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봇 Jul 05. 2024

시동생의 칼부림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로 몇 안 되는 미국 공휴일 중 하나다. 보통 이 날은 가족끼리 모여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저녁에는 지역에서 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간다. 나 또한 지난 독립기념일에는 남편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장거리에도 불구하고 시가를 찾았었지만, 더 이상 이 날에는 시가를 찾지 않는다. 시동생 때문이다. 


남편은 나와 진지하게 교제를 시작할 때부터 본인의 과거 연애 경력이나 가족의 특이사항 등을 미리 말해줬었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됐을 때 불편해 할 수도 있는 사실들 말이다. 그래서 남편의 남동생이 자폐 증상이 있고 이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 형성을 어려워한다는 건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결혼 전 남편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남동생은 확연히 그런 증상을 보였다. 가족들과는 얘기도 잘하고 눈 맞춤도 하는데, 낯선 사람이던 나와는 눈 맞춤도 하지 않고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절대 먼저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그의 가족들과는 문제없이 대화하고 외출도 같이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단지 타인과 말을 잘 못 한다는 건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미국에서 처음 보내는 독립기념일이었다. 나는 남편과 시가에 방문해 바비큐를 먹고 저녁에 가족들과 간이 의자를 들고 동네 불꽃놀이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시엄마는 외출 전 방에 있는 시동생에게 나갈 건데 같이 가자고 제안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방문을 열어주지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남편, 시부모님, 남편의 누나와 누나의 남자친구 이렇게 6명이서 외출을 했다. 여름이라 낮이 길어 어두워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시어머니 핸드폰으로 시동생의 영상 통화 요청이 오는 게 보였다. 시엄마가 바로 내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계셨기 때문에 핸드폰 화면이 내게도 아주 잘 보였다. 그리고 전화를 받자 곧바로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시동생의 영상이 떴다. 


그는 핸드폰 카메라를 노려보며 다짜고짜 모두 나 빼고 어디 갔냐며, 나는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다, 죽어버릴 거라고 소리를 질렀다. 시엄마는 대체 왜 그러냐며, 나오기 전 네게도 물어보지 않았냐며 칼 치우고 기다리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가겠다고 답하고 시아버지를 끌고 차로 돌아갔다. 기겁한 시엄마와 달리 시아빠는 그 영상 통화를 보고 놀란 기색보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을 처음 본 나와 누나의 남자친구는 어리둥절했고, 남편의 누나는 저 새끼가 저럴 때마다 주먹으로 한 방 크게 먹이고 싶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들의 반응을 보니 자기 목숨을 갖고 부모님을 협박한 게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들어오라는 시부모님의 말을 따라 그들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돌아갔다. 남편과 내가 도착하자 시아빠는 집 현관문 대신 차고문을 열어줬고, 차고에서 만난 그는 속삭이며 불만을 토로했다.  

“쟤는 서른이 넘어서까지 집도 직장도 없이, 내 집에서, 내 아내를 차지하고 지 마음대로 하고 있어.” 

도대체 왜 시아빠가 이 말을 문제의 막내아들에게 직접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앞에서 그것도 차고에서 속삭이며 얘기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상황을 잘 모르는 나는 그저 잠자코 그의 얘기를 듣다가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는 시엄마가 아주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고, 그녀 앞에는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오는 시동생이 반복적으로 시엄마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으면 끊어버리는 행위를 수십 번 반복하고, 문자로는 “밖에 누구야”라는 똑같은 문장을 쉴 새 없이 날렸다. 시엄마는 최대한 차분하게 끊어지는 전화를 계속 받으며 얘기 좀 하게 나와보라고 답하고 있었으나, 시동생은 오히려 엄마가 나를 가스라이팅한다는 이상한 헛소리를 해댔다. 


전화기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시엄마가 내게 사과를 했다. 시동생의 행동을 대신 사과한다는 것이다. 사실 시동생이 저렇게 뿔난 건 다름 아닌 나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먼저 가서 인사하고 말도 붙이고 상냥하게 해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시동생은 이 집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는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 가족들은 모두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떠받들어야 하고 아이처럼 케어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 가족이 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시동생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나 때문에 난 짜증을 본인에게 제일 만만한 엄마에게 내고 있었다. 


