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아픈 뒤로는 요가는커녕 스트레칭조차 맘껏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운동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피스니스센터에 도착해서 런닝 머신 30분을 걷고, 기구 운동도 찔끔했는데 놀랍게도 한 시간이 가볍게 지나갔다.
세상에! 비바람을 뚫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날씨 조오타!
2018년의 네 번째 날,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몸이 안 좋아지면서 매우 비생산적이었던 지난 하반기.
예전 글에 기록했듯이 작년 여름부터 갑자기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의사의 진단 후 수개월간 꾸준히 운동치료를 받았다. 늘 신경 쓰고 조심하니 세상이 두 동강이라도 난 것처럼 울적하던 그때에 비하면 몸도 마음도 눈에 띄게 나아졌다.
프랑스에 오고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쌓였던 스스로에 대한 불신. 어쩌면 마음의 병이었을 그것을 한 번에 해결해 준 것이 내겐 그림이었다.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일상에 관한 이야기였기에 미니와 함께 살아가는 순간들을 그림으로 옮겼는데 처음부터 글을 쓰려던 건 아니었다. 부족한 그림 실력을 메우려다 보니 의도치 않게 나의 이야기를 적어나가게 되었고, 브런치는 어찌 보면 내 삶의 무게를 짊어진 공개된 일기장이 되었다. 그 일기장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한 채 낙엽 떨어지는 한 계절을 보냈고 겨울을 맞이했다. 여전히 격한 운동은 시도할 수 없고 불편한 날들도 있지만 온전히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된 것만 해도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
그 사이 미니가 고생을 좀 했다.
오래 서 있는 것이 불편했던 나 때문에 미니가 해야 할 집안일의 양의 훨씬 많아졌고, 마침 이직까지 하게 돼서 꽤나 멀리 출퇴근하면서 새로운 직장에 적응해야 했다. 다행히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데 그것은 실내 클라이밍. 친구의 권유로 한 번씩 가더니 언젠가부터는 매주 출근 도장을 찍었다. 본인이 흥미를 갖으면서는 내게도 시도해 볼 것을 권유하기 시작했는데 이유야 뭐 매번 바뀌었다. 다리 운동에 좋다, 근육 발란스에 좋을 거 같다, 다리 대신 팔운동이라도 해야지, 같이 오는 커플이 많다, 여편이랑 같이 가면 더 재미있을 거 같다… 등등. 남편의 성화에 담당 운동치료사에게 물어보니 너무 무리하지 않는다면 해 봐도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도 워낙 운동신경이라곤 없는 데다 아직 무리한 운동은 좀 겁이 나서 나중에 가겠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는데 그 사이 미니는 한국에서 온 내 동생, 뉴질랜드에서 휴가 온 시누이, 파리에 사는 친구들과 사촌들을 줄줄이 다 끌어들였다. 아~ 재미있어 보이는데 용기가 없다. 미니랑 같이 벽 타고 놀고 싶은 내 맘과 달리 또다시 아프게 될까봐 두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 정말 나답다.
내 성격을 잘 아니까 이런 답답한 나를 남편은 이해했다. 클라이밍을 같이 못하는 대신 다른 것을 하기로 했다. 집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일. 우리는 미니가 좋아하던 예전 에니매이션들을 같이 보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에도 몇 번 미니가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매번 거절했었는데, 불평 한마디 없이 집안일을 도맡아 해 주고 내게 용기를 주려 노력하는 남편이 고마워서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어릴 때도 안 보던 장르의 것들을 이 나이에 보게 줄은 몰랐는데 막상 보다 보니 빠져들어서 저녁 먹고 보고 주말에도 보고 틈만 나면 봤다. 또 이젠 그림 그리는 사람의 관점에서 캐릭터와 배경들을 살펴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작가들을 향한 리스펙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새록새록. 제일 좋은 건 미니랑 나 사이에 통하는 게 한 가지 더 생긴 것.
너무 잼있어!! 한편 더! 한편 더!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매우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강철의 연금술사(FMA). 연금술을 주거니 받거니
이얍!!
나도 이얍!
나루토
남편! 나 좀 봐! 라셍간!!
그럼 나도! 카게분신!!
만화를 안 보신 분들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시겠지만, 한 마디로 주인공들의 온갖 기술을 시전 한다. 우린 밖에 나가면 지극히 평범하고 멀쩡한 사람들인데 집에 둘만 있으면 이렇게 된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고 미니도 이러지 않았는데 같이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치해지는 것 같다. 웃기고 있다 해도 별 수 없다. 재밌으니깐… 우리 둘이라서, 내가 하는 모든 걸 이해해 주는 미니가 내 남편이라서 힘든 시간을 긍정적으로 잘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우리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외모도 닮지 않았고, 태어난 곳이 다르니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고, 타고난 성격조차 다르다. 사람 만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미니와 낯가림이 심한 나. 활동적인 미니와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나. 운동신경이 좋은 미니와 신체활동이라곤 꽝인 나의 저질 몸. 대담한 미니와 세상 겁쟁이인 나. 영화와 음악은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미니와 보고 듣고 싶은 것만 쏙쏙 편식하는 나. 이토록 다른 우리가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기하리만큼 잘 맞아 들어가고 있었기에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몇 달 몸이 아프면서 의도치 않게 미니를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는데 우리는 닮아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비슷해질 수가 있겠는가. 우린 여전히 다른 두 사람일 뿐이고, 행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감사해야 할 것은 하늘이 내려 준 그 어떠한 운이 아니라 내 남편의 노력이었다. 타지에 와서 사는 나를 위해 가장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고, 더 좋은 남편이 되려 애쓰는 미니의 노력.
해마다 그랬듯 올해에도 몇 가지 계획과 백만 가지 소원을 노트에 적었다.그리고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는데 그중 가장 첫 번째가 운동이다. 건강한 몸으로 즐겁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노력하는 아내로 진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해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 미니는 클라이밍 시즌권을 샀고 나는 피트니스 센터에 연회원으로 등록했다. 몸이 아직 완벽히 회복된 것이 아니니까 일단은 혼자서 열심히 체력단련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말엔 미니랑 같이 클라이밍을 간다. 아직까진 구경만 하는 거지만 함께 가서 내가 봐주는 것만으로도 미니는 신이 나 보인다.
그리고 그런 미니를 보는 나도 행복하다. 내가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어깨춤을 추는 내 남자를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더 튼튼해져서 함께 벽 타고 노는 스포츠 커플이 되는 것을 꿈꾼다. 미니가 원한다면 그 정도쯤은 해 줄 수 있는 내가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