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생명적 근원성에 대하여
1. 자본주의적 독해가 거세한 <기생충>
명실상부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인 <기생충>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은 작품으로 이해되고는 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박 사장의 가족들로 대표되는 상류층과 기택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하류층들 간의 이분법적 구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분명히 일리가 있다. <기생충>의 미장센은 상류층과 하류층의 명백히 수직적 단절감을 드러낸다. 또한 영화 내에서 싸우는 것은 기택의 가족과 근세의 가족이며, 박 사장의 가족들은 이 빈자들이 싸우게 되는 배경 또는 풍경과 같이 묘사되는 것도 부르주아 계급의 관조성과 무비판성을 겨냥하는 전형적인 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즉 자본주의적인 독해의 관점을 견지할 때, 우리는 <기생충>이 가진 풍부한 개별 요소들을 무시하고 영화를 단편적이고 국소적인 방면으로만 축소시키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첫 번째 문제는 빈자-빈자 간의 대립과 주체로서의 빈곤층이라는 두 가지 표현이 이 영화를 표면적으로 ‘기생’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견 큰 문제가 없어 보이나, 실상은 영화 전체의 기획으로 이해되었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 전체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할 수 있다. 이는 영화의 완성도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영화가 가진 실천적 문제의식의 작동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일 것인데, 왜냐하면 영화는 분명히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본주의 전체가 얼마나 정교하게 구성된 감옥의 역할을 하는지를 드러내려고 하나, 상업영화의 특성상 관객들은 이 구도를 즉각 포착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표면’에 머물 것이며, 정반대의 함의를 담는 심층적 문제의식은 올바르게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감독이 이러한 사태를 의도했거나 적어도 문제시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표현과 실천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균열은 적어도 이러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문제가 실천에 관한 문제라면 두 번째는 보다 근본적인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냄새’와 ‘수석’이라는 두 상징물의 지위가 자본주의적 해석에서 격하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자본주의의 비판이라는 시선에서 바라볼 때, ‘냄새’는 곧 하류층 그 자체를 상징한다. 씻어도 빠지지 않는 어떤 ‘가난의’ 냄새는 노력을 해도 계층 이동이 아주 어렵다는, 그 자체로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냄새가 가진 생리학적 특성은 자본주의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악취가 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싫어하게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작하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가난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경우는 적다.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외견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또는 그의 존재가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싫어한다. 혹자는 이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인과적인 추론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구조가 이 모든 개별 특성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논증한다고 하더라도, 이 특성들이 자본주의에서만 기인한다는 보장은 없다. 가장 유리한 경우에라도, 자본주의는 문제의 대부분을 설명할 뿐,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수석의 지위는 더 묘연하다. 자본주의적 독해에서 수석은 돈에 대한 집착, 욕망 등을 상징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에 수석이 집착과 욕망을 상징한다면, 그것은 왜 기우에게만 달라붙게 되는가? 기우를 제외한 다른 누구도, 그만큼 수석에 대한 열광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기우만이 미래에 대한 욕망을 가졌기 때문인가? 또한 수석은 기택의 집에 물난리가 났을 때 물 위로 떠오르는 기이한 운동을 보인다. 이것이 단지 수석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기우의 상상이라면, 수석은 자신이 부자가 되는 세계의 환상성을 드러내고 현실과 환상을 느슨하게나마 이어주는 영상적 매개가 된다. 하지만 감독이 단지 매개적 역할을 부여하고 기우의 꿈의 허황됨만을 지적하는 요소로서 수석을 활용하려고 했다면, 영화의 결말부에서 수석은 왜 무기로서 활용되는가? 우리의 논의에서 수석은 분명히 집착, 욕망 등의 순수히 가능적인 것들을 상징한다. 그것은 어떤 도구로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우의 지향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기우가 수석에 머리가 깨질 때, 수석은 더 이상 지향성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구성을 지니게 된다. 욕망이 ‘어떤 것을 위한’ 것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는 욕망이 가진 순수한 비정향성을 경시하는 태도가 된다. 우리의 욕망이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이 그것을 향해서 빨려가는 근원적 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독해는 분명히 <기생충>이 드러내는 의미들의 많은 부분을 해명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명징함 때문에 본질적인 논점을 놓치고 있다. 그리고 그 빠진 부분은 <기생충>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생명적 근원성을 표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해석과는 다른, 또는 그를 넘어서는 어떤 근원적 해석을 논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의 말미에서 ‘생명’이라는 에너지가 우리의 막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그것이 타자를 집어삼키는 ‘포식성’을 가지게 되는지를 직시할 수 있게 되며, 비로소 거세된 <기생충>이 아니라 온전한 신체를 지닌 <기생충>을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2. 포식적 본능의 발현: 생명 에너지의 불가결한 충돌
