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시지프 신화를 읽어야 할 이유

죽을 때까지 실패하기만 하는 인생일지라도 살아가야 하는 것

by K Camus

1. 내가 시지프 신화를 욕망désir하는 이유

- 그리고, 당신도 욕망désir하게 될 이유


모브닝 - DEADLINE 中


시지프 신화는, 솔직히 정말 어렵게 쓰인 책입니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모호하게 그려지는 이미지들과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관념들만 가득한 책이지요. 한번 읽고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읽었을 때 바로 제 눈에 들어와 심장에 박히는 유리조각 같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Il n'y a qu'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 : c'est le suicide.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주1)
제사(題詞), 시지프 신화


이게 왜 제 심장에 틀어박혔냐면, 그때 저는 정말로 심각한 우울증의 늪에 빠져 있었거든요. 폐쇄병동을 두 번이나 끌려갔다 나오고, 두 번째에는 "당신은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케이스다"라는 말까지 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두어 달을 병가 내놓고, 몇 날 며칠을 아무것도 안 하고 천장만 보고 있다가 "도대체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뭔가?"에 대해서 고민하다 읽기 시작한 책이 이 책이었습니다. 그래서였어요.


여하튼, 이런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문장을 하나 보자마자, 미친 듯이 읽었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땐 아무리 읽어도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뒤에 있는 교수님의 해설을 읽어 보아도 그랬지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그런 독서의 미궁 속에서도 어렴풋하게 이해되고 손에 잡히는 이미지들이 있었어요. 까뮈가 그려내는 정신이 골병이 들고 마음에 벌레가 깃드는 순간, 권태와 부조리L'absurde의 순간들이 그러했습니다. 굉장히 길어지겠지만, 최대한 절제해서 인용해 볼게요.


자살과 같은 행위는 마치 어떤 위대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침묵 속에서 준비된다. 당사자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어느 날 밤, 그가 문득 방아쇠를 당기거나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정신적 침식으로 골병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 벌레는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박혀 있다. 바로 거기서 벌레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부조리의 추론 - 부조리와 자살 中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권태는 의식을 깨워 일으키며 그에 뒤따르는 과정을 야기한다. 뒤따르는 과정이란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의 연쇄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정적인 각성일 수도 있다. 각성 끝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과가 생기는데 그것은 자살일 수도 있고 원상복귀일 수도 있다. (…) 그는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로 미루어 보아 거기에 최악의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내일,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그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낯섦이다. 즉, 세계가 ‘두껍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 습관에 의해 가려 있던 무대 장치들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부조리의 추론 - 부조리의 벽 中

이 부분들은, 까뮈의 시지프 신화 맨 앞 챕터인 "부조리의 추론"에서도 가장 앞의 두 파트인 부조리와 자살, 그리고 부조리의 벽에서 서술되는 "정신이 침식되는 순간", "부조리의 순간"입니다. 철학 에세이 치고는 꽤 감성적으로 말하죠? 저도 그래서 어...? 하고 홀려버렸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을 겪습니다. 매일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씻고, 유튜브 좀 보다 잠들고, 다시 일어나서 씻고, 출근하고... 그렇게 매일, 매주, 매달 쳇바퀴를 돌다가,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게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들이 맞는가?"


물론, 사람의 회복력은 강합니다. 까뮈가 말한 것처럼, 대부분 "원상복귀"합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어떤 계기로든 마음의 침묵이 시작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까뮈가 말한 낯선 세계, 부조리의 순간을 겪게 되지요.


