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마지막 변수

AI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결국 인간다움으로 버티기

by 실험하는 마케터

최근 우리는 삼성, 현대, 엔비디아의 수장들이 치킨집에 한데 모여 트리플 러브샷을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AI 시대가 도래했다. 직급과 섹터에 상관없이 AI라는 단어를 빼고는 대화할 수 없어진 건 비단 내가 일하는 브랜드만은 이야기는 아니겠지. 휘몰아치는 이 변화의 시대에서 마케터들의 롤은 어떻게 변하고 진화해야 하는지 동료들과 얘기하다 재미있는 인사이트가 많이 나왔다.


인간=질, AI=양?

학교 과제를 시작할 때마다 워드를 켜고 몇 시간 빈 페이지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최 어떤 말로 글을 시작해야 하는지, 마치 빈 종이를 노려보면 마법처럼 검은 글자가 샘솟을 것처럼 정리 안 되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다림질하며 빈칸과 씨름하던 학생 시절. 어려운 것은 학교 과제뿐이었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친구의 고민 상담에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회사를 떠나는 애매하게 아는 사이인 동료에게는 어떻게 축하해줘야 하는지,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 사회적 통념,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모두 한데 엮어 완벽한 문장을 만들고 싶어도 그게 참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혁신 그 자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말문을 열어준다. 시기적절하고 상대와 나의 관계성까지 고려한 글은 물론, 이미지 또한 그 발전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장난스러운 프롬프트에 딱 들어맞는 이미지를 생성해 주질 않나 사진에서 거슬리는 것들을 없애고 빈자리를 메꿔주기까지! 하지만 AI가 써준 글을 그대로 쓰기엔 인간미가 2% 부족하고 생성해 준 사진 속 나는 뭔가 묘하게 실물과 다르며, 지워내고 채워 넣은 사진에는 현실은 사라진 채 엉성하게 피사체만 남는다. 인간미라는 게 결국 조금은 엉성하지만, 정감가는 것이었나.

올해 초, 뜬금없지만 좋은 기회로 카피라이터 직무 인터뷰를 보게 되었는데 대화 중 내가 했던 대답 또한 1분 내로 수십, 수백 개의 카피를 뽑아낼 수 있는 AI를 소유한 우리가 아직도 카피라이터를 필요로 하는 이유에 도전하는 말이었다. 브랜드 인테그리티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념을 전달해야 할 때는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단어로 말에 살을 붙이고 크리에이티브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에 반해 AI는 몇 초 만에 몇십 가지, 몇백 가지, 부르는 대로 쏟아낸다. 내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해야 나올 방향이 몇 초 만에 쏟아지는 세상. 그중에서도 내가 원하는 걸 찾는다는 건 이미 생각은 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가려운 부분을 AI가 긁어주는... 꽤 답정너다운 작업 아닐까? 결국 사람이 주는 인풋으로 학습하고 움직이니 말이다.

양과 질, 무엇이 더 중요한지 정해진 답은 없는 것 같다. 또 인간이 만들어야만 퀄리티가 높다고 자부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시대에 뒤처진 생각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아직 AI다운 것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완벽한 사과문, 알맹이에 비해 서문이 너무 긴 정보 글, 최근 들어서는 과하게 연출된 듯한 비디오들까지. 퀄리티 높은 것이 점점 인간미 있는 것으로 의미가 변해가는 것 같다.

나 또한 브런치에 쓰는 글만큼은 AI의 도움을 지양하고 있는데 이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이 고통스러웠나, 새삼 느낀다.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것뿐인데 얼마나 일상생활에서 많은 AI 도움을 받고 있었는지 경각심이 들 정도이다. 이제는 AI의 영역이 미술과 음악을 포함한 예술계로도 뻗어나가고 있는데 천천히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그저 나에게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감성이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오래 함께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쩌면 이미 없어선 안 될...

마케팅의 캠페인 파이프라인은 크게 1) 기획, 2) 실행. 3) 최적화 및 마무리,로 요약되는데 이 중, 내가 AI의 도움을 제일 많이 받는 영역은 역시나 최적화 및 마무리 단계이다. 설득과 허락(?), 실행력이 제일 중요한 이전 단계들에 비해 내가 원하고 설계했던 결과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와 더 많은 추론, 결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케팅 버짓에 따라 오디언스 (audience)의 사이즈는 천차만별이어도 단돈 만 원을 쓰더라도 국민 중 10명만 목표로 하겠다는 마케터는 없을 것. 팥 빠진 붕어빵이지만 사실 이전 캠페인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데이터 수집이고 lessons learned에 맞춰 다음 캠페인을 수정하는 것 또한 최적화이다. 팥이 되는 코어는 누가, 언제, 어떻게 내 캠페인에 노출되었고, 얼마나 오래 engage 했으며 어떤 액션을 취했느냐 하는 사람에 대한 데이터. 이 부분이야말로 AI의 도움 없이는 너무나 방대하고 막막한 작업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나는 AI 입덕 부정기일 수도 있겠다. 이미 나에 대해 위험할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 데이터, 알고리즘과 컴퓨팅 파워가 만들어낸 천재 같은 바보 같은 바보 같은 천재 같은 너.

아마도 점점 더 많은 영역으로 AI의 손이 뻗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이른 시일 내로. 내가 일하는 회사는 최근부터 대행사 브리핑 포맷에도 AI를 도입하여 빠르고 쉽게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이 말인즉슨 대행사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수많은 자료에도 AI의 솜씨가 뽐내져있다는 말이겠지? 옳고 그름을 따지기엔 이미 우린 너무 멀리 왔고 AI 발전의 상승곡선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하다.

언젠간 사람과 사람의 대화도 들여다보면 AI 투 AI의 이야기가 되어있진 않을까 생각하면 무섭지만, 여전히 동료 생일 카드 문구를 챗지피티에 물어보고, 별 볼 일 없는 셀카를 제미나이에 링크드인용으로 프로페셔널하게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나. 결국 지킬 건 내 마음뿐, 내 중심과 인간미뿐이다.


도구는 계속 바뀌고,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AI가 나를 대신 써주고, 대신 말해주고, 대신 판단하는 순간이 많아져도 내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도 위탁하지 않으려 한다. 기계들은 계산하고, 나는 느끼고. 그 역할이 바뀌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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