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퀘어>가 드러내는 이중의 배제 구조에 대하여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조지 오웰이 그의 경탄할 만한 저서에서 남긴 이 어구는 ‘평등’이라는 우리의 가치가 얼마나 빈곤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 영화 <더 스퀘어>는 우리가 오늘날 현대미술이라고 부르는 전위적 예술이 현실의 도덕 속에서 얼마나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조지 오웰의 문장과 영화 <더 스퀘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각기 충격을 주는 텍스트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영화 <더 스퀘어>와 이 문장을 함께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예술의 가치에 관한 비판과 억압적 가치를 지탱하는 권력의 힘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스피노자와 들뢰즈에게서 부정과 무의 문제: 배제로서의 ‘더 스퀘어’
철학자 질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무 개념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그의 철학을 전개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가 결정적으로 분기하는 것은 바로 이 ‘무’라는 관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스피노자는 요리스 엘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다음으로 도형이 부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그것(부정)은 사실 지성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러므로 도형은 규정(Determinatio)에 다름 아니며, 규정은 곧 부정(Negaito)이기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부정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편지들』, Letter 50)” 그의 통찰은 규정이 부정을 항상 함의한다는 것이다. 규정을 하면서 우리는 그것의 다른 가능성을 모두 배제해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도형을 원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삼각형이나 사각형일 수 없다. 기하학의 전체 원리, 나아가 여기에서 추론되는 형이상학의 모든 원리는 따라서 배제와 부정의 아이디어에 닿아 있다.
영화 <더 스퀘어>에서 나오는 가공의 예술작품인 ‘더 스퀘어’ 또한 이러한 작용을 한다. 영화 속의 묘사에 따르면, 그곳은 성역이며 그곳에 들어간 타인을 모두 도와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더 스퀘어는 인본주의의, 평등의, 신뢰의 장소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사각형은 곧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규정하는 사각형이다. 사각형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평면화되고, 다른 가능성은 배제된다.
들뢰즈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들뢰즈는 주체가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각형 내부에서 어떤 한 개인이 되려는 시도는 그가 보기에 허상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정, 즉 ‘무’에 정초하여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더 정확히는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무’는 그저 존재에 어떤 개념을 덧입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에서 존재를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생각하고 그 위에 무라는 관념을 덧씌운다. 따라서 무는 존재보다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허구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들뢰즈에게서 존재는 꿈틀거리는 순수한 긍정성, 생명성이며, ‘더 스퀘어’는 이 생명을 가두는 편협한 조형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올레그가 유인원 흉내를 내면서 상류층의 사람들이 있는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순수한 방출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동물을 흉내내며, 날것으로 행동하는 순수한 의미의 ‘차이’를 뿜어낸다. 동물-되기의 과정을 통해서 올레그는 주어진 재현의 장을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2. ‘더 스퀘어’에서 두 번째 배제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문제점을 목격한다. 올레그가 흉내내는 유인원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파티에 나와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심지어는 어떤 여성에게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기까지 한다. ‘탈주’, 혹은 ‘되기’(devenir)는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생명을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은 그것이 먹이를 먹어치우는 일을 관조만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억압되는 실제적인 누군가들을 전혀 보호해낼 수 없으며, 단지 고삐풀린 생명에게 면죄부만을 제공할 뿐이다. 강자의 역량 안에서 약자의 역량은 위축될 뿐이다.
들뢰즈의 개념에 가해지는 보다 명시적이고 치명적인 비판은 다음과 같다. 그는 ‘더 스퀘어’를 지워버리면서, 보다 원천적이고 숨겨져있는 어떠한 종류의 배제를 다시금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 스퀘어’에서 행해지는 배제의 작업은 사실 이중의 층위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종전에 이야기했던 비판, 즉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평면화시키고 규정한다는 사각형 내부에서의 비판이고, 둘째는 도움, 또는 신뢰의 절대적인 장소를 만들어냄으로써 사각형 바깥은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차원에서의 배제일 것이다. 전자의 논리가 사각형의 내부 범위를 지정한다면, 후자의 논리는 도형 바깥의 모든 것을 우리의 관심 대상이 아닌 것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이 배제가 잘 드러난다. 미술관은 ‘모두를 위한 성역’으로 이야기되지만, 정작 그 앞에 앉아있는 노숙자들은 계속해서 구걸을 하고 있다. 미술관의 고객들, 그리고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 중 누구도 그들을 바라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더 스퀘어’에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술관의 마케팅팀에서 구상한 소녀가 터지는 내용의 영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평범한 인본주의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서 아이를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하고, 그 때문에 영상이 문제가 된다. 이 영상의 내용 자체도 논쟁거리지만, 그보다도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영상이라는 재현된 이미지에만 신경을 쓰지 영상 밖에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약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도 없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영화 속 대중의 관심은 오로지 크리스티안이 사퇴하느냐 마느냐이다. 