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의 맥락에서
(이 글은 김근 시인님의 해석을 먼저 보고 나서 쓰게 된 것을 미리 밝힙니다.)
https://youtu.be/ZmoAhNa7rRM?si=o4WgEHT_szJyvBDs
큰 맥락에서, "시퍼런 봄"(이하 "이 곡")이 포함되어 있는 앨범, "이상기후"라는 의미부터 예비하자. 기후라는 것은 곧 공기다. 인간 주변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존재하는 그것에 대한 은유이며,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라캉은 이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대타자;아버지의 이름;아버지의-아니오(Autre;Nom-du-père;non-du-père)라 칭하며, 더 와닿는 설명으로는 "(상징계의)신" 그 자체가 되겠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을 행동하게 하고 인식하게 하는 모든 인간 존재의 기본조건이자 가능조건인 그것이 이상하게 비틀어졌다는 뜻("이상기후")이다.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이것을 "긍정성"의 과잉이라 진단한다. 그는 근대, 즉 푸코적 감시사회에서 금기와 규칙(~해서는 안된다, ~해야 한다.)에 얽매여 살아가는 주체들과 대비시켜, 현대(후기근대)의 주체들은 긍정성과 모티베이션, 탈규제(~할 수 있음, ~하지 않을 수 있음)의 열린 형식에 갇혀 탈진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의 예시는 간명하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에서 감옥, 병원, 감시탑을 근대에 결부시켜 설명했다면, 한병철 교수는 현대를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쇼핑몰, 은행, 공항에 결부시킨다. 그가 현대 사회의 대표적 질병, 우울증을 설명하는 문장을 보라.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
Nicht-Mehr-Können-Können
Can-Not-More-Can
이 곡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기후의 이미지는 김근 시인이 설명하는 대로(02:55) 불타는 듯한 극한의 더위, 작열하는 태양, 열사의 사막의 이미지다.(태양에 댄 적도 없이 반쯤 타다가 말았네, 지글지글 끓는 땅, 이글이글 타는 땅) 시인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는 그것, "꿈"에 대해서 한병철 교수는 하이데거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Dasein가 미래를 계획하고 목표하는 행위에 대해, 이를 기획투사Entwurf라 정의한다. 한병철 교수는 이 용어의 영문 번역인 Project를 다시 독일어로 역수입한 Projekt를 언어유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Projekt가 된다. 하지만 주체(예속)에서 프로젝트로의 전환으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중략)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Projekt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Projektil임이 드러난다.
이 곡에서 지속적으로 말하는 "길", "봄", "몸부림"의 이미지는 동일하다. 바로 지속성이다.(우리는 끝이 없는 기나긴 하나의 계절,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 멈추지 말고 몸부림치며 기어가) 이 지속성이라는 이미지를 해석하기 위한 실마리는, 시인은 영화와 "쏟아지는 파란 하늘"에서(05:30) 떠올렸으나, 나는 알베르 카뮈와 "시든 꿈을 뜯어먹지 말 것", 그리고 "오늘 하루를 살아남을 것"을 종용하는 노랫말에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이라는 장미꽃을 뜯어먹고 살아야 한다면 단념하고 거짓에 몸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정신은 차라리 "절망"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답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 단호한 정신은 언제나 이를 잘 감당해 낼 것이다.
이 곡은 정확하게 꿈이라는 환상이 이미 시들었다는 사실을 예비하고, 그것을 뜯어먹는 것을 거부한다. 즉, 카뮈의 말대로 절망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쨌거나 달아나지 않고 오늘 하루를 살아남는 것"; 이것이 바로 부조리의 정신이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Je me révolte, donc nous sommes.)
카뮈는 그의 책에서 이 부조리의 정신의 "이미지"를 신벌을 받아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움 없이,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반복하는 시지프에 빗대어 이렇게 설명한다.
이처럼 어떤 날들에는 시지프가 고통스러워하며 산을 내려오지만 그는 또한 기쁨 속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 이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는 또한 그의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는 시지프를 상상해 본다. 그것은 고통으로 시작되었다. (중략)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중략)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인간을 능가하는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그가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중략)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것은, 시퍼런 봄의 주체, 길을 헤매이는 주체, 몸부림 치는 주체, 즉 "살아남아야 하는" 주체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이다. 카뮈가 그의 책 『반항하는 인간』에서 밝힌 것과 같이 "참된 삶이란 경계선을 무시하는 허무주의와 냉소들 사이에서 절도를 지키고자 하는 가슴 찢는 고통"이며, 이 "경계선"이 있기 위해 다시 "개인주의"가 생겨나고, "개인주의"가 생겨났기에 그것의 전제인 "사회"와 "규율"이 필요해진다. 결코 나 혼자서 지고 갈 수 있는 짐이 아닌 것이다.
이 곡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로 결론지어진다. "시퍼런 봄"으로 대표되는 잔혹한 이상 기후의 생존 조건과, "새빨간 피"로 대표되는 살아남고자 하는 정신이다. 피는 실재 그 자체이며, 그 어떤 언어적 설명으로도 다 할 수 없는 인간의 생존적 이미지의 극단적 체화이다. 작사자인 보컬 윤성현은 말하는 것이다. 주변이 아무리 가혹하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게 너가 "그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고. 일단 살아남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