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먹을 것 없고 인프라 없는 미국 시골 생활을 시작하면서 우울증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나 교통 체증이 심해지는 여름에는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많아 종일 엉엉거리며 침대 시트를 적셨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늦여름에 한국행 티켓으로 우울증이 심해지는 것은 막은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남편에게 문제가 생겼다.
연애할 때는 안 보였던 증상인데, 결혼 후 미국으로 돌아와 생활하면서 종종 이유 없이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거나 우울해서 의욕을 잃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해외 생활을 마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온 것인데, 오히려 이민자인 나보다 그가 더 심한 우울 증세를 보이니 왜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일단 그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면 같이 다운되지 않도록 약간 거리를 두고, 그때만큼은 최대한 맞춰 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우울한 상태가 되어도 이삼일을 넘기지 않았는데, 올 해는 일주일 가까이 본래의 감정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재택근무로 종일 같이 있는 데다 유일하게 함께 하는 상대가 계속 저기압 상태로 있다 보면, 눈치도 보게 되고 감정을 나눌 사람이 없어 함께 우울해지게 된다. 그래도 우울감을 느끼는 남편이 제일 힘들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동시에 지치기도 해서 회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어딘가로 떠나 우울할 틈이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되나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 물기도 했다.
나도 정답을 알 수 없는 상황에 괴로워할 때 남편이 내게 먼저 말을 꺼냈다. 다음 주에 의사 상담을 예약해 뒀다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진료를 받고 싶어 화상 진료로 예약했고, 상담 후에 약을 처방받을 거라는 말을 했다. 본인 스스로도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이 기분이 예전보다 자주, 또 길어지는 걸 느끼고 있었고, 이 상태가 지속될수록 옆에 있는 나 또한 힘들어하는 게 보여 최대한 빨리 효과가 있는 대책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사실 남편에게 이런 상담은 처음이 아니었다. 연애 시절 남편과 미국을 찾았을 때 그가 소개했던 친구 중 한 명은, 그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였다. 남편이 한국에 가기 전 우울감 때문에 병원을 다니며 상담받았던 적이 있는데, 당시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종종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의사라고 했다. 남편이 한국 생활을 할 때는 우울감이 거의 사라졌고,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상담이나 약은 복용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근래 예전에 느꼈던 바닥을 치는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다. 딱히 엄청난 스트레스 요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순히 일을 줄이고 산책을 하고 맛있는 걸 먹는 걸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 남편은 최후의 수단으로 병원 예약을 선택했다. 종종 사람에 따라 호르몬의 영향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감정 변화가 생긴다는 얘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은 예정된 날에 화상 진료로 의사에게 상태를 알리고 항우울제 약을 받아왔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이며, 한 번 복용을 시작하면 상태가 나아졌다고 마음대로 끊어서는 안 되고 스테로이드처럼 천천히 용량을 줄여야 되는 종류의 약이다. 강력한 약의 효과 때문인지 남편은 약 복용을 시작한 후 전처럼 땅 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표정부터도 눈에 띄게 밝아지고 본래의 남편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시 효과가 센 만큼 잃는 것도 있었다.
갑자기 식욕, 성욕을 잃거나 불면증을 겪거나 몸을 긁거나 하는 등의 온갖 부작용도 함께 나타난 것이다. 다행히 한 번에 모든 부작용이 동시에 나타나지는 않고, 하나의 부작용이 나타나면 며칠 뒤에 사라지고 하는 방식이었다. 남편이 밝아지면서 다시금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괜찮아질 만하면 나타나는 부작용은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소식은 여전히 약은 먹고 있어도 얼마 전 의사가 복용 용량을 줄여 보자고 한 일이다. 최종 목표는 역시나 건강해져서 약을 완전히 끊는 게 목표다.
부모님들께는 알릴 수 없었다. 우울증은 의지의 문제라고 여기시는 분들이라, 남편이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걸 알리면 괜한 걱정과 시름만 깊어지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옆에서 온갖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을 먹고 있는 남편을 보는 건 즐겁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정도로 어두운 감정에 짓눌리던 모습이 사라진 건 천만다행이다.
언제 약을 끊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지금처럼 용량을 줄이게 된 것만으로도 남편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서로 힘든 시기를 지켜주면서 더 단단한 부부가 될지 모를 일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한 걸음 씩 가까워지는 것 같다. 진짜 부부가 되는 건 함께 하는 과정에서 좋지 만은 않은 일들을 같이 겪어내면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남편의 우울증은 우리가 부부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작은 퀘스트라고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