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가이 톰슨(Michael Guy Thompson)의『실존적 정신 분석 : 현대적 입문 Existential Psychoanalysis: A Contemporary Introduction』(Routledge, 2025)의 서문과 1장을 번역하여 올린다.
마이클 가이 톰슨(Michael Guy Thompson)에 대해서는 그의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약력으로 대신한다.
그는 1947년 출생으로 14세까지 쿠바 아바나에서 성장했으며, 이후 가족과 함께 테네시 주로 되돌아와 베일러 스쿨(Baylor School for Boys)에 다녔다. 이후 미 육군 보안국(U.S. Army Security Agency)에 입대하여 베트남에서 복무했으며, 워싱턴 D.C.에서 복무를 마쳤다.
1973년 그는 R. D. 랭과 함께 일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주했으며, 이 시기에 정신분석가로서의 훈련도 병행했다.
1980년 샌프란시스코로 되돌아온 후, 현상학과 정신분석의 통합을 목적으로 한 정신분석 모임인 Free Association, Inc.를 설립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북캘리포니아 정신분석 연구소(PINC)에 합류하여, 현재 개인 분석가, 수퍼바이징 애널리스트(Supervising Analyst)로 활동하고 있다.
1988년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한 New School for Existential Psychoanalysis를 설립했으며, 현재는 이 연구소에서 온라인으로 실존적 정신분석 훈련 과정 및 커리큘럼을 제공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는 국제 정신분석 교육 연맹(IFPE)과 북캘리포니아 정신분석 심리학회(NCSPP)의 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Psychoanalytic Psychology, Journal of Phenomenological Psychology, Journal of European Psychoanalysis, The Journal of the Society for Existential Analysis 등 다수의 전문 학술지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그의 약력은 무미건조한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가 실존적 정신분석에 입문하고 이를 주창하며 실행하기까지의 근본적 동인은 감춰져 있다. 그는 『실존적 정신 분석 : 현대적 입문』서문과 1장을 통하여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를 담아내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다양한 실존주의 경향과 모호한 정신분석 운동에서도 그 핵심은 '실존적 위기의 경험'과 '실존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저자에게 적용하여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저자의 실존적 위기는 청소년기의 상실 경험이다. 그가 열 네살때까지 유년과 소년시절에 담겨있는 헤밍웨이적인 낭만적 공간(쿠바의 아바나)을 떠나, 미국으로 정착한 이후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자살로 연이어지는 극한의 단절과 상실은 그를 실존적 위기로 내몰았다. 사회는 쿠바 미사일 위기와 인종 갈등으로 치달았고 그는 자신과 세계의 붕괴를 앞서 경험하고, 실존적 감수성으로 일컬어지는 '근원적 불안'과 '고독'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모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선택한 곳은 바로 '어둠의 심연(조셉 콘래드)' 그 자체인 전쟁중인 베트남이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죽음을 준비하기 위하여 도착한 실존적 장소에서 니체, 카뮈, 카프카, 하이데거를 처음 접한다. 실존적 위기와 공간 그리고 실존주의가 만나는 지점인 동시에, '자기'로의 귀환 혹은 발견을 위한 도정인 셈이다. 군복무를 마친 그는 LSD, 요가와 불교, 명상, 비트 세대의 작가와 시인들, 사이키델릭한 하드록 이 공존하는 히피 시대를 통과하면서, 실존주의와 정신분석을 향해 더듬어 나간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두 번의 실존적 만남을 경험하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낭만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내가 랭(R. D. Laing)을 발견한 것은 [군복무를 마친 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이후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마린 카운티의 Muir Beach를 걷던 중, 나는 철학과 사르트르에 대한 나의 관심을 주제로 한 흥미로운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젊은 남자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배낭에서 『분열된 자기 The Divided Self』의 페이퍼백 한 권을 꺼내 내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요. 아마 마음에 들 겁니다.”
나는 이후 그 ‘러브 차일드love child’를 다시는 보지 못했지만, 이러한 종류의 관대함은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 후 2년 동안 나는 랭이 출판한 모든 저작을 읽었고,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밀도 높은 사유를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방식과 그 사유 자체에 집착하게 되었다.
1972년 가을, 랭은 전국 강연 순회 중 “광기의 철학자The Philosopher of Madness”라는 표제를 달고 버클리(Berkeley)를 방문했다.
그를 직접 보고, 강연이 끝난 뒤 그와 대면한 경험은, 대학원 과정을 떠나 1973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그와 함께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격려가 되었다.
1980년대 그가 본격적으로 실존적 정신분석을 실천하고자 했을 때, 이미 정신분석이 아닌 방식으로 실존주의를 심리치료와 통합하려 했던 경향들이 혼재해 있었다. 이 시기 유럽 특히 런던에서는 에미 반 두르젠, 에르네스토 스피넬리가 관련 학과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스위스에서는 메다드 보스의 영향하에 현존재 연구소(Daseinsanalytic Institute)가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 연구소의 활동, 무엇보다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롤로 메이의 제자인 커크 슈나이더가 Existential-Humanistic Institute를 설립하였고, 롤로 메이의 또 다른 제자인 어빈 얄롬이 실존적 심리치료에 관한 저작들을 집필해 큰 반향을 일으키며 명성을 얻고 있었다.(국내에서도 어빈 얄롬의 번역된 저작은 20권에 이른다.)