까뮈의 언어는 꽤 이해하기 힘들죠? 제 언어로 설명하면, 극심한 우울증을 겪던 저는 점점 "모든 게 다 어찌 되든 상관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가족이든, 집이든, 차든 회사든 뭐든 간에 아무튼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상태로 변하게 됐죠.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분명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있는데 정작 아무것도 보고, 또 듣고 있는 것이 없다는 자각이 생겼습니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지는 순간… 그것이 까뮈가 말하는 "무대장치가 붕괴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볼까요. 우리는 길을 가면서 가로등에 어떤 벽보가 붙어 있었는지, 바닥 타일 줄눈이 무슨 색이었는지, 길 건너편 안경점에서 흘러나오던 희미한 노래의 제목이 뭐였는지… 분명 보고 들었지만,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여러분의 감각기관의 자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보고 듣긴 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감각기관의 자극이 여러분들의 의식 속이라는 정신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 내에서는, 너무 사소한 것들이었기에 아무런 의미를 지향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 겁니다. 그러니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확실히 보고 듣습니다.


그리고 제 경우에는... 더 이상 내겐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마음속에서 깊이 느끼고 있었기에 그랬는지, 말 그대로 무엇을 보고 듣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는 자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 매일을 그렇게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침대 위에서 부유하다 저 부분을 읽으니까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더군요.


그래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욕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이해해서. 머리는 진짜 하나도 이해 못 하겠다, 토 나오게 재미없다고 욕하는데. 가슴이 시켜서 한 문장씩 뜯어보고, 무슨 학자 이름 나오면 구글 검색도 해가면서 공부도 좀 해보고...


그리고 제가 이 글을 쓴 계기는… 먼저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할게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Jacques Lacan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désir"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Le désir de l'homme, c'est le désir de l'Autre.
인간의 욕망은 타자(他者)의 욕망이다.


즉, 인간의 욕망désir이란 "남이 욕망désir하는 것을 따라 욕망désir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예컨대, 친구가 좋다고 하는 걸 나도 따라 하고 싶어지는 그런 게 욕망이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시지프 신화를 욕망désir하는 이유를 이렇게 최대한 진솔하게 말하면,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 혹여나 어떤 분은, 또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은 저의 욕망désir을 욕망désir하게 되지 않을까 주2) 하는 생각을 하여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쯤 하면 얼추 글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한 설명은 끝난 것 같네요. 제가 생각하기에,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들, 더 이상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느끼게 된 사람들. 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들까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 바로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입니다. 안타깝게도, 시지프 신화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생의 감각"을 되찾아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죽을 것 같은 부조리의 순간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직면하며 살아가라고 말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입니다. 그저 반항하고 또 반항하는 것, 매일같이 실패하고 지옥 같은 일상이 반복될지라도 부조리하게 반항하는 인간의 초상이란 무엇인지... 까뮈의 이미지가 알려주기에.




2. 실존實存Existent-ial주의主義-ism

-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 장폴 사르트르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1813 - 1855), 최초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그리고 또, 실존-주의主義주3)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실존주의는 19세기 중후반-20세기 중후반까지 유행하던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입니다. 그 방법론이 가리키던 방향을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대체로 이 쪽이었지요.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인간은 왜,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픈 주제지요? 그래서 이것이 실존-주의Existent-ial-ism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각 학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답을 내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즉, 최소한의 학문적 체계조차 갖출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애초에 사람, 아니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대상"의 정의, "탐구 방법", "결론"까지 일관된 체계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 이 주제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실존-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학문적, 과학적Science 체계를 갖춘 실존학, 존재학Existent-ion-ology 같은 명명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 문명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점점 소외되고, 인간성을 상실하고 살아갈 이유를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분야입니다. 물론 그 내용들은 골치 아프고, 결론도 학자마다 제 멋대로이지요.


어떤 사람은 신 앞에서Coram deo 홀로 단독자로서,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것이 실존적 인간의 목표(쇠렌 키르케고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다 (프리드리히 니체), 누구는 나의 과거도 선택, 현재도 선택, 미래에의 책임까지 짊어지는 것이 곧 실존하는 자의 윤리다 (장폴 사르트르)… 하나하나 뜯어보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배다른 형제처럼 다른 학자들의 집합이 바로 "실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재밌어요. 골라잡는 맛이 있습니다. 많이 읽어들 보시고, 그중에 제일 입맛 맞는 사람 하나 딱 골라잡던지, 영 맘에 드는 사람 없다 싶으시면 내 길은 내가 간다! 하고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만들어서 가시면 됩니다. 어차피 실존주의? 그거 제가 보기에는 그냥 다 개똥철학이에요. 그러니까 학문 취급도 못 받았지.




