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봇 Dec 18. 2024

알레르기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남편은 한국에서 살 때 자주 아팠다.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 열이 펄펄 끓어 일도 못 나갈 정도였고, 소화불량과 두통은 거의 달고 살다시피 했다. 당시에는 사는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물갈이도 있고, 사 먹는 음식이 자극적이라 몸에 안 좋아 그런가 싶었는데, 본인 나라인 미국에 살고 있는 현재는 몸살을 앓는 일은 거의 줄었지만 그래도 두통과 소화불량은 멈추질 않았다. 


그러다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고 증상이 점점 늘어났다. 소화불량이 시작되면 하루 종일 용트림을 하고,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술은 안 먹었는데도 지독한 숙취를 느끼듯 피곤해하며 누워 있고,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 같다며 뭐 하나에 집중을 못 하는 이상증세까지 늘어났다. 병원을 예약하고 정밀 검사라도 받아야 하나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 남편은 뜬금없이 ‘글루텐 알레르기 증상’에 대한 글을 보여줬다. 글루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글루텐이 들어간 음식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현재 본인 증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글에 나와있는 증상이 전부 다 해당되는 건 아니었지만 80% 이상의 증상이 일치했고, 시험 삼아 글루텐을 끊어보기로 했다. 


라면, 국수, 파스타를 버리고 도넛, 식빵, 과자 같은 간식과 후식류도 전부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이렇게 누가 봐도 밀가루로 만든 음식만 끊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본격적인 건 지금부터였다. 집에서 아침으로 자주 먹던 시리얼과 곡물바에도 글루텐이 포함된 식품이 많았고, 일 끝나고 한 잔 하던 맥주도 당연히 마실 수가 없었다. 피자나 햄버거, 튀김 요리도 당연히 금지품이 되었는데, 외식하러 밖에 나가면 이 세 가지 음식밖에 볼 수 없는 미국 시골이라 외식 자체가 아주 어려워졌다. 심지어 안전하다고 생각한 소스에도 글루텐이 들어 있었다. 바비큐 소스와 샐러드 소스는 물론 간장과 고추장, 그리고 카레까지! 그저 면류와 빵류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안일하다 못해 무지한 생각이었다.

 

갑자기 남편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확 줄어들었다. 게다가 미국인답게 편식까지 하니 정말 그의 식단은 다이어트 식단보다도 더 타이트해졌다. 글루텐 때문에 못 먹는 음식이 많아지자 대신 설탕에 집착하는 것도 문제였다. 소다 음료를 박스채로 사다 두고 마시거나 글루텐이 안 들어간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더 자주 사 먹었다. 그래서 식생활에 정말 큰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모습을 보고 마냥 불평만 할 수는 없었다.

정말 글루텐 알레르기가 맞았는지, 늘 가스 찬 것 같다고 불편해하던 복통도 없어졌고 피곤함과 두통이 가시니 사람이 하루를 더 활기차게 보내는 것이다. 반대로 음식 양념을 만들 때 어쩔 수 없이 글루텐이 들어간 소스를 좀 쓰면, 적은 양인데도 바로 컨디션이 나빠진 게 눈에 보였다. 그때부터 정말 글루텐을 조금이라도 먹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대체제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미국은 온갖 알레르기 보유자와 ‘비건’부터 ‘페스코 베지테리언’ 등 섭취 음식에 따라 단계별로 나뉜 사람들과 편식자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글루텐 대체 음식을 찾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제일 흔히 구할 수 있는 게 글루텐프리 파스타였고, 조금 고급 식료품점을 가면 식빵이나 베이글도 글루텐 프리 제품을 찾을 수 있었다. 소스류는 많지는 않아도 간장 정도는 글루텐 없는 제품이 나왔고, 간식류 역시 감자 전분이나 타피오카 전분 등을 써 만든 것들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식감을 밀가루 식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먹을만한 맛이라는 것에서 그저 만들어 판매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만 아무 마트에서나 찾을 수 있는 식품들이 아니라는 것과 발견해도 일반 글루텐 제품과 비교했을 때 가격이 더 높다는 점은 감안해야 했다. 


나야 알레르기가 없으니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먹어도 상관이 없지만, 요리할 때 따로 나눠하는 것도 힘들고, 남편 앞에서 그가 침 흘리고 바라만 보는 쿠키, 케이크류를 나만 먹는 게 미안해서 덩달아 같이 밀가루 음식을 줄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식재료 하나하나 성분 다 따져가며 써야 한다는 게 조금 짜증 났는데, 생각해 보면 밀가루, 설탕, 술 등은 건강 관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끊어야 하는 식재료가 아니던가. 알고는 있었어도 밖에 한 발자국만 나가면 전부 밀가루 들어간 음식 투성인데 이 맛있는 걸 쉽게 끊어낼 자제력이 없어 손에서 놓지를 못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글루텐’때문이라고 콕 짚어서 알레르기가 생기니, 이제는 자제력이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을 위해 한 순간에 밀가루를 멀리하게 됐다. 


오히려 잘됐다 싶다. 성인이 되면 누구 하나 말리고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어 스스로의 인내심과 자제력에 맡기는 게 정말 힘들었는데, 더 나빠지기 전에 강제로 몸이 제동을 걸어준 셈이다. 좋은 음식도 아니고 나쁜 음식에 제동이 걸렸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물론 쫀득한 피자 도우와 폭신한 일반 식빵 등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릿속을 지나가는 밀가루 음식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억지로라도 채소를 입에 넣고 있는 우리를 보면 알레르기가 생긴 게 어찌 보면 천운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