바야흐로 실존적 심리치료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비판적 지지의 관점에 서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서문과 1장을 읽어보면 느껴질 것이다. 이 저작에서는 수많은 실존주의 작가, 철학자, 사상가, 정신분학자들의 저작과 이름이 등장한다. 이를 견뎌내고 읽다보면 저자가 왜 이토록 치열하게 실존적 정신분석의 깃발을 흔들고자 하는가가 이해 될 것이다.
어쩌면 나도 저자가 말한대로 '실존적 위기의 경험' 속에서 소위 '실존적 감수성'을 근본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말이다. 실존적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자가 있던가? 인간이라면 죽음앞에 내던져진 존재 아니던가? 누구나 그 근원적 불안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가지 않는가? 때로는 상실과 단절로 고뇌하면서 말이다. 어떤 이는 짐짓 모른채 서성이며 살아가거나, 다른이는 종교적 실천을 하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길 것이다. 실존적 정신분석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인간 조건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실존적 고민속에서 저자가 흔드는 깃발 아래로 한 발자국 나가본다.
최근에 자주 번역물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회가 생겨 1월부터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학교의 연구소에서 상담 및 심리치료와 관련한 번역물에 대한 교정 작업을 하면서 출간을 돕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번역 작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롤로 메이와 커크 슈나이더의 저작들이 국내 독자를 만날 것 같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에 저도 일정 정도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뿌듯하기도 합니다.
<실존, 심리 그리고 영성>의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중입니다.
오늘도 방문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서문>
실존적 정신분석은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의 통합이다. 내가 아는 한, 지금 이 책이 제시되기 전까지 이 두 학문을 실제로 통합한 비평 작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독일과 프랑스의 소수의 정신과 의사들—그 중심에는 루드비히 빈스방거와 메다드 보스가 있었다—이 프로이트와 하이데거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은 정신분석의 핵심 원리인 무의식과 전이 현상의 개념을 기각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을 단지 “교정”하려는 데 그쳤다. 즉, 그들은 하이데거와 프로이트의 본격적인 통합을 시도하기보다는, 프로이트의 개념들을 사실상 제거함으로써 이를 재구성하려 했다.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의 통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협소한 실존철학 이해를 넘어서는 보다 폭넓은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 책에서 보게 되겠지만, 나는 니체와 사르트르를 하이데거와 더불어 이 책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또한 전이 현상과 무의식의 개념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유지되되 재정식화되어야 한다. 무의식과 전이에 대한 개념 없이는, 실존적 정신분석을 정식으로 구성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루드비히 빈스방거와 메다드 보스—프로이트와 융 모두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들—는 자신들의 임상 이론을 ‘실존적 정신분석existential psychoanalysis’이라 명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빈스방거는 자신의 접근을 실존분석(existential analysis)이라 불렀고, 반면 보스는 현존재분석(daseinsanalysis)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이는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개념, 즉 자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철저히 하이데거적인 개념에 대한 분명한 경의의 표시였다. 요컨대,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이라는 두 학문이 통합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적어도 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랭은 1960년대에 출간된 일련의 저작들—『분열된 자기』(1960/1969), 『Self and Others』(1961/1969), 『Sanity, Madness and the Family』(1964/1970, Aaron Esterson과 공저), 『The Politics of Experience』(1967) 등—을 통해 1960~70년대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스코틀랜드의 정신분석가였다. 나는 청소년기 이래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모두에 깊은 관심을 품고 있었기에, 이 두 전통을 통합하고자 하는 구상을 이른 시기부터 품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임상심리학을 공부하던 대학원생 시절, 우연히 『분열된 자기』를 접하며 랭의 작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서야, 랭이 이미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의 통합을 성취했음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대학원 과정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건너가 랭과 함께 작업했으며, Philadelphia Association에서 랭과 그의 동료들로부터 실존적 정신분석에 대한 수련을 받았다.
그러나 랭은 실제로 자신을 실존적 정신분석가라고 명명하는 데에는 주저했다. 그는 자신을 단지 정신분석가로 지칭하는 편을 선호했다. 그 이유는 1970년대에 이르러, 랭이 보기에 ‘실존적’이라는 용어가 식별 가능한 정의를 유지하기에는 지나치게 포괄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실존적’이라는 용어를 대신하여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선택했다.
나는 이러한 결정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반세기 전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타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영국에서는—역설적이게도 랭의 영향으로 인해—수많은 실존적 ‘치료’ 수련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는데, 이들 프로그램은 예외 없이 정신분석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2024년이다. 오늘날—적어도 미국적 맥락에서 보자면—‘실존적’이라는 용어는 다시금 일정한 공명과 신비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누구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제1장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자 했다.