다행히 시부모님은 뭐가 맞고 틀린 지 사리 분별은 잘하시는 분들이다. 그래서 시동생에게 “쟤는 네 형과 결혼했으니 이제 우리 가족이고, 대화하고 싶으면 네가 먼저 가서 대화해 봐. 세상이 다 네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라고 말해줬음에도 오히려 그 말은 시동생의 나르시시즘적인 성질만 부추기고 말았다. 영문도 모르고 가만히 있던 나는 “내가 뭘 했다고?” 라며 어이없는 이 상황을 판단해 보려고 애썼다. 나는 그 어떤 정신 문제의 전문가도 아니지만, 그런 전문가가 아닌 내가 봤을 때도 시동생은 실제로 아픈 사람이기보다는 아픈 척하는 사람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시동생은 어릴 때부터 약간의 문제 행동을 보였고, 그때마다 시엄마는 막내가 마음이 아픈 거라 믿고 더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추어 왔다. 시아빠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 집에 머물며 가족들을 돌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수동적인 성향이 강한 그는 그저 아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와서 시동생에게 단호하게 잘못된 걸 말해주는 ‘아버지’보다는 자기 집 차고에서 아들 눈치를 보며 귓속말로 불만을 쏟아내는 ‘보호자’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시동생은 TV에서 본 ADHD나 자폐 증상을 보고 그걸 따라 했더니, 엄마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자 그걸 이용해 지금껏 아픈 척하며 서른이 넘도록 학교도 졸업 못 하고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하며 같이 사는 부모를 컨트롤해 살아왔던 것이다. 물론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그를 조금 더 단호하게 이끌어줬다면 좋았을 텐데, 마음 약한 시부모님은 아들을 감싸며 그때 그때 상황을 모면하며 지내왔다. 나같이 무딘 사람도 그날 저녁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바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시동생은 어른 아이처럼, 또 굉장히 원초적이고 감정적으로 굴었다. 그리고 본인이 유일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지금껏 내게 뭘 해줬냐며 거실로 나와서는 말도 안 되는 분풀이를 해댔고, 그걸 듣던 남편은 참지 못하고 동생과 맞섰다. 

“부모님이 너한테 뭘 해줬냐고?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모님은 너한테 잔소리 한 번 없이 니 모든 뒤치닥 거리를 해주셨는데 어떻게 뭘 해줬느냐는 말이 나와? 너 때문에 엄마는 직장도 여러 번 관뒀고, 엄마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너 때문에 나랑 누나는 할머니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 

남편의 말에 반박할 수 없던 시동생은 갑자기 부엌으로 가 식칼을 꺼내 들었다. 본래 목적은 또다시 그 칼로 자해하는 흉내를 내며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었지만, 사고로 그 칼에 누군가 다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시아빠는 잠금장치가 있는 안방에 나를 비롯해 온 가족을 데리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남편은 그 즉시 바로 동생이 칼을 들고 있고 우리 모두 안방에 숨어 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당연히 연극이었던 시동생은 그 칼로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내지 않은 채 밖에서 아이처럼 갑자기 “엄마, 방에서 나와봐. 문 좀 열고 나 좀 도와줘. 엄마 없이 나는 아무것도 못해.”하며 우는 척을 했고, 그 말에 가슴이 찢어진 듯한 시엄마는 시아빠의 품에 안겨 울었다. 나는 이게 지금 실제 상황인가 싶어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방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경찰은 신고한 지 2분 만에 왔다. 경찰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본 시동생은 칼을 버리고 세탁실로 숨었다. 경찰들은 그를 달래서 세탁실 문을 열게 한 후, 경찰차에 태워 연행했다. 10대 때부터 상담센터를 비롯해 병원을 드나들었던 병력이 있다는 게 참작되어도, 30대 성인이 칼까지 들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시엄마는 막내아들을 연행해 가는 경찰이, 본인의 아들과 어릴 때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는 친구라는 걸 알고 더 좌절했다. 같은 나이에 누구는 경찰이 되었고, 누구는 부모집에 얹혀살며 칼부림하다 경찰서에 끌려갔으니 말이다. 


결국 그 어떤 처벌도, 정신 병원에 보내는 것도 원치 않은 부모님은 새벽에 경찰서로 가서 시동생을 다시 데려왔다. 나와 남편은 칼부림까지 부렸는데 이렇게 빨리 데리고 온 것에 당황하며, 그날 우리가 자는 손님방을 꼭 잠그고 잔 후 바로 다음 날 우리 집으로 내려갔다. 


시동생의 실체를 알게 된 후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다. 너무나 다정하고 좋으신 부모님을, 자기 목숨으로 협박하며 이용하고 통제하려는 태도가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 알면서도 그런 그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고 달래주는 시부모님의 태도를 여러 번 보며, 내가 감히 뭐라 조언을 하거나 연민을 느끼기도 어렵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시부모님이 다른 사람이 된 듯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영원히 시동생에게 끌려 다닐 게 뻔하다. 그분들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바꿀 의지도 없어 보이신다. 자기 목숨으로 부모를 협박하는 자식을 어떻게 단호한 태도로 대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시동생을 바꾸기에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현재는 부모인 그분들이 짊어져야 할 부분이기에 나중에 시동생의 문제가 남편과 나에게 넘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 약을 먹는 남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