3. 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Albert Camus (1913 - 1960)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책,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의 작가는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입니다. 통칭 부조리L'absurde 문학가, (자신은 부정했지만) 실존주의 철학자로 유명했으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작품들로 이방인L'Étranger, 페스트La peste, 결혼·여름Noces suivi de L'été 등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세계 전반의 인식에 대한 "무의미함"이라는 기조, 매우 건조한 묘사, 극히 절제된 감정 서술 등, "서술하지 않는 것을 통해" 말하는 방식, 그리고 까뮈의 철학을 부조리주의Absurdism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알베르 까뮈의 철학 에세이가 바로 시지프 신화입니다.


그가 시지프 신화나 반항하는 인간에서 보여주는 깊고 풍부한 실존주의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풀어내는 자신만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면, 그를 굳이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까뮈? 소설가 아니야?"라고 인식하지만, 사실 제가 생각하기엔 까뮈는 근본적으로 철학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단지 그의 철학이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죠.


까뮈 역시 실존주의라는 흐름 속에 있는 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까뮈는 그 안에서도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실존주의를 표방하는 철학자들이 각자 자신만의 특별한 주장들을 펼치긴 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까뮈는 결이 상당히 어긋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4. 까뮈의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

- 까뮈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 - 그의 철학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까뮈의 "기존 실존주의와의 어긋남"은 그의 철학, 즉 "부조리한 인간"의 삶의 방식에 있습니다. 세 단어로 정리하여 "반항, 자유, 열정"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삶의 태도를 설명하며, 기존 "실존적 태도"를 이른바 "철학적 자살"이라고 비판했지요.



반항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이라는 장미꽃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한다면 단념하고 거짓에 몸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정신은 차라리 "절망"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답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부조리의 추론 - 철학적 자살 中

삶의 의미가 없더라도, 신의 구원, 스스로의 초월 따위에 기대며 이성의 자살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진짜 자살하는 것 역시 언어도단입니다. 그 둘은 모두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해소 행위입니다. 그저 매일을 명철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무의미한 세계와 직면하며 부조리와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까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의 초상입니다.

자유

희망 없는 인간, 희망 없음을 의식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미래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조리의 추론 - 철학적 자살 中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인간은, 미래란 본질적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사실을 알기에 진정으로 자유롭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우리는 살아가며 미래에 무엇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곤 합니다. 20년 뒤에 집을 사기 위해 20년 동안 현재를 희생해 가며 단칸방에 살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적금을 그러모으는 행위가 구체적인 예시가 되겠군요. 그러나, 부조리한 인간의 초상은 그런 행위의 무의미함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미래, 미래란 죽음으로 향하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열정

그때 나는,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것이 천한 일인지 구역질 나는 일인지 혹은 우아한 것인지 유감스러운 것인지를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부조리의 추론 - 부조리의 자유 中

여기서 끝났으면, 까뮈는 그냥 그저 그런 허무주의자 중 하나로 지나갔을 겁니다. 그의 철학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열정이라는 키워드입니다. 미래 따윈 없다, 모든 세계는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다.. 부조리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까뮈의 고찰의 결론은 "양의 철학"입니다. 모든 의미라는 것이 무용(無用) 한 것인 마당에, 결국 가장 잘 사는 것은 "많이 사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결국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만 남는 것이지요; 행동에 선악은 없고 결과만 있을 뿐이며, 부조리한 인간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결과를 남김없이 만끽합니다.