자본주의적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기 위해서, 우리는 앞서 논의했던 ‘냄새’의 문제에 우선 천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국소적인 장면들에서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상징물이 아니라, <기생충> 전체를 시간적으로 관통하며, 수직적으로 단절된 두 공간을 연결해 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냄새를 논의함으로써 우리는 자본주의적 해석에서 간과된 수평적 공간, 혹은 연결된 공간으로서의 기생충을 볼 수 있다. 앞서 논의하였듯, ‘냄새’는 빈자와 부자의 융합될 수 없는 질적 차이만을 드러내지만,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박 사장이 악취를 왜 혐오하는지를 파악해야 봐야 한다.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 아주 단순한 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특정한 냄새가 박 사장의 감각을 원초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스스로 이 냄새가 지하철 타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라면서 가난의 냄새라는 묘사를 은연중에 남기지만, 사실 엄밀히는 이것이 이유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후적인 분석에 가깝다. 그것은 다른 냄새를 생각해 보는 것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박 사장이 싫어하는 냄새는 그 냄새만이 있지 않을 것이다. 라벤더향을 싫어할 수도 있고, 스모크향이나 머스크향을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림없게도 박 사장은 그것의 질료가 ‘나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는 향이 난다고 결론짓지 않을 것이다. 즉, 박 사장의 ‘가난의 냄새’에 대한 분석은 ‘그 이유는’이 아니라 ‘그리고’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는 그것이 가난의 냄새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싫어하는 냄새다’라는 단순한 관념에 ‘그것은 가난의 냄새다’라는 문장을 병치한 것이며, 그 사이에는 분명히 어떠한 인과성도 부여될 수 없다.
이 단순한 관점의 전환은, 냄새를 바라보는 박 사장의 지위를 단숨에 변화시킨다. 누군가가 어떤 냄새를 싫어한다는 것은 도덕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박 사장이 그 냄새를 싫어한 것은 단지 생리적 경계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박 사장이 가진 생명적 에너지에 공감한다면, 냄새는 그 에너지에 대한 일종의 침범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기택의 관점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난의 냄새는 한편으로 기택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본질적 속성의 일부분이다. 그가 만약 어느 날 복권에 당첨되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가난하던 시절의 냄새는 그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 기택의 생명적 에너지에서 뿜어져 나온 본질적 특성이 박 사장의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것이다. 기택의 입장에서는, 박 사장의 평가는 아주 불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본질적 요소에 대한 재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두 생명은 충돌하며, 이 충돌은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이 특성이 생명 전체의 동일성에서 기원하고 있기에, 누군가가 양보하여 넘어간다는 것은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양보할 수 없고, 따라서 이러한 충돌은 영화를 본질적으로 ‘불쾌한’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렇다면 부딪힌 두 생명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향은 무엇이 있는가? 영화에서 채택된 방법은 타인을 ‘포식’해 내는 것이다. 박 사장이 냄새에 불쾌감을 계속해서 표출하자, 기택은 큰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고는 박 사장을 살해하며, 그를 잡아먹는다. 기택에게 다른 결단은 없었다. 그 순간에 참았더라면, 박 사장은 냄새를 견디다 못해 그를 해고했을 것이고, 그 순간 기택의 생계는 무너졌을 것이다. 이것은 기택의 생명적 영토가 박탈당하며 박 사장에게 잡아먹히는 순간이 된다. 자신이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이 갈등을 본질적으로 끊어내는 수밖에 없었고, 그 유일한 선택이 박 사장을 죽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3. 포식으로서의 기생
영화의 가장 큰 맥락은 위의 분석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고 나면,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상징적이었던 영화의 요소는 더 직접적이고 강렬한 것으로 변모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만약 인간의 모든 활동이 생명적인 에너지에 기반해서 이야기될 수 있다면, 그 끝은 항상 포식을 향하는가?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은 많은 경우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고, 무언가를 ‘하는’ 것은 무질서에서 질서에로 나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열역학 제2법칙의 결론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는 항상 주변을 무질서하게 흩뜨림을 전제하며, 이것은 동력과 에너지를 얻기 위해 타자를 포식하는 과정으로 드러나게 된다. 물론 누군가 이러한 해석이 유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그런 과정만을 낳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비판에 응답하는 대신, 잠정적으로 받아들인 이러한 결론을 토대로 <기생충>에서 나타나는 포식의 또 다른 양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양태는 다름 아니라 ‘기생’이다. 영화의 제목에도 나와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핵심적인 요소를 나타내는 기생은 영화 내에서 세 지점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우선 기택과 근세의 가정이 박 사장의 가정에서 기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뻔뻔스럽게 자신의 것도 아닌 물건들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이용하며, 박 사장의 부에 기생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적 충동, 즉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재산을 이용한다. 두 번째 기생은 보다 은밀한 형태로 숨어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박 사장이 기택의 가정에 행하는 행동이다. 외견상 박 사장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서비스를 받는다. 하여 이것은 기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생에 가까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박 사장의 아내가 기우에게 줄 돈을 10만 원 빼고도 전보다 더 넣었다고 거짓말하는 행동, 기택에게 본래 맡은 업무가 아닌 사적인 업무를 시키는 행동은 분명히 준 박 사장의 가족이 돈 이상으로 기택 일가의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인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냄새를 맡으며 찌푸린 표정을 지은 것 자체도 일종의 기생의 양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박 사장이 의도한 부분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본인의 생리적 만족을 위하여 타인의 고유 영역을 침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 사장 또한 의도치 않게도 기택의 가정에게 기생하고 있다.