사실상 실존적 정신분석에는 그 토대가 되는 단일한 이론도, 식별 가능한 기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이트 학파, 클라인 학파, 위니콧 학파, 비온 학파, 라캉 학파, 코헛 학파 등 모든 정신분석 학파들은 고유한 이론과 기법을 통해 서로 구분된다. 반면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의 통합은 보편적으로 합의된 이론이나 기법을 갖지 않는다. 실존적 정신분석에는 기법이 없다. 바로 이 점이 그것을 실존적으로 만든다.
실존적 정신분석은 타인과의 임상 실천에서 일정한 기법을 적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친밀하며, 비형식적이다. 카우치의 사용 여부, 세션의 빈도, 분석가와 환자 사이의 대화를 제한하는 규칙들—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절대적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할 것인지는 각 실천가가 스스로 형성해야 할 문제다.
마찬가지로, 이론은 모든 분석가의 교육 과정과 저술 작업에서 필연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고려는 실존적 정신분석가마다 불가피하게 상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저작 전반에 걸쳐, 내가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을 어떤 방식으로 통합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애초에 왜 치료를 찾게 되는가? 대체로 인간관계나 직업에서의 개인적 위기를 겪거나, 만성적인 불안이나 우울에 시달리거나,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해 단순히 불행하거나 고통스럽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야기할 대상을 찾게 된다. 많은 이들에게는,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듯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는 행위 자체가 일정한 위안을 제공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형성되기도 한다. 위기가 완화되면, 그들은 흔히 치료를 중단한다. 자신이 필요로 했던 것을 이미 얻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보다 야심적이거나, 혹은 절박하거나, 또는 보다 성찰적인 태도를 지닌다. 이들은 치료 과정 속에서,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의 뿌리가 훨씬 더 깊고 만성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경우, 단기적 문제 해결 중심의 치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고통의 근원까지 도달하기 위해 보다 심층적인 치료, 즉 정신분석이 요구된다. 그 궁극적 목적은 고통의 바닥에 닿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에 대한 보다 깊은 신뢰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증상 완화가 아니다. 그들은 더 살아 있다고 느끼고, 위험을 지나치게 회피하지 않으며, 덜 판단적이고, 더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자신이 신뢰할 수 있고, 깊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분석가를 찾는 과정 또한 필수적이다. 내 견해로는, 이러한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는 심리치료의 형태는 실존적 정신분석 외에는 없다.
이후의 장들에서 독자는 내가 임상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임상 사례 비네트(clinical vignettes)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즉, 실존적 정신분석가가 다른 정신분석가나 실존치료사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기 위해, 세션의 과정을 축어적으로 기록한 임상 예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특정한 기법을 채택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시할 기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제4장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될 것이다. 그 장에서 나는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실존적 정신분석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인격적 차원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제1장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는 이 책 전반에서 ‘실존적’이라는 용어를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는지를 먼저 규정하고, 나의 이해에 따라 정신분석과 실존적 정신분석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실존적 정신분석과 비(非)정신역동적 치료들 사이의 차이 또한 명확히 하고자 한다. 다만 이러한 구분들은 단일 장에서 완결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책 전체를 읽어야만 내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차이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사르트르와 정신분석」에서는 실존철학자 사르트르가 정신분석에 대한 실존적 접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 수행한 핵심적 역할을 검토한다.
제3장 「진정성의 변주」에서는 실존적 정신분석을 다른 정신분석 학파들과 구별 짓는 핵심 개념을 다룬다. 동시에, 명시적으로 실존주의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정신분석가들—예컨대 프로이트, 위니콧, 비온,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 속에서도 진정성이 어떻게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제4장 「정신분석에서 인격의 소멸」에서는, 지배적인 정신분석 이론들이 무의식과 전이 현상을 개념화하는 방식이 어떻게 분석가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인격적 차원 자체를 삭제해 왔는지, 그리고 실존적 정신분석이 이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교정하는지를 논증하고자 한다.
이 짧은 서문을 끝으로, 나는 독자인 당신에게 이 책을 맡긴다. 내가 아는 한, 이 책은 실존적 정신분석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개론서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부디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그 수고는 충분히 보상받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1장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실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 용어는 임상 실천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가? 더 나아가, 이 개념을 호출함으로써 우리는 치료 과정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무엇으로 전달하려는 것인가?
