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달콤한 덫에서 창조적 미래로

베르그손의 눈으로 본 <미드나잇 인 파리>의 시간 구조

by 이명

우리는 살아가며 “그때가 좋았지”라는 환상에 휩싸이고는 한다. 기억의 본질적 편향성을 명징히 드러내는 이 거대한 착각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이다. 과거의 것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길’은 ‘황금시대’의 예술계 인물을 만나며 환상에 젖지만, 이내 그들 또한 ‘벨 에포크’를 동경함을 깨닫게 되면서 과거로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을 직면하게 된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은 단지 우리의 기억이 과거를 향해 꺾여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기억은 본성적으로 시간 속에서 누적되기 때문에, 영화에서 드러나는 기억에 대한 통찰은 머지않아 우리에게 시간의 민낯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 포스트가 다룰 문제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 시간의 문제이다.

1. 회상과 과거로의 침잠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남긴 가장 위대한 통찰은 바로 생명의 시간적 지속이 기억을 끌고 다닌다는 점일 것이다. 요컨대 기억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 안에 ‘순수 기억’으로서 누적된다. 그리고 누적된 기억은 현재의 신체와 맞닿으면서 이미지-기억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이 황금 시대의 예술가들과 만나는 것은 영화적 기법으로 표현된 이미지-기억의 가장 세련된 형태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의 비약을 통해서, 우리는 원리적으로 신체와 결부되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과거의 이미지-기억에 직접적으로 가닿게 된다. 길이 자정의 종소리와 함께 구식의 자동차에 오르는 순간, 이미지-기억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물질과 기억》의 원뿔 도식을 끌어오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럽다. 베르그손의 원뿔에서 밑면 AB는 순수 기억의 영역이며, S는 신체, 혹은 감각-운동이 일어나는 지점으로 해석된다. AB는 우리가 기억을 떠올림에 따라서 A'B', A''B''과 같이 수축되며 우리에게로 들어오게 된다. 이 도식을 받아들인다면, 길이 과거의 특정한 시점 AB의 기억을 끌어와 소설 속에 활용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수축시켜서 현재에 집어넣는 행위가 될 것이다.

베르그손의 원뿔 도식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베르그손은 AB의 순수 기억이 현재로 밀려나온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일, 회상의 메커니즘 자체가 되게 된다. 회상이 일어날 때, 우리는 삶에 대한 주의를 내려놓고, 현재의 행동을 잠시 중단하게 된다. 하지만 이 행동은 우리가 회상의 순간에 S와 평면 P를 결부시키고 있던 특정한 인력을 끊어버리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미 누적된 과거의 데이터는 아주 무겁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상을 통해서 과거를 다시금 되살려내는 것은, AB가 접혀들어서 S로 끌려온다기보다는 차라리 S가 점차 이완되어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가게 되는 현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상이라고 불리는 과거에 대한 일종의 추억은 사실 원뿔을 끌고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우리가 빨려들어간다는 점 자체를 의미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1920년대로 향하는 길목이 어떤 상상의 관점이 아닌 자동차라는 물리적 매개를 이용해서 만들어져 있던 것 또한 이러한 아이디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길이 빨려들어간 과거의 순간은 아주 달콤하다. 그곳에는 멋진 예술가들이, 맛있는 음식과 술이, 아름다운 여성이 존재한다. 화려한 파티 속의 빛을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한 지점으로 끌려들어간다. 어느 살아있는 것도 이 빛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끌려들어감은 어쩌면 생명적 본성에 다름 아닐 것이며, 우리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항상 스스로의 욕망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 제한이 가미되지 않은 우리의 삶은 그러므로 항상 과거를 향해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묘사하는 ‘황금시대’의 섬세함과 낭만은, 우리가 항상 과거를 동경하며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각적인 징표일 것이다.

과거는 어떤 환상적 사건이 아니라 ‘자동차’에 의해 연결된다

2. 포식의 작동과 시간의 구조

그러나 우리는 과거로 끌려 들어간 후, 더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포식(Predation) 작용이 회상에 동반되기 때문인데, 이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일어나게 된다. 우선,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인물들을 잡아먹는다. 길이 현실에서 겪고 있던 창작에 대한 불안감은 1920년대의 인물들 사이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길이 느끼던 허기는 과거의 인물들이 남긴 풍요로 완전히 대체된다. 길이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대면하는 순간,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나아가 1920년대 전체는 길의 소설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거장들에게 자신의 원고를 감수하게 만들고, 그들의 에너지를 자신의 소설과 자신을 위해 부역시킨다. 길은 이 평론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고, 자신의 에너지를 되찾게 된다. 가장 달콤한 이미지-기억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의 모든 양분을 섭취하고 갉아먹는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재의 자신과 주변까지 포식하여 없애버린다. 영화에서 길의 여자친구인 이네즈가 속물적으로 묘사되었기에 그렇게 강조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길의 현재 파리에서의 일상은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실재하는 신체 S는 영화 내에서 평면 P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되고, 이네즈와 자기 자신의 관계를 완전히 포식해내게 된다. 우리는 이제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시간 자체의 구조에 관한 것으로, 시간의 흐름이 실제로 개체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과거에의 편향과 이로 말미암은 포식적 본능이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아네즈와의 관계는 과거에 의해 포식당한다