이 두 형태의 기생이 명시적이라면, 보다 암묵적이고 은밀한 층위에서 행해지는 기생이 있다. 어쩌면 기생이라기보다는 ‘구조적 기생’ 혹은 ‘착취’가 더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르는 세 번째 형태는 바로 박 사장의 가정이 근세와 기택의 가정을 비롯한 하류층에게 행하는 자본주의적 착취이다. 그의 삶은 다른 사람들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IT업계의 CEO인 박사장은 자수성가형 부자이므로, 그의 손에는 세습 부자보다도 더 많은 피가 묻어있다. 자신이 승진하며 승진이 좌절된 직장 동료들부터, 그들의 제품을 구매하는 일반 소비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빨아가며 생존한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의 지하실에 사는 근세에게도 기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박 사장의 우아하고 평화로운 삶이 근세와 같은 하류 인생을 보지 않으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 사장이 좋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근세를 철저히 무화시켜 어딘가로 분리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세가 지하실에서 올라와 현실에 현현하는 순간, 박 사장 일가는 파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기생’, 보다 일반적으로는 ‘섭취’라는 포식의 형태는 살인으로 표현된 극단적 형태의 포식보다도 더 많이 일어나는 사례임에 틀림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는 마지막 물음이 남는다. 포식당한 이들은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가?
4. 유령, 그리고 죄의식으로서의 윤리학의 가능성
포식당한 객체들은 외견상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기택에게 살해당한 박 사장, 근세에게 살해당한 기정, 그리고 기생당하면서 에너지를 잃어버린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까지. 그런데 이들이 정말로 사라졌을까?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일자이며,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 이 말처럼, 포식당한 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대부분은 소화기관에서 형체를 잃어버리며 소멸하지만, 이들의 정체성 자체는 오히려 찌꺼기로 남아 포식자의 내부에 자리 잡는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집의 지하실로 숨어드는 기택의 선택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기택 자신이 기생했던, 그리고 자신의 인간성을 끝내 잡아먹은 집의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실종되어 버렸다. 사회적으로 살아있지도 않고 죽어있지도 않은 ‘유령’이 된 것이다.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존재하다가 출몰하게 되는 것이다. 기택의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는 집 지하에서 존재감을 내비치고, 기우와 박 사장 유족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아 영향력을 유지한다.
근세의 존재 또한 유령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또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고, 어느 순간 불쑥 출몰하여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박 사장 또한 사망하였지만, 기택의 앞으로의 행동을 통제하는 원인으로서, 다혜와 다송이의 유년기에 남은 영원한 상처로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관객들 전체에게 생각을 던져주는 사유의 담지자로서 모습을 영원히 드러낼 것이다.
이처럼 포식당한 모든 이는, 포식자의 몸을 비집고 현현한다. 그런데 우리가 논했던 포식이 생명 에너지들의 일반적 충돌을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문제는 ‘포식’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므로 윤리학을 정초 한다는 것은 우리 앞에 나타난 유령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다름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윤리학이 가야 할 지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아주 명확하다. 우리는 그들을 떨쳐낼 수 없으므로, 그들에게 항상 죄의식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무엇이 선인가?”가 아닌 “어떻게 그들에게 죄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기생충>의 전체 기획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의 부조리가 아니라 생명이 생명을 섭취하는 필연적 비극일지 모른다. 박 사장의 온전한 신체를 지닌 <기생충>을 마주하는 것은, 우리가 영위하는 가장 간단한 일상적 삶조차도 타인을 무화(無化)시킴으로써 얻어낸 폐허 위의 건물임을 발견하는 것일지 모른다. 유령이 된 기택의 모스 부호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항상 그에게 미안해하는 것, 그것이 어느샌가 우리의 심장을 찌르게 된 타자라는 가시를 뽑아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