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은 건 나였을지도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대체된다

by 실험하는 마케터

오래간만의 외출에 너무 들떴던 걸까. 실컷 잘 놀고 잘 먹고 집에 돌아와 낮잠까지 늘어지게 자고서는 멀쩡히 일어났는데 주방으로 걸어가서 잠시 멈추어서 서자마자 눈앞에 새까매지더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미주신경성 실신 3n년차는 바로 내가 몇 초 후 쓰러질 거란걸 직감하고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귀가 아프고 머리가 아파서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떠보니 나는 주방 바닥에, (너무 놀란 불쌍한...) 남편은 그런 나를 붙들고 이름을 부르며 온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 쓰러졌었구나, 몸을 일으켰는데 머리 뒤쪽이 깨질 것 같았다. 선 자리에서 그대로 꼬꾸라졌다며 응급실에 가자는 남편의 말을 들으니, 학교에서 배운 뇌진탕의 위험성이 불현듯 생각났다. 조금 안정을 취하고는 바로 병원행. 하지만 여기는 해외다. 머리 CT를 포함한 모든 검사와 진료를 마치고 집에 오니 월요일 새벽 5:30. 의사는 2주 정도는 안정을 취하라고 했고 바로 내 직속 상사에게 왓츠앱을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2~3일 정도는 병가를 사용하고 싶다고.


바쁜 시기는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공백이 생겼으니, 잠깐만 자고 로그인해서 전달할 것들은 정리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책임감이라고 믿었던 말이었다. 오전 10시쯤 회사 컴퓨터를 켰다. 걱정하지 말고 충분한 휴식을취하라던 왓츠앱 회신과는 다르게, 나를 찾는 이메일들에는 이미 내가 오후에는 로그인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예정돼 있던 위클리 1:1 미팅은 오전에서 오후로 옮기자는 캘린더 요청과 함께.

정신을 잃고 선 자리에서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고, 그래서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사람한테 이럴 수 있나? 병원 다녀오자마자 상황 설명했는데 대체 어느 맥락에서 내 머리가 오후쯤엔 괜찮아질 거란 추측을 감히 한 건지 너무 화가 났다. 1:1 미팅은 그대로 취소하고 팀원들에게 간단한 설명 후 인수인계를 했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상사 입에서 "괜찮냐"는 말이 나오는 데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멋쩍은 미소와 적절한 자기 비하 발언을 섞어 나를 위로하는 말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선을 넘은 건 저쪽이 아니라 나였다. 애초에 선 같은 건 없었으니까.

해외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많이 일하는 것과 일단 yes 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굴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급한 일이 아닌데도 "잠깐 로그인해서 인수인계하겠다"는 제안은 내 상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는 괜찮다"는 힌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어디까지 허용했는지, 언제 침묵했는지. 경계를 무너뜨린 쪽은 나다.


나의 ‘선’은 설명이 아니라 행동으로 생긴다

꽁한 감정을 오래 가져가는 편도 아니고 더군다나 여긴 개인 서사 따위 HR 시스템에 저장도 되지 않는 회사 아닌가. 이미 있었던 일은 담담히 공유했고, 먼저 괜찮냐 묻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도 받았고 불편한 감정은 없다. 하지만 2026년으로 가는 마음가짐은 바뀌었다. 본격적으로 휴가 계획을 세우고 누구보다 빠르게 일정을 선점했으며 대체 되지 못할 삶의 위치에서 더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 나의 강아지와 함께 발맞추어 걷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 있는 시간에 아끼지 않아야지. 중요한 것은 태도라고 하지만 매일 최선을 다하면 이리도 피곤해지는구나. show up 하기로 결정한 곳에서는 120% 노력을, 발 뺄 때는 확실히. 분필 가지고 내가 서있어야할 바운더리를 그어주는 사람은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지켜주지 않은 나를 원망하기 시작할 때

20대 초반에 한 적성 검사 결과의 일부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 "문학적, 지적 소양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 나의 가치를 내면에 두기 시작할 때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내려간다. 무엇을 그렇게도 증명하고 싶어서 전전긍긍했을까? 반지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포장한 과한 친절, 상식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쓸모없어짐에 대한 두려움 - 뭐 그런 것이었을까. 새해부터는 영어권에서 습관처럼 쓰던 자기비하를 줄이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귀 기울여 듣지 않더라도, 내가 듣고 있으니까. 나에게 쓰는 단어들에 다정함을 담아 선택하기로 했다.억울한 감정, 변명과 호소의 방향은 늘 타인을 향해있었지만, 방향을 바꾼다. 성장이라는 불편한 단계를, 의식적으로 선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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