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전공을 정하는 과정에 관한 얘기 같지만
사실은 등록금을 1년 더 내야 하는 건가 싶은 부모의 유치한 푸념.. 그리고 파이를 함께 못 나눈 아쉬움]
큰 아이는 언젠가 그렇게 얘기했다. "아냐 난 4년만 다닐 거야.."
2년 전 전체 학생이 무전공으로 입학해서 아무런(학점, 문이과, 횟수, 개수, 학년 등) 제한 없이 전공을 정하는 학교를 갔다. 특정 트랙 두 개만 단수 전공이 허용되고 나머지 전공은 복수전공이 의무인 데다, 2학년 올라가면서 전공을 정한 뒤에도 3학년, 4학년 언제라도 전공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가 있다. 게다가 전공을 3개 이상 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니 대부분 5년을 다니고 6년 이상 다니는 학생들도 있다. 여기에 좀 더 나아가 본인이 원한다면 학교에 개설된 전공을 자신의 방식대로 융합해서 기존에 없는 새로운 전공 설계를 하는 것도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남들 석사까지 하는 동안 학부 공부를 5,6년 이상을 하는 아이들.
(내 분야인 건축설계의 건축학은 요즘 대학 학부가 5년제가 대부분이지만.. 다른 차원의 얘기라 비교할 내용은 아니다)
나는 대학을 들어가서 학과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는 것이 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일로 여겼던 세대다. 더욱이 학력고사 세대라 10대 때의 맹목적 주입을 받아 컸고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선택하는 방식, 대학에 들어가는 방식, 전공으로 자신의 길을 설계하는 방식도 단순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지금의 이 상황들은 거의 혼돈의 수준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좋은 의미로 하는 얘기지만 한편으로는 진지함이 그 속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저 답의 질문에 해당하는 얘기는 내가 먼저 꺼냈다.
내가 지금까지 사회에서 만났던 그곳 졸업생들 얘기 들어보면 대부분 5년은 다니더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근데 그때까지만 해도 본인이 정한 전공은 생명과학부에 생명과학이고 복수 전공으로 AI융합 트랙으로 정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의 관심과 생기부도 거기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갈 길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오직 직진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1학년 때 전공 탐색 차원에서, 그리고 2학년 생명과학.AI융합 융합 전공을 하면서 코딩 관련 수업을 듣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컴퓨터 관련 관심이나 공부를 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아이는(적어도 옆에서 지켜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생전 처음 접하는 코딩 과목에서 학점을 갉아먹었던 것 같았다. 하소연 같은 얘기를 하기도 했으니, ‘아.. 역시 너는 그런 쪽 성향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2학년 1학기를 보낼 즈음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컴퓨터 전공을 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다른 것과 복수 전공이 아니라 AI.컴퓨터공학 심화전공으로.. (앞에서 말한 단수 전공이 허용되는 특정 트랙 두 개 가운데 하나가 이거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생명 공부는 전혀 아니라고..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2학년 가서도 전공 원서들을 그렇게 주문해 달라고 톡을 날리곤 하더니 대체 갑자기 왜?..
아이는 고3 때 이미 재수를 하겠다고 못을 박듯 말했었다.
근데 내가 재수를 반대했다. 일단 등록하고 다녀보고 결정하자 했다. 그리고 3월 입학 전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생각에 생전 생각도 안 한 미국 대학(가을학기 시작이니까)에 원서도 넣어보자 했다. 현역으로 할 수 있는 것 다 해보고, 등록한 학교도 다녀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했다. 어드미션을 받은 미국 대학은 약학대학에 프리-파머시 과정이었다. 주립대학 특성상 외국인에게 장학금이 인색하다는 걸 알고 지원했지만 역시 적은 장학금에 보내지 않았다. 재수를 했다면 계속 생명공학 또는 생명과학 전공으로 문을 두들기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어딘가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들어가서 1,2년 후 '아.. 생명 공부는 내게 안 맞다'는 걸 그제야 받아들이고 고민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과정과 선택은 정말 잘한 거라 생각된다.
그래서 난 최근 방학이라 집에 와있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4년 만에 졸업하는 거지? 지난번 얘기하기도 했고.. "
"아니 무슨... 내가 무슨 수로 그걸 4년 만에 졸업을 하냐고..
3학년 올라가도 거기 2학년 수업을 다 들어야 하는데?"
" ... ... ... " 그냥 듣기만 했다.
본인도 그간 과정을 돌이켜 보곤, 미국 약학 어드미션 받은 거 안 가고 국내 대학도 생명 전공으로 줄줄이 원서 쓰는 짓을 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거라고 했다. 생명, 약학, 의학 그 모든 것 하라고 그저 줘도 못할 것 같다고 했으니 자신의 진로 탐색은 비교적 짧은 기간 잘한 것 같다.
근데 말이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지 않은가. 내가 자기 선배들 대부분 5년이더라 했음에도 본인은 4년만 다닌다고 장담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번 학기에는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오던 등록금 동결도 풀려서 고지서를 받아보니 맨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더라.
그러면서 대학원은 안 간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얘긴 학부를 대학원 다니듯 다니겠다는 얘기 같기도 하고.. 낚이는 기분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참 혼돈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30년 전 내가 고민하던 양과 속도와는 차이가 너무 나니 그것만으로도 그렇고, 다양성이 열려 있고 확대되어 가는 것도 그렇다. 환경이 그렇게 주어지고 주워 담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컴퓨터를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할 것 같던 아이가 1,2년 여러 과정을 겪곤 '나 이거 할래!'라며 오랫동안 해오던 것을 버려버리는 것도 신기했다.
3월이다.
오늘 아침 아이가 지하철 역까지 태워달라 해서 태워주고 왔다. 며칠 전 큰 박스 몇 개를 다시 학교 기숙사로 보냈다. 그럼에도 몸집만 한 큰 캐리어를 트렁크에서 내려주니 그걸 끌고 사라졌다.
사과파이를 좋아하지만 아이도 언젠가 사과파이를 좋아한다는 얘길 했었다. 그게 문득 생각나 어제저녁 퇴근하면서 롯데 분당점 지하에 들러 예전에 봐뒀던 파이를 사가지고 갔다. 아이가 학교로 돌아가는 하루 전날이고, 또 금요일이고, 그리고 한 달의 마지막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간단한 디저트 파이를 사가면 좋겠다 생각했다. 뜻밖에도 누구의 관심도 손도 안 타고 있던 파이. 사실 사과파이가 아니었다. 다 팔려서 사과파이는 없었고 같은 모양의 호박파이다.
그걸 알아챘는지도.. 사분의 일 듬뿍 잘라낸 건 내가 먹었다.
파이를 함께 못 나눈 아쉬움에 긁적이기 시작한 글치곤.. TMI
다시 따뜻해지고 여름 앞에 집에 오면 그땐 꼭 사과파이를 준비해 놓을 테니 함께 먹자라고 혼자 약속했다.
어쨌든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고맙다는 말도
https://youtu.be/VgcOGGyPcI4?si=Xixzf4ynTHMO3I3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