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RF(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 펠로우십) 컨퍼런스 후기- 2
나는 연구도 하고 활동도 하는 사람이다. 연구자와 활동가 중간의 애매한 위치에 있다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열린 <아시아의 청년들 도시 삶의 연구자가 되다> 컨퍼런스에서 '액티비스트-리서쳐(Activist Researcher)'라는 개념을 만났다. 정체성의 혼란이 사라졌다. 지난 회에서는 그 사연을 소개했다.
컨퍼런스를 개최한 서울시 청년허브와 씨닷, LAB2050은 사회 변화를 위한 활동과 연구를 함께하는 사람들을 액티비스트-리서쳐라고 호명하고 앞으로 이들을 지원하는 플랫폼인 ‘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 펠로우십’을 론칭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시아, 청년, 도시, 미래, 연구자라는 개념들이 얽혀서 사실은 홍보물만 보고는 이 컨퍼런스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무엇인가 나랑 조금은 연관이 있는 듯 한데, 내가 가도 되나라는 마음이 들어 조금 쭈뺏한 마음으로 갔다. 왜냐면 이젠 내 나이도 슬슬 청년에서 멀어지는 것 같고, 연구자라는 말도 내 일부만 표현하는 것 같아서. 모호한 말 속에도 왠지 모르게 '액티비스트-리서쳐'라는 말과 연사들에 끌려서 간 것 같다.
만삭 배를 이끌고 꼬리뼈 통증을 참으며 이틀동안 긴 컨퍼런스와 워크숍에 참여했고, 그도 모자라 새벽에 앉아서 후기까지 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았다. 첫째 날엔 액티비스트-리서쳐라는 나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개념이 너무 반가워서였고, 둘째 날엔 내 주변의 액티비스트-리서쳐인 다양한 사람들(특히 독립활동가 모임에서 만난 수 많은 젊은 독립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떠올라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
AYARF는 우선 서울에 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 펠로우들을 위한 레지던시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펠로우들의 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듯 한데, 컨퍼런스에서 그 벤치마킹 사례로 캐나다의 게팅 투 메이비(Getting to Maybe)와 이화여대의 이화 글로벌 임파워먼트 프로그램(EGEP; Ewha Global Empowerment Program)를 소개했다.
특히 게팅 투 메이비 사례는 둘째 날 워크숍에서 현지에 전화 연결을 해 자세하게 다루었다. 캐나다에서 시작한 사회혁신 레지던시로 사회 변화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진 전문가, 리더, 혁신가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인데,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는 센터에서 28일동안 생활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과 멘토링, 사회혁신 프로젝트 진행 등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AYARF는 아시아의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들을 위한 지원 플랫폼으로서 레지던시를 서울에 운영할 계획이라고 하고, 아직 시작 단계라서 구체적인 구상은 협의를 통해 이뤄질 계획이라고 한다.
이전 글에서 액티비스트-리서쳐로서 나와 듣는연구소는 어떤 역량을 어떻게 기르면 좋을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활동과 연구 역량을 함께 기르는 곳은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액티비스트-리서쳐라는 고유의 활동 영역과 방법론이 고안되고 그에 필요한 전문성을 기르도록 조력해 주는 곳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레지던시가 그런 역할을 하려나라는 기대가 된다. 아닐까?
더불어, 내 주변에 있는 수많은 독립러(독립 활동가/연구자)들이 기반 없는 상태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 역할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액티비스트-리서쳐의 사례로 소개된 여러 사례 중에서 한국의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희원의 이야기는 무척 공감이 되었다. 희원은 '내가 사는 삶'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가 기본소득운동에 합류하고 나서 "기본소득 운동이 내 삶을 잘 해석하고, 바꿔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팀원들과 공부하고, 탐방하고, 토론하면서 자신들이 살고싶은 삶에 대한 욕망을 '기본소득'이나 '생활동반자법'과 같은 구체적인 언어로 만들었다. 그 언어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왔다.
희원의 발표에 무척 공감했다. 나 역시 내 삶에서 겪는 문제와 욕망이 무엇인지, 사회 속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에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귀촌을 통해 다른 삶의 속도와 방식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청소년기를 더 의미있게 보내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내 삶의 복잡 다단한 문제들을 풀어가면서 어떻게하면 상상할 수 있는 삶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지 계속 궁리하고 작당하는 삶의 방식이 액티비스트-리서쳐로서 내 삶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희원은 고령화, 저성장, 환경오염 등 예전보다 불확실한 사회에서 자기 삶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가야 하는 청년세대에게 이런 삶의 방식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고 했다. 액티비스트-리서쳐는 싸울 대상이 명확했던 기존의 사회운동과 달리 복잡해서 지금 내가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현 세대의 청년들의 운동 방식이란 것이다. 그래서 청년을 지원하는 기관인 청년허브에서 액티비스트-리서쳐를 기르겠다고 선언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았다.