정신분석에는 그것을 창시한 인물, 즉 프로이트가 존재한다. 반면, 실존주의는 하나의 철학 학파로서든, 혹은 단순한 개념으로서든, 누군가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귀속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철학은 실존치료(existential therapy), 실존분석(existential analysis), 현존재분석(daseinanalysis), 실존적 정신분석(existential psychoanalysis)등 실존적이라 명명되는 다양한 치료 접근들의 토대를 이룬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러한 명칭들 어느 것에도 그다지 만족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를 창시한 단일 철학자가 존재하지 않듯이, 실존치료를 창시한 단일 인물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은 실존적 관점에서 치료를 수행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띠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일을 극히 난해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실존철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실존치료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일반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에 의해 창시되었고, 그의 생애 상당 기간 동안 그는 정신분석이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규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예컨대 융, 아들러, 오토 랑크—는 인간 조건의 핵심을 성적 충동에 두는 프로이트의 강조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와 결별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정의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곧바로 그가 규정한 정신분석 원리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사후, 상황은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 오늘날 정신분석이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자신을 정신분석가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해석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창시했고, 무의식과 전이를 포함한 모든 근본 개념들을 제시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날의 분석가들 역시 자신의 입장을 프로이트의 맥락 안에 위치 지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 다시 말해, 그들은 프로이트와 어디에서 동의하고 어디에서 이견을 갖는지를 명확히 진술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정신분석이라 부르는 것이 상당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적어도 무의식과 전이가 설명의 핵심으로 유지되는 한—프로이트의 저작들은 여전히 이후의 모든 이론들이 파생되는 기초 텍스트로 기능한다. 비록 오늘날에는 프로이트를 직접 읽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어떤 실천가가 어떠한 방식으로 정신분석을 정의하든 간에, 정신분석적 관점 전체에 일정한 정합성과 일관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실존주의와 연관된 치료들에 대해서는 동일한 말을 할 수 없다. 실존치료, 혹은 실존적 감수성에 기반한 치료는, 각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라 거의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이야말로, 실존치료가 하나의 치료 운동으로서 정신분석만큼 대중적이거나 영향력 있는 흐름으로 자리 잡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실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에 하나의 유행으로 부상했으며, 그 출발점은 유럽이었고 이후 대서양을 건너 미주 대륙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실존’에 대한 형용사로서의 실존적이라는 단어는, 1943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되어 전쟁 종결 2년 전에 세상에 나온 『존재와 무』를 통해 대중화된 사르트르에 의해 하나의 철학 학파를 지칭하는 기술적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르트르는 자신을 최초로 ‘실존주의자’라고 명명한 철학자였지만, 그 명칭 자체를 발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실존주의’라는 용어는 1940년대 중반 프랑스의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나, 실존주의는 무엇보다도 사르트르와 가장 강하게 동일시되었다.
<L’existentialisme>는 곧 파리 전역을 휩쓸며 하나의 열풍이 되었고, 비순응의 시대를 열어젖힌 지적·사회적 감수성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는 나치 점령기 동안 독일에 의해 강요되었던 억압의 사슬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려 드는 모든 형태의 정통성에 대한 사회적·지적 반란이기도 했다. 파리는 하나의 철학적 문화 공간이 되었고, < l’existentialisme>라는 말은 소위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 자처하는 이들, 그리고 모두가 속하고자 열망하던 세련된 파리의 아방가르드 집단의 일원임을 과시하는 이들의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렸다.
이러한 지적 집단의 중심 무대에는 사르트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즐겨 찾던 카페 드 플로르 Café de Flore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가장 유명한 철학적·문학적 저작들을 집필했고, 이 보헤미안적 지식인 집단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했다.
사르트르는 그의 절친한 동료였던 모리스 메를로 퐁티, 그리고 연인이었던 시몬느 드 보봐르와 함께 실존주의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인물들이었을지 모르나, 실존주의 그 자체는 이들보다 한 세기 이상 앞서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실존주의를 누가 ‘발명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실존철학이라 불리게 된 사유의 흐름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네 명의 핵심 철학자가 존재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 각각은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공헌을 남겼다.
그 첫 인물로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이는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이다. 그는 자유, 주체적 행위성, 그리고 진정성에 대한 강조를 포함하여, 오늘날 우리가 이 관점과 연관 짓는 거의 모든 요소를 담은 철학을 최초로 정식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사유를 규정하기 위해 ‘실존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고, 인간 조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그러한 표상으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키르케고르 이후에는 또 다른 19세기 철학자인 독일의 니체가 등장한다. 니체가 키르케고르의 저작을 실제로 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키르케고르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두 철학자는 모두 자신들이 혐오했던 독일 철학자 헤겔로 대표되는 전통 철학의 추상화 경향에 강하게 반대했다. 대신 이들은 철학의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차원, 그리고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진정성 있게—즉 정직하게—직면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실존주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평가되는 인물은 단연 하이데거이다. 이는 그의 방대한 저술 분량, 사유의 급진성, 그리고 일상적 인간 삶에서 존재의 역할을 중심 문제로 삼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키르케고르나 니체와 달리, 하이데거는 자신의 작업에서 ‘실존적’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며 그것에 특정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그는 키르케고르와 니체의 저작에 깊이 정통해 있었고, 이들의 사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키르케고르의 불안, 진정성, 자기 개념에 대한 관점은 하이데거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다시 니체 철학에 대한 현대적 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르트르의 주저 『존재와 무』는 자유와 진정성과 같은 개념들을 다루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제2부를 거의 그대로 프랑스어로 옮긴 것에 가깝다. 물론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스승이었던 에드문트 후설에게서도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존철학을 대중화하고 이를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전환시킨 인물은 사르트르였다. 바로 그 결과로, 키르케고르·니체·하이데거는 비로소 학계를 넘어 비전문 대중의 시야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실존주의의 전개에서 중요한 또 다른 철학자로는 독일의 칼 야스퍼스를 들 수 있다. 그는 하이데거와 동시대인이었으며, 실존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 또 다른 인물인 한나 아렌트와도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였고, 두 사람은 한때 연인 관계이기도 했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가 누린 전례 없는 명성에 가려졌지만, 정신병리학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을 남긴 정신과 의사로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실존주의와 연관된 철학자와 문학가는 매우 많다. 스페인의 우나무노와 오르테가 이 가세트, 보헤미아 출신의 소설가 카프카, 그리고 또 다른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소설가로 『이방인』으로 유명한 카뮈 등이 그 예다. 또한 유대교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 일부에게는 최초의 실존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하는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 프란츠 파농, 레비나스 등도 포함된다. 이 명단은 물론 결코 완결적이지 않다.
