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래의 잔혹함에 매혹되는가?

<헤어질 결심>의 탐미주의와 숭고의 관념

by 이명

<헤어질 결심>을 향한 수많은 찬사는 대개 이 영화가 성취한 ‘고전적 우아함’이나 ‘미제 사건의 애틋한 로맨티시즘’에 집중된다. 물론 <헤어질 결심>은 사랑을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증명해내는 절제의 미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지 사랑을 노래하는 사랑의 교향곡으로 읽는 것은, 그 속에 숨어 우리의 귀를 찢고 들어오는 불협화음들을 무시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헤어질 결심>에서 탐미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는지, 그리고 이 탐미주의가 종래에 어떤 숭고한 붕괴를 남기게 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1. 1부: 기계적 생명의 균열

베르그손은 그의 저서 <정신적 에너지>에서 불면증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 삶에 대한 주의(Attention à la vie)를 항상 기울이고 있다. 우리는 다른 물체들, 심지어는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을 유용성의 측면에서 이용하기 위해서, 지속을 분해하고 분석하며 살아간다. 꿈은 우리가 이러한 삶에 대한 주의에서 벗어나 순수한 지속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며, 따라서 불면증은 의식이 과하게 팽팽해져 있어 이완되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사태이다.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 해준은 형사로서 살아가며 불면증을 겪고 있는 인물이다. 베르그손의 관점을 빌려오자면, 그는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사건 파일 속을 떠다니며 살아가는, 즉 생명의 지속을 마주하지 못하는 ‘기계론적 생명’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 그는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도중 살인 피해자의 아내인 서래를 만난다. 서래는 베일에 싸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해준과 두 가지 의미에서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두가지 관점에서이다. 첫째는 언어의 문제이다. 서래는 중국인이다. 그의 한국어 표현들은 생경하다. 형사로 오래 활동한 해준조차도 그의 어휘 속에서 어떤 상황도,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해준의 사고 방식이 기계적이었기 때문이다. 베르그손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분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어떠한 고유한 부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래와의 만남은 해준의 삶에 오류가 침입하는 순간이다

이는 곧장 두 번째 관점으로 이어지는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부분은 즉시 서래 자신의 고유한 생명력으로 파악될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파악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순수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서래라는 존재 자체의 본성적 성격이다. 따라서 해준은 이 순간 이미 서래의 속으로 빨려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다. 그가 서래를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그는 그녀를 향한 직관에 점근적으로 가닿게 된다. 그 한계점에서 그의 분석은 분석 불가능한 서래의 생명력을 향해 도약하며, 종국에는 그녀와 완전히 공명하게 된다. 형사로서 그녀를 성실히 취조하려는 해준의 상황이 그를 서래와 완전히 공명하고 직관하는 대상으로 주조해낸 것이다. 이 관점에서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이미 필연적이다.

서래에게 불면증을 치료받는 해준

해준이 서래에게 불면증을 치유받는 장면은 해준의 사랑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해준은 서래를 사랑하게 되며, 그녀와 삶의 흐름을 공유하는 생명력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다. 서래의 입장에서 해준의 사랑은 그녀의 지속에 대한 침범이 아니다. 그의 방식은 처음에는 침입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해준이 스스로의 구조를 붕괴시켜 자신의 내부로 들어오는 귀화의 작업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상 객체로 묘사되었던 서래는 사실 가장 주체적인 인물이 된다. 해준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래가 돌린 수레바퀴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렇다면 서래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어디인가? 무엇이 수레바퀴의 동력으로 이용되고 있는가?

2. 2부: 생명의 포식과 미의 성취

<기생충>에 관한 이전 포스트에서 암시된 것처럼, 이 수레바퀴의 동력은 분명히 다른 생명들이다. 1부에서 그녀의 포식은 단지 해준을 자신의 속으로 귀화시킨다는 암시적인 방법으로만 일어나지만, 2부에 이르러 그녀는 자신의 생명력을 펼쳐내기 위해 다른 생명들을 기꺼이 먹어치우는 포식자(Predator)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서래는 2부의 무대인 이포의 안개 속에서 자신의 수레바퀴를 적극적으로 굴린다. 자신의 첫 번째 남편인 기도수를 먹어치우고 이포로 향한 서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을 제거한다. 이 포식은 단지 살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서래 자신을 펼쳐내는 미(美)적 전개의 일부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서래의 살인이 질서를 향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래는 기도수의 소유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임호신이 만들어낸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이는 다른 이들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의 일부로 이해될 수 있으며, 아름다움은 세계의 무질서함 속에서 어떤 질서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게슈탈트 미학의 관점을 연상케 한다. 질서의 창조라는 서래의 살인의 목적성은 그 살인의 아폴론적 미를 대변한다.