첫 번째 측면에서, 우리는 공간과는 분리되는 시간의 특수성을 알아야만 한다. 베르그손이 제기했던 문제는 시간이 불연속이 아니라 연속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가 이보다 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개체에게 시간은 항상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고 있는 개체의 관점에서, 과거는 항상 접근 가능한 것이지만 미래는 접근 불가능한 것이다. 과거로의 접근은 우리가 살펴보았던 회상의 기작을 통해서 일어나며, 우리는 이 과정에서 현재로부터 떨어져나와 과거의 인력 속으로 끌려가게 된다. 길이 현재보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러므로 아주 자연스럽다. 길, 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학적 개체들은 어떤 시점에 항상 과거를 떠올리고는 한다. 때로는 이 과거는 인력이 너무나도 커서, 우리를 그 속에 가두어버린다. 예컨대, 과거에 어떤 트라우마를 겪었거나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는 과거의 해당 시점에서의 인식 기준을 통해서 현재를 재단하고는 한다. 푸코가 제시한 바 있는 특정한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시 작동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과거의 강력한 인력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길은 과거의 지층에 갇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과거-현재와 미래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구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개인의 체험에 관련한 구분일 것이다. 우리가 접근 가능한 부분, 과거-현재에서는 시간이 마치 전도되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현실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지만, 개체는 회상의 과정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끊임없이 역행한다. 그러므로 과거-현재의 시간은 원래의 불가역적 형태에서 벗어나 공간화되어 가역적인 것이 된다. 물론 거기에는 일종의 불균형이 남아있게 되지만, 이 불균형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는 중요한 목표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두 번째 측면이다. 만약 과거로 향하는 우리의 본성이 포식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 포식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우리가 아직 분석하지 않은 시간의 두 번째 절편, 즉 미래에서 찾을 수 있다.

3. 미래로의 윤리적 도약

영화의 결말부에서, 길은 이러한 과거에의 지향이 1920년대의 사람들에게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벨 에포크 시대를 동경하며, 벨 에포크 시대의 사람은 고전 시대의 사람을 동경한다. 그러면서 길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현재로 돌아와 새로운 연인을 만나며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의문점이 숨겨져 있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재 자체에 충만하다는 것이 어떤 방식을 통해서 가능한가? 덩어리진 형태로 자신의 질량을 유지하는 과거와 미래와는 달리, 현재에는 어떠한 질량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자체를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질량이 없는 매 순간순간을 처절하게 붙잡아야 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인간의 코기토를 발견했을 때, 그가 직면한 문제도 이러한 것이었다. 코기토는 현재의 특정한 시점에 단면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나’의 동일성은 다른 방식으로 담보되어야 하며, 이를 보증해주는 것은 데카르트에게서는 신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신의 보증, 목적인, 실존과 같은 방식으로 이에 대해 해명하지만, 이들에게는 사실 공통된 점이 있다. 바로 미래에 의해서 존재가 보증된다는 점이다. 신, 목적, 그리고 실존적 자유는 모두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나갈지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변에 다름 아니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다음 순간의 미래를 보고, 그 미래를 만들어나갈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행복감은 사실 미래에 대한 안정감 없이는 보증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다음 순간에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게 된다면, 현재에 대한 행복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매 순간의 개인의 좋고 나쁨과 관련된 윤리학적(도덕과 구분되는 의미에서) 판단들은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결단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시간의 불가역성으로 인해 과거는 우리에게 자연스레 닿을 수 있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미래에 닿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우리를 미래의 한 점으로 던져놓아야 한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간극(어쩌면, ‘무’)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경화하여 정지시키고 임시적으로 객체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길이 이네즈와 헤어지기로 결심하는 순간에, 그리고 길이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는 순간에 길은 자신의 낭만적 본성을 잠시 중단시키고, 철저한 결단을 내린다. 이것은 우리가 포식을 멈추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결단으로, 윤리는 따라서 항상 개인의 내재적 질서를 넘는 초월적인 영역으로 존재하게 된다. 윤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도덕이라기보다는 미적 숭고에 가까운 것이 된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보여주는 예술적 이미지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길의 낭만적인 모습은, 이 미적 숭고를 담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길의 새 연인은 그의 결단을 상징한다

또한 이러한 미적 숭고는 과거로의 침잠을 겪어 본 뒤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길이 만약에 과거에서 인물들이 더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는 미래로의 도약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미래를 향한, 자신의 구조를 벗어나는 결단은 과거에서 기원한 생명적 본성이 몸 속에서 살아 숨쉴 때에만 가능하다. 길이 황금 시대의 낭만을 뒤로하고 파리의 비 속으로 걸어들어갈 때, 그가 향하는 시간의 방향은 정 반대로 뒤바뀌었다. 과거와 현재를 먹어치우던 포식자는 다음 순간 자신의 포식을 중단하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지속을 중단하는 숭고한 고행자가 되며, 마지막 순간에는 비로소 삶의, 세계의 창조자로 재탄생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선뜻 따르기 어려운 아브라함을 향한 명과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