이유, '집'의 층위를 살펴보게 되면 이 상황이 단지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만수가 살고 있는 '집'은 그의 삶의 궤적 전체를 대표한다.

만수에게 있어서 '집'은 단지 그가 돈을 벌어서 사들인 재산이 아니다. 이 집은 그의 유년기 추억을 보여주며, 심지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의 삶을 이끄는 동력이었다. 직접 분재한 나무가 집 곳곳에 심어져 있으며 그의 삶은 나무를 빼놓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만수는 집을 포기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붕괴된 상황에서도 개인의 일차적 삶의 궤적에 대한 집착은 있을 것이며, 여전히 그것은 모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만수의 집, 그리고 심어진 나무들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집은 만수가 자라난 과정 전체를 대표한다. 집 앞에 자라나고 있는 전나무는 이를 시각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또한 심어진 나무들은 만수가 분재한 나무들이다. '분재'라는 것이 화분이라는 새 세상 속에 살아있는 생명을 피워내는 것이다. 이를 보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다: 이들이 만수가 보여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면, 문제의 발생 원인은 '생명 작용'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역동적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되었던 생명이 실은 두 번째 층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생명 활동이 일정한 부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지적된 바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생명은 맹목적 의지를 가졌고, 그것은 끝없는 욕망을 낳으며 따라서 생명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가 있다. 이러한 지적은 영화 내에서 분명히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복기해 보자. 만수의 생명 활동, 즉 구직 시도는 다른 생명들을 해쳤다. 그의 취미인 분재 역시 그렇다. 분재는 외견상 단지 생명 하나를 만들어내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을 인간의 취미로 만들어내면서 식물에게 인위적 조작을 가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분재는 단지 그의 취미활동일 뿐 아니라, 만수라는 개인의 삶을 담는 상징인 것이다.

분재는 다른 생명을 꺾어내 재창조한다.

그러나 즉각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이 사례들은 단지 생명이 악의를 품었을 때 발생하는 사례들이 아닌가? 분명히 그런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볼 때 이는 훨씬 명확해진다. 만수의 막내딸 리원은 영화 후반부에 훌륭한 첼로 연주를 보여주며 그의 재능을 만개한다. 그러나 이 첼로 연주는 만수로 하여금, 그리고 그의 가족들로 하여금 엄청난 지출을 하도록 만들었다. 열매가 맺히기까지 가족들의 희생을 동반한 것이다. 심지어 만수는 이 첼로 연주를 듣지 못하면서, 그의 위에 피어난 가족들과는 분리된 층위에 놓이게 된다. 영화 내내 생명활동 자체를 상징하던 만수는, 종래에는 또 다른 생명의 자양분으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관점 변화도 그렇다. 영화 초반부에서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을 지키고자 노력하던 만수는 후반부에 제지업계의 인원 감축에 찬성하는 행태를 보인다. 다른 생명을 섭취하는 데에 더 이상 거리끼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죄책감은 뿌리까지 번지고 있던 치통의 근원을 없애버림으로써 해결된다. 이빨을 뽑으면서 그는, 하나의 생명은 다른 생명 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즉 영화 초중반부에서 다른 생명들과 상생하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그가 자신의 생명적 활동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변화하게 된다. 이빨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것은 인간 전체를 좀먹었을 것이다. 한 생명은 또 다른 생명과 그다지 잘 공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다른 생명에 기생한다.

자신에게 자라고 있던 생명, 치아를 제거해야만 그가 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만수의 행동은, 생명 활동의 창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어쩔 수가 없다'. 영화를 거치면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만수가 그의 아들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생명은 더러운 것들 위에 자라난다. 양분을 섭취하는 행위는 생명 작용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 있다. 생명의 창조적 행위들은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베르그손의 철학 등에서 생명은 스스로 무화하는 우주 전체에서 음엔트로피 작용을 통해 긍정성을 발생시킬 수 있는 창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생명들을 황폐화하는 양분섭취 작용이 있다. 음엔트로피 작용은 전체의 엔트로피를 끊임없이 증가시키며, 자신의 창조성을 발현해 낸다. 생명의 이러한 파괴성은 그동안 상당 부분 경시되고는 하였다. 생명의 창조성에 대한 찬가는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고려하는 한에서만 연주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새 윤리학을 필요로 한다. 윤리학을 긍정성에 기반한, 즉 생명의 개성 또는 쾌고에 대한 자연적 이론들에 정초시키는 방향은 해소될 수 없는 모순만을 낳는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 긍정이 아니라 멈춤(부정)만이 폭주하는 생명의 기관차를 멈춰 세울 수 있다.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생명활동의 억제라는 부정성 위에 정초 되어야만 하며, 그리하여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사라졌던 '무'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중심부로 화려하게 복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