서래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살인에서 나온다

그런데 서래의 살인은 단지 아폴론적 질서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서래가 ‘살인’이라는 방법을 택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미를 성취하고 있다. 법과 윤리를 벗어나 타인을 절단하고 해준을 기만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뜨거운 생명력을 분출하게 된다. 그것은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생명의 범람을 만들어내며, 가장 개별적이고 원시적인 것으로서의 미를 창조해낸다. 그것이 철저히 우아하고 정교한 아폴론적인 가면 뒤에 숨어있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서래의 행위가 미로 이해될 수 있는 마지막 이유가 발생한다. 아폴론적 질서를 추구하기 위해서일지라도 가장 뜨거운 디오니소스의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서래의 필연적인 상황은, 작은 오류를 눈덩이처럼 불려 나가는 생명의 본성, 즉 캉길렘이 통찰한 '오류의 증폭'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생명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서래가 가진 오류는 사실 어쩌면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기도수로부터 받은 억압은 처음에는 단지 서래의 불쾌감으로만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래의 삶 전체를 통과하면서, 그것은 끊임없이 증폭되고 가속되어 그녀를 연쇄살인으로까지 이끌게 된다. 이것은 생명이 오류를 증폭하는 기계로 태어났기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비극의 운명을 보여주는 순간이 된다. 그러므로 서래의 악행이 미가 될 수 있는 것은, 윤리를 벗어나 생명의 순수한 자기실현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1부에서 흐릿하게나마 직관되었던 미의 씨앗은 2부의 살인이라는 타자의 희생을 안료(顔料)로 삼아 선명한 실재로 현현하게 된다. 미는 세계의 질서를 포식자의 관점에서 정렬하는 행위에 다름아니며, 그것은 우리의 눈을 가리는 이포의 안개 속에서 디오니소스의 지팡이를 통해, 가장 아폴론적인 방향을 향해 일어난다.

해준은 결국 서래에게 잡아먹힌다

2부의 끝에서 서래가 마지막으로 먹어치우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해준의 도덕성이다. 1부에서 서래와 같은 지속을 공유했던 해준은, 결국 서래의 위장 안에서 소화되어 그녀의 양분으로 펼쳐지게 된다. 그러나 다른 먹잇감들과는 달리 해준은 완전히 소화되지 않고 그녀의 속에 남게 되고, 이는 <헤어질 결심>에서 숭고를 드러내는 계기로 작동하게 된다.

3. 숭고를 향한 도약: 무로의 침잠과 박제

서래와의 사랑 속에서 완전히 소화되었던 것처럼 보였던 해준은 서래의 사랑을 타고 서래의 위장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해준은 완전한 기계적 인간처럼 보였고, 실제로 서래는 해준의 이 기계적 부분들을 모두 먹어치웠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직관이 맞닿아 공명하게 되는 순간, 서래 역시 해준의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해준은 서래를 사랑했고, 이것은 타인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었다. 해준이 서래를 숨겨주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형사로서의 품위와 자존심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 희생은 해준 자신을 위한 동일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것은 해준의 다른 부분이 소화되는 와중에도 해준의 고유한 타자지향성으로 남게 되었고, 서래의 안에서도 그녀의 바깥을 향해서 남게 되었다. 서래의 위장에는 ‘죄책감’과 그로 말미암은 ‘사랑’이라는 뼈가 하나 남게 되었고, 이 뼈는 서래가 미를 충족하기 위해 약동하는 순간순간의 서래의 몸속을 찌르게 되었던 것이다.

서래가 선택할 수 있던 유일한 결말

이 뼈는 칸트의 ‘숭고’ 개념을 연상케한다. 서래는 해준이 가지고 있던 타자성을 목도하면서, 상상력으로 판단할 수 없는 어떤 무한한 힘을 마주하게 된다. 압도적인 힘으로 말미암아 서래는 미가 아닌 윤리적 숭고함을 직면하게 된다. 숭고를 맞이하게 된 서래는 비로소 포식을 멈춘다. 포식은 소화불량의 원인이 된 하나의 뼈에 의해 정지하게 되고, 그녀는 비로소 완전한 정지를 원하게 된다. 순수한 생명, 순수한 존재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무한한 바다 속으로 스스로를 집어넣는다. 그녀의 삶은 붕괴하고 정지하여 해준의 조사를 영구히 유예시키는 미제 사건이 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 그녀는 해준의 발밑에서 순수한 숭고를 향해, 존재를 벗어나 무(無)로 박제된다.

서래가 산이 아닌 바다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녀가 산이라는 미적 대상에서 벗어나 비로소 바다로 상징되는 무한하고 압도적인 숭고의 상징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박제되어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로 세상에 남겨진 서래는, 탐미주의와 욕망으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 해설될 수 없는 윤리적 불편함으로서, 아름다운 교향곡 속에 몰래 숨겨진 불협화음으로서 우리의 귀를 찢고 들어온다. 해준, 그리고 우리는 이제 파도 소리 속에서 서래의 심장박동을 느낀다. 윤리적 판단이라는 영원한 불면증 속을 헤메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