더 나아가, 내가 실존주의적 감수성이라 부르는 태도를 체현한 철학자가 아닌 소설가와 예술가들 또한 수없이 많다. 미국 작가들로는 헤밍웨이, Dashiell Hammett, Jim Thompson, 필립 K. 딕이 있으며, 화가로는 피카소, 달리, 세잔느, 프란시스 베이컨, 블레이크, 잭슨 폴락, 앤디 워홀 등이 있다. 시인으로는 베케트와 Richard Wright을, 영화감독으로는 잉마르 베리히만, 루이스 브뉘엘, 페데리코 펠리니, 프랑수아 트뤼포, 알랭 레네, 히치콕, 스탠리 큐브릭, 그리고 물론 우디 알렌을 들 수 있다.
20세기의 예술가·사상가·작가들 가운데 실존적 관점을 체현한 인물들의 목록을 나열하는 데 하루를 보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그 작업을 생략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 그에 앞선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사이와 이후를 관통한 냉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모든 것을 예비한 산업혁명 때문에, 20세기 후반은 이 실존적 감수성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에 사유하는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라는 실존적 물음에 사로잡히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이와 연관된 수많은 철학자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존적 관점 혹은 실존적 감수성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 개념에 대해 정통적이거나 정전적인 정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철학적 관점에는 그것을 다른 관점들과 구별해 주는 고유한 명명법(nomenclature)이 존재하며, 비록 상호 중첩되는 지점들이 있을지라도 이러한 구별은 유지된다. 실존주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관점과 가장 즉각적으로 연관 지을 수 있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으며,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먼저 '경험'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경험'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특권화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며, 다른 철학 전통들이 보여 주는 추상적·학문적 성격과는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실존철학을 다른 철학 학파들과 구별 짓는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실존철학은 때로 비전문가에게 더 접근 가능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존재와 시간』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철학 저작으로 자주 거론된다.
실존적 관점이 무엇을 포함하든 간에,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심을 둔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는 바로 나의 관점에서 경험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경험이라는 개념은 랭에게도 각별히 중요했으며, 그 중요성은 그가 저술한 두 권의 책 제목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경험의 정치학』와 『경험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경험은 실존주의자들이 빈번히 사용하는 또 하나의 용어, 즉 의미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 용어가 실존주의자들에게만 독점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들은 나에게 중요성을 지니며, 이는 곧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며, 그 결정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나 자신뿐이다.
특히 나의 삶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라는 질문, 다시 말해 의미에 대한 탐구는, 실존적 치료와 정신분석 모두에서 가장 근본적인 주제로 다루어진다. 두 접근은 공히 치료 과정을, 가능한 한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또 하나의 핵심 용어는 '진정성'이다. 모든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비진정성보다 진정성을 옹호하지만, 정작 진정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합의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도 진정성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프로이트 역시 정직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자유연상이라는 행위를 통해—즉 마음에 떠오르는 바를 타인에게 숨김없이 드러내도록 함으로써—환자의 삶에서 진정성을 촉진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정신분석과 실존주의는 모두,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가식과 가장을 벗어던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아마도 바로 이 점이 두 전통을 그토록 논쟁적으로 만든 요인일 것이다. 두 접근 모두 사회의 구성원들이 현상 유지(status quo)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사회 안에서 전복적 요소로 작동한다. 어떤 집단도 그 집단이 중시하는 바를 내부 구성원이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일을 반기지 않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집단은 본성상 보수적이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실존주의자들은 대체로 강한 독립성을 보이며, 원칙적으로 집단을 회피하는 경향을 지니는지도 모른다.
진정성은 또한 자유라는 개념에 대한 실존주의적 집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유는 복잡하고, 대체로 오해되기 쉬운 개념이며, 진정성과 마찬가지로 실존주의 사상가들마다 그 이해 방식은 상이하다. 대체로 실존적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존재의 가장 깊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내가 누구로 존재할지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우리는 보통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는데, 이는 심리치료에서 흔히 관찰되는 전략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의 선택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선택은 대개 의식의 표면 아래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관점은 내가 나의 행위에 대해 행위주체성을 지닌다는 점, 즉 내가 나의 행동과 인상, 삶에 대한 태도의 배후에 서 있으며, 따라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점을 함축한다. 나는 심지어 나의 신경증조차 선택한다! 감옥에 수감된 한 남자는 자신이 갇혀 있고 탈출할 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수감자라는 조건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한다—비탄에 잠길 것인지, 자기 계발에 힘쓸 것인지, 혹은 모든 역경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할 것인지 말이다.