서울시 청년허브는 2014년부터 “청년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다”라는 이름으로 청년 연구자들의 연구를 지원해왔습니다. 거기엔 주거, 일자리, 사회 양극화, 생태계 파괴, 혐오와 폭력, 인권 침해 등의 문제들이 가진 복잡한 맥락을 직시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스템과 합의의 과정을 설계하려는 도전이 있었습니다. '연구와 실천 사이'에서 활동하는 '위대하고 고단한' 개인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탐색과 실천이 지속 가능하려면 어떤 기반이 필요할지 항상 고민해왔습니다. (청년허브, 컨퍼런스 브로셔)
나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우선 주위를 둘러본다. 나같은 사람이 보이면 모여서 얘길한다. 내가 겪는 문제가 나 혼자만의 개인적 문제인지, 아니면 사회적인 문제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들도 나 같은 어려움을 겪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개인 뿐 아니라 어떤 사회가 겪는 문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아니면 어떤 국제적인 흐름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것일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나왔을 때, 유럽의 우리 또래도 '1유로 세대'라고 불린다는 걸 알았을 때, 단지 우리의 '노오력'이 부족해서라거나 불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경제 시스템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국제교류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다양하다. 내 삶의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함께 고민할 수 있다. 다른 문화를 통해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감각도 얻을 수 있다. 내가 괴로운 이유를 개인적 관점에서만 찾거나, 국가주의적 해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야와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국제 교류가 포함되는 것이 반갑다.
하지만 왜 아시아끼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운영을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라고 추측해 보았다. 그리고 서울에 레지던시를 마련한다고 하는데, 아시아 플랫폼이지만 서울에서만 프로그램이 운영된다면 교류의 효과를 충분히 보기엔 아쉬울 것 같다. '액티비스트-리서쳐 펠로우십'을 운영하는 다른 아시아 거점들과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이뤄진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또, 도시 간 교류라면 국내의 다른 도시와 교류가 이뤄져도 좋을 것 같다. 지방에서 독립 연구자/활동가들의 교류나 성장에 대한 욕구가 큰 것 같다. 부산에서 열린 독립러 모임에 참여했을 때 참여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다보면 독립 활동가가 되기 쉬워요. 내가 하려는 활동 분야의 인적 풀이 지역에는 워낙 적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다른 지역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싶어요. 역량을 기르려면 서울에 가야 하는데, 지역에서도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어요."라고. 최근 지역에 청년 활동가들을 지원하려는 거점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국내에서도 그런 기관들과 함께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어떨까? 지역 청년들 뿐 아니라, 서울의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들에게도 다양한 지역을 경험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펠로우십'이라는 말을 들으면 위대한 사람이 떠오른다. 선입견일 지 모르겠지만. 왜냐면, 기존의 펠로우십들은 대개 활동을 오래, 잘 한 사람들이 선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 펠로우십도 이름나게 활동 잘 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선발되기 위한 경쟁에 지친 청년세대에게 펠로우십이 그러한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선발 기준을 갖지 않았으면하는 바람이 있다. 차라리 제비뽑기는 어떨까
독립활동가의 시대라는 1인 활동가, 독립 연구자의 느슨한 커뮤니티가 있다. 이곳에서 만난 독립러들은 많고, 다양하다. 앞서 청년 세대 활동(사회 운동)의 특징은 이전 세대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했는데, 이 모임에서 그 살아있는 증거를 볼 수 있다.
특히 독립러 모임에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청소년, 대학생, 비진학 청년 등이 오기도 한다. 사회변화를 꿈꾸며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학문 연구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활동을 모색하는 to be 액티비스트-리서쳐들도 무척 많다.
예전 같으면 환경이나 노동에 관심있는 청년들이 환경단체, 노동단체에 들어가는 커리어를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단체에 들어감으로서 활동가가 되는 길만을 우선 떠올리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 더 알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대학원과 활동을 병행하거나, 혼자 또는 삼삼오오 모여서 프로젝트를 하거나..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을 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커리어 비전이나 롤모델이 없는 상황이다. 안전망이나 네트워크, 교육 등의 사각지대에 놓인 많은 청년 독립활동가들에게 곧 런칭될 AYARF 플랫폼이 하나의 거의 최초의 사회적 지원처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어디까지나 '바람'이니까 혼자서 꿈 꿔보는 것이긴 하다. 정체성을 처음으로, 제대로 호명당한 사람들로서 신나서 꿔보는 꿈이랄까?
by 듣는연구소 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