이상이 까뮈가 생각하는 부조리한 인간의 삶의 세 가지 귀결입니다. 귀결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그것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계의 부조리 L'absurde 함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구원을 청하지도, 또는 자신의 이성을 포기하고 도피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도 않는 인간은 당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고찰이지요.


이것이 그가 여타 실존주의를 표방하는 철학자들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그에게 삶은 언제까지고 버텨내야만 하는 형벌이며, 그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거나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지요.


5.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 이것이 신화Mythe인 이유


코린토스의 군주 시시포스(Σίσυφος), 아이올로스(Αἴολος)의 아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분명 인간이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논하는 에세이인데, 그 제목은 시지프 <신화Myth>라는 점입니다. 물론 그 자체로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것이기에 그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시지프 그 자신은 인간이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신의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비슷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트로이 전쟁은 실제 있었던 일로 추측되지만, 그 내용은 또 일리아스랑 엮여서 신화랑 짬뽕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리아스에서 확실하게 신과 연관이 없는 순수 인간인 헥토르를 모티프로 "헥토르 신화"를 쓰면 좀 웃기잖아요?


까뮈가 그렇게 제목을 쓴 이유는 말이지요… 한번 직접 읽어보시고 깊게 생각해 보세요! 제가 대신 다 설명하고 풀어드리는 것은, 그것 역시 다른 의미의 폭력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께 충분히 사유할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6. 結: 맺으며.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지프 신화>는요, 어차피 죽을 인생, 삶의 의미 따위는 없다고 말합니다. 근데 그냥 살라고 말합니다. 지독하게 실패만 겪더라도, 인생이 끔찍한 비극으로 점철되더라도 그냥 살아가라고 말하는 책입니다. 심지어 까뮈는 딱히 생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생은, 단지 경멸로 응수하여 견뎌내야 할 운명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까뮈조차도 말로 다 설명하진 못합니다. 다만 이미지로 묘사할 수 있을 뿐이지요.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종장(終章), 시지프 신화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합니다.

그것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의 전부입니다.




주석

1) 사실 이건,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문장 중 하나지만 굉장히 많이 오독되는 문장입니다. 오독을 막기 위해 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맥락들을 보면...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그리고 만약 니체가 주장했듯이, 철학자가 존경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고, 그 대답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 여기서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냥 살면 되는 거고,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대답한다면... 스스로 죽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르기 때문에, "자살이 가장 진지한 철학적 문제"라는 것이 까뮈의 문제 제기인 것입니다. 그냥 보이는 대로 "자살은 중요한 철학적 문제다."라는 식으로 오독될까 봐 일부러 더 적었습니다.


2) TMI로 라깡의 정의에서, 제 욕망désir 역시 남의 욕망désir이긴 합니다. 그리고 사실, 라깡에 의하면 욕망의 대상 역시 기표signifiant의 연쇄로 지연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욕망의 대상을 알 수 없고 절대 충족할 수도 없죠 :P. 사실은 제가 소개하는 이 시지프 신화도 대상a(objet petit a) 일뿐입니다.


3) 주의(主義)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主義) 2
1. 굳게 지키는 주장이나 방침.
2.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

통상적으로 1의 의미는 개인적인 주장의 의미가 강하다고 합니다(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 따라서 여러 사람이 학문적으로 탐구하고 말한 경우에, 이것은 2의 의미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ism을 이제 Oxford Dictionary of English에서 찾아보면 의미는 꽤 달라집니다.

-ism (suffix)
1. (Informal mainly derogatory)
a distinctive practice, system, or philosphy, typically a political ideology or an artistic movement
(일반적으로는 정치 이념 또는 예술적 유행을 가리킴) 구분 가능한 관행, 체계, 또는 철학

희한하지요? 분명히 -ism을 직역한 게 주의(主義)인 데 이 두 접미사suffix가 가리키는 의미가 미묘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主義)라고 하니 "어, 그거 무슨 이데올로기 비슷한 거 아니야?" 하는 오해가 발생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