실존적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된 또 하나의 핵심 용어는 독일어 앙스트(Angst)이다. 이는 영어로 흔히 '불안(anxiety)'으로 번역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고뇌(anguish)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안한 존재이며, 이는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적 차원에 속한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 모두가 본래적으로 불안한 존재이며 가능한 한 그 불안을 끊임없이 최소화하려 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과도 상통한다. 다만 그러한 시도가 종종 우리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 역시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다.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이 사용하는 용어는 서로 다르지만, 불안을 인간이 지속적으로 씨름해야 할 핵심 문제로 특권화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호 보완적인 입장을 취한다. 대체로 두 전통은 모두 불안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병리적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동의한다. 따라서 불안을 제거하거나 축소하기보다는, 그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수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본다.
물론 우리가 불안을 경험할 때, 본능적으로 그것을 억누르고자 하는 충동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와 정신분석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삶의 필수적 구성 요소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진정제나 회피 전략으로 덮어버리기보다는 이해되어야 할 무엇으로 간주한다.
내가 실존주의와 연관 짓는 마지막 핵심 용어는 '소외'이다. 이 역시 실존주의자들만이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에 근본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환경으로부터 본질적으로 소외된 존재다. 소외는 마르크스주의에서도 핵심 주제로 다루어지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계급의 불평등과 경제적 특권이 사회적 소외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한 기술의 침투적 권력에서 소외의 근원을 찾는다.
이 문제는 산업혁명에서 비롯되었지만, 과학소설에서도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필립 딕은,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사라질 수 있음을 탐구했으며, 그가 묘사한 세계에서는 “기계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상황이 도래한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는 서로를 결코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상호 간에 소외되어 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낯선 존재이며, 서로에게 투사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상대를 오인한다.
이러한 소외가 극복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실존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어떤 이들은 탈출구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사랑을 통해 서로의 소외를 가로지를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타인을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쩌면 타인보다도 자기 자신을 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앞서 논의한 진정성의 문제를 환기한다. 진정성없는[비진정성 상태의] 개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나, 그러한 상태에 머물 필요는 없다—만약 그가, 혹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기로 결단한다면 말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용어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은, 그것들이 모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매우 평범한 단어들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실존주의가 전성기에는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각자는 삶 전반에 걸쳐 이러한 문제들과 씨름한다. 실존주의 문헌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유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말하자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존주의자인 경우가 적지 않다. 사유하는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실존적 문제들에 무관심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실존적 관점과 연관된 사상가들이 매우 다양하고 서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는 삶에 대한 공통된 시각은 무엇인가? 대체로 이들 모두는, 삶이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통·좌절·실망으로 우리를 시험하며, 수행하기에 극도로 어려운 과제들을 끊임없이 부과하고, 그 결과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을 남긴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나이가 들수록 삶이 더 수월해질 것이라 믿지만, 경험은 오히려 그 반대를 가르쳐준다.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지며, 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존재가 끝나고 마침내 죽음의 불가피성과 마주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 지점에서, 종교를 믿는지 여부는 실존주의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 본질적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무신론자인 사르트르와 같은 경우, 삶에는 본래적 의미가 없으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삶이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뿐이다. 반면 키르케고르, 가브리엘 마르셀, 폴 틸리히와 같은 기독교적 실존주의자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은 일정한 위안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은 사실이 아니라 신앙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예컨대, 내가 죽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의 존재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의심의 순간들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경험은 『어두운 밤』에서 깊이 묘사된 십자가의 성요한(John of the Cross)의 체험과도 상응한다.
이러한 절망은, 우주 속에서 내가 완전히 홀로 남겨졌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거나, 혹은 한때 말을 걸었으나 이제는 나를 버렸다고 느껴질 때, 그 절망은 더욱 깊어진다. 니체가 선언한 유명한 말, “신은 죽었다”는 표현은, 우리가 더 이상 외부 권위에 의존하여 삶의 지침이나 구원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방식이었다. 니체의 이러한 입장과 무관하게, 실존주의의 핵심적 태도는, 신을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인간은 결국—어쩌면 필연적으로—자기 삶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게 된다는 데 있다.