실제로 그 영상이 미친 영향조차도 대중들에게서는 고려되지 않으며, 오직 그 허구적 영상이 갖는 기의에만 관심이 쏠려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누구에게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은밀하고 묵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두 번째 형태의 배제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주장에서도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심지어는 선의를 가진 주장에서도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더 스퀘어’는 분명히 누군가를 돕자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크리스티안이나 상류층 고객들은 미술관 밖의 노숙자들을 도울 수 있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노숙자들을 도울 수는 없다. 단지 어떤 노숙자들을 도울 수 있을 뿐이며, 이 과정에서 다른 노숙자들은 배제된다. 영화 속의 대중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악의를 가지고 구체적인 어린 소녀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영상을 자신의 삶 속에서 대면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밖에 있는 것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들뢰즈의 해결책이 미완인 까닭은 이 지점에 있다. 들뢰즈는 사각형을 지워버림으로써, 사각형 안의 존재들을 날 것 그대로의 상태를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동일성을 해체하고 타자를 긍정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것은 들뢰즈주의의 가장 큰 공헌이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점은, 그들이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각형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개인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사각형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하기 때문이며, 사각형을 지워버리는 것은 단지 그들이 가고 싶어하는 이상향을 처참히 부숴버리는 것일 따름이다. ‘더 스퀘어’는 인본주의와 도움, 신뢰의 상징이다. 사각형 바깥에는 인간도, 도움도, 신뢰도 없다. 강인하지 않은 생명은 사각형의 바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들뢰즈의 긍정적 철학은 약자와 소수자를 해방시키려 하지만, 그 해방의 조건이 생성적 역량과 탈주의 강도에 달려 있기 때문에, 더 수동적이고 취약한 약자는 오히려 재배제될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들뢰즈 철학의 긍정이 무조건적 포용이 아니라 능동적 힘의 계보학에 기반한 선택적 긍정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잔여적 엘리트주의(residual elitism)를 남긴다.
3. 십자가를 이고 사각형을 그리기
그러므로 우리의 윤리는 순수 긍정의 위에 정초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무’의 개념을 어떻게 절묘하게 생명이라는 긍정성 위에 덮어낼 수 있는지의 문제만이 남는다. 우리는 사각형을 지워버릴 수도, 그렇다고 계속해서 사각형으로 남겨둘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떤 윤리를 택해야만 하는가?
영화가 미술관이라는 대상을 택한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다. 사각형을 그리면서 신뢰와 인본주의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단지 미술관에 갇힌 ‘미(美)’의 차원에 머문다. 미적 재현은 때로는 폭력을 수반한다. 생명의 꿈틀거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 기존 체계의 문제를 드러내는 작업이 현대의 미술 작업이 가지는 의의라면, 그 프레임 내에서는 현실의 윤리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미술이 가지는 대상성으로 인한 본래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의 방법도 안온한 미술관을 벗어나 축축한 현실로 나서는 데에 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린 소년에게 관심도 가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이 그 소년을 계단에서 밀어버리고 소년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온 순간, 그의 마음 속에는 죄책감이 머물기 시작했다. 그는 그러고는 미를 좇는 큐레이터가 아닌 ‘숭고’를 좇는 아버지로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사각형의 세상들을 직면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는 사각형의 잔혹함을, 현실의 지저분함을 목도하고는 소년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두 지점이다. 첫째는 그가 소년을 찾아내는 데에 끝내 실패한다는 점, 둘째는 깨달음을 얻은 크리스티안의 속죄마저도 배제의 과정을 내포하게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전자의 문제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윤리학이 끝내 성취될 수 없는 목표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함의한다. 크리스티안이 죄책감을 느끼고 소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린 상황이었다. 이는 우리가 행한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고 뉘우치는 순간은 어쩌면 우리의 잘못이 누군가에게 회복될 수 없는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의미할 것이다. 후자의 문제는, 우리가 잘못을 반성하려고 하는 행위조차도 다른 이들에게는 또 다른 잘못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함의한다. 크리스티안의 죄책감은 아주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딸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지, 불특정한 다수에게 미안함을 느낀 것이 아니다. 소년을 찾아 헤메는 동안에도, 그 소년을 제외한 다른 대상들은 의도적으로 영화에서 비춰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크리스티안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그가 사각형 바깥으로 나가 웅크리려는 노력을 그가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각형 지워버리거나 견고하게 그리는 것, 둘 중 무엇도 택할 수 없다. 사각형을 모호하게 그려두고는 그 경계를 끊임없이 연장해나가는 것, 그리고 연장해나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또다른 명확한 선을 그려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만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윤리의 유일한 방향일 것이다. 이 윤리는 점근적으로조차도 세계 전체에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진보에 대한 믿음 없이도 가시관을 머리에 쓴 채로, 십자가를 옮기며 사각형을 그려나가야만 한다. 이 사각형의 작업에서, 미는 숭고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은 항상 바깥을 생각하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대상을 택하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배제를 다시금 부활시킴을 의미한다. 시작에서는 특정한 사람에 대한 이념으로 윤리가 시작되더라도, 종국에는 바깥의 모든 이들을 향해야만 한다. 조지 오웰의 문장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재서술될 때, 비로소 현실의 윤리가 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그러나 항상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덜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