실존주의 사상가나 예술가 거의 모두에게서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서 가차 없이 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든지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고독의 감각은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자기정체성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내가 거주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고독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하며, 그 어떤 상세한 전기보다도 나와 나의 정체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키르케고르가 탁월하게 묘사한 절망의 근거이며, 이후 모든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공감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절망에는 치료법이 존재하는가? 절망은 임상적 진단명이 아니라 나의 본성에 속한 근본적 차원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나의 일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이에 반응하여 불안이나 우울이 심화되기도 하고, 체념한 채 약물이나 기타 주의 분산적 행위에 의존해 그 고통을 견디려 하기도 한다.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철학, 종교, 혹은 예술적 활동으로 향해, 이 절망을 의미 있는 무엇으로 전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든다. 또 다른 이들은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고, 정신분석이나 실존적 치료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치료를 찾기도 한다. 혹은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이 삶에 본래적으로 수반되는 불안과 씨름하는 과정임을 인식하고, 단지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할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의 무게를 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자각해야 한다. 니체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꿈속을 살아가듯 삶을 통과한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각성이다. 그러나 그 각성은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없다. 깨어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실존주의, 더 나아가 현상학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 사상, 특히 스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현상학의 창시자이자 하이데거의 스승이기도 했던 에드문드 후설은, 판단을 보류하는 방법인 에포케(epoché)를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자들로부터 차용했다. 이 회의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 이후에 등장했으며, 그 기원은 소크라테스가 당대의 철학자들과 나누던 대화 방식에서 추적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시대 철학자들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그의 상대가 아무리 기민하더라도,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논증과 추측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 반박 불가능한 진리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결국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공언했으며, 다만 자신의 무지를 인식할 만큼은 현명하다는 점만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흔히 마주하던 철학자들, 즉 소피스트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대화 방식은 허위 가정들을 제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이후 전개될 회의주의적 탐구 방법의 씨앗을 심었다. 이 방법은 소크라테스 사후 약 한 세기 뒤, 피론(Pyrrho)에 의해 정식화된 에포케, 즉 판단 유보의 방법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삶의 의미에 대해 세속적 설명을 모색함으로써 철학을 종교로부터 분리하려 했다는 점에서, 또한 최초의 실존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는 행복의 의미, 사랑, 용기, 성실성, 도덕성 등 온갖 주제를 넘나들며 논의를 전개하는데, 이들 어느 것도 삶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종교적 설명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는 극히 급진적이었고, 동시에 위험한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올림포스의 신들에 의해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그리스 신들과의 관계에서 기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존재를 형식적으로는 인정했지만, 철학을 종교와 구별 짓는 핵심은 대안적이며 본질적으로 세속적인 세계관에 있었다. 그는 교양이 부족한 아테네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르러 결국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거짓 종교를 설파했다는 혐의로 기소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논증을 보강하기 위해 신화적 인물들을 창안해 사용했던 점을 암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면 처형을 피할 수도 있었으나, 성실성과 일관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아테네의 청년들을 교육함으로써 동료 시민들에게 선의를 베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고발자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어떠한 퇴로도 제공하지 않은 채 결국 마지못해 처형되었다.
죽음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순교자가 되었고, 이후의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이해한 진리를 옹호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다른 철학자들 역시 유사한 이유로 처형되었다. 니체나 하이데거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의 근원을 고대 그리스에서, 특히 소크라테스가 체현한 회의주의적 감수성에서 찾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실존 전통으로 분류되는 임상가들, 그리고 그러한 명시적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실존적 감수성(existential sensibility)'을 분명히 보여주는 이들을 함께 검토할 준비가 되었다. 먼저, 이 책에서 내가 ‘실존적’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용어를 앞서 언급한 그 어떤 특정 실존철학자와도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는다. 물론 나는 하이데거, 사르트르, 니체, 키르케고르, 막스 셸러, 모리스 메를로 퐁티 등 여러 사상가들로부터 폭넓게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 가운데 누구의 철학과도 이 용어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이 책과 이를 구성하는 각 장의 목적을 위해, 나는 ‘실존적’이라는 용어를 비교적 넓은 의미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나는 임상 작업의 전부 혹은 일부 측면에서 실존적 감수성을 체현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다수의 정신분석가들이 존재한다고 본다.
랭과 같이 스스로를 실존철학 전통과 명시적으로 동일시하는 분석가들 외에도, 위니코트, 비온, 라캉, 한스 로왈드, Stanley Leavy, Martin Bergmann, 해리 스택 설리반, Otto Allen Will Jr., Edgar Levenson, 에리히 프롬, 프리다 프롬 라이히만(Frieda Fromm-Reichmann), Clara Thompson, 그리고 심지어 프로이트 자신까지도, 임상 실천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실존적 관점을 체현한 분석가들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나는 이들 각각에 대해, 그들의 사유 가운데 어떤 요소들을 실존적이라 간주하는지를 일일이 검토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내가 어떤 기준으로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지는 충분히 명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내가 말하는 실존적 감수성의 일반적 특징들과, 그것이 이 저작 전반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강조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 나의 논지는 개인적이라는 용어와 실존적이라는 용어를 동의어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학파이든 비정신분석적 학파이든, 대부분의 치료 학파들은 각종 기법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이러한 기법들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프로이트의 기술적 권고들—특히 자유연상, 중립성, 절제, 전이—이 실존적 방식의 치료 수행과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원리들조차도, 정신분석가들에 의해 심각하게 오해되어 왔다. 많은 분석가들은 이를, 정신분석을 수행하기 위해 분석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엄격한 지침으로 읽어내 왔다. 사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기술적 권고들이 각 분석가의 성격에 맞게 조형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분석가의 성격이 기술에 맞추어 변형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임상에서 분석가들은 바로 그 반대의 방식으로 행동해 왔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가 이 직업을 창시한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심리치료 학파—행동치료나 인지치료는 물론, 현대의 다수 비정신분석적 실존치료 학파들까지—역시 이와 동일한 경로를 따라왔다.
내 견해에 따르면 실존적 정신분석은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대화적이다. 대화는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이며, 이완되어 있고, 호기심에 열려 있으며, 비판단적이고 개방적이다. 이는 규칙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타인과 말하는 방식 그 자체다. 대화는 두 인간이 서로에게 수행할 수 있는 활동 가운데 가장 친밀한 행위다. ‘친밀함’이라는 단어는 명사이면서 동시에 동사다. 관계는 친밀할 수 있고, 나는 또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당신에게 친밀하게 전할 수도 있다. 친밀하게 전한다는 것은 곧 대화하고,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가톨릭에서의 고해가 중요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신분석의 심장과 영혼, 곧 ‘대화 치료(talking cure)’의 핵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로이트를 어쩌면 최초의 실존적 정신분석가로 간주한다. 그는 이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각 실존적 정신분석가의 ‘사람됨’은 단지 중요할 뿐 아니라 본질적이다. 우리는 규칙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출발해 작업한다. 이 치료 형식의 치유적 힘의 상당 부분은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형성되는 마음과 마음의 연결에 의해 구현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일은 치료자의 몫이다. 우리 각자는 이 관계 속으로 고유한 자질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고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전 생애—특히 어린 시절 전체—는 언젠가 실존적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잠시, 이것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이, 나의 임상 실천에 대한 접근은 정신분석과 실존철학 전통의 혼합이다. 이는 최소한 말하자면 다소 기이한 결합이며, 정신분석이 바로 그 전통에서 연원한다고 보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도 나를 포함해 극소수일지도 모른다. 나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프로이트를 접했다. 당시 내가 읽을 거리를 찾고 있던 주제는 성이었고, 그것은 그 시기 나의 관심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나는 『성 이론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기대했던 종류의 책은 아니었지만, 그 책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성을 이해하는 나의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으로 프로이트의 책을 읽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사르트르의 『구토』도 함께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내가 사르트르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그가 실존주의와 연관된 인물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 단어 자체에 이끌렸고, 더 알고 싶어졌다. 그 호기심에 자극을 받아 나는 사르트르의 또 다른 저작, 『[Sketch for a] Theory of the Emotions』를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세 권의 책을 거의 동시에 읽는 동안, 나는 사르트르와 프로이트—실존주의자와 정신분석가—가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동일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내가 느끼고 있었고 씨름하고 있던 수많은 문제들—불안, 좌절, 욕망, 실망, 권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철학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것이 성인이 된 이후 나의 소명이 될 것이라고.
불행하게도 당시 나는 테네시의 작은 마을에 발이 묶여 있었고, 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지역 도서관뿐이었다. 상상할 수 있듯이 그곳에는 철학이나 정신분석 관련 저작이 거의 없었다. 테네시는 나에게 낯선 곳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한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적 이유로 아바나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화학공학자였고, 당시 우리가 살던 뉴욕에서 쿠바로 건너가 섬유 공장을 건설하는 일을 맡았다. 프로젝트가 완료될 즈음, 아버지는 쿠바 문화에 매료되어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나는 열네 번째 생일을 맞기 직전까지 쿠바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예상대로—부모님의 고향인 테네시로 돌아왔다.
쿠바에서 테네시로의 문화적 충격은 성장 초입의 청소년에게 치명적이었다. 쿠바는 아이가 자라기에 놀랍고도 마법 같은 곳이었다. 쿠바인들은 관능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유희적이면서 지적이며, 품격이 있었다. 아바나는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고, 부유하거나 모험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놀이터와도 같았다. 섬에 거주하던 몇 안 되는 미국인 외국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 부모는 헤밍웨이와 그의 아내 메리와 친분을 쌓았고, 아버지는 때때로 나를 데리고 구(舊) 아바나의 Floridita Bar에서 헤밍웨이와 데낄라를 마시곤 했다.
나는 헤밍웨이를 동경했고, 그가 파리와 스페인에서의 삶에 대해 들려주던 이야기를 사랑했다. 당시에는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과 친분이 있었고 당시 연인과 함께 쿠바를 방문 중이던 한 프랑스 철학자이자 소설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곤 했다. 그 연인은 시몬느 드 보봐르였다. 훗날 테네시 엘리자베스턴의 도서관에서 사르트르의 책을 발견했을 때에야, 나는 헤밍웨이가 말하던 사상가가 바로 사르트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국적이고 세련된 아바나에서 보낸 이후에, 동부 테네시의 아주 작은 마을에 적응하려 애쓰는 과정은 나를 실존적 위기¹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누구이며, 왜 그곳에 있는가? 나는 불안, 권태, 소외를 느꼈다. 우리가 쿠바에서 테네시로 돌아온 지 1년 후, 그리고 내가 프로이트와 사르트르를 접하기 2년 전, 평생 우울증과 싸워왔던 어머니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열네 살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전부였고, 그 상실은 파국적이었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가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때마다 어머니를 붙잡고 만류했고, 어머니는 물러섰다. 그러나 때로는 약물을 과다 복용했고, 회복한 뒤 다시 언제일지 모를 시점에 같은 시도를 반복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를 살아 있게 유지하는 일에 바쳐진 듯했다. 그러다 테네시에서 운명적인 그날, 어머니는 스스로 총을 쐈고, 엿새 뒤 사망했다. 사실상 어머니는 나를 자신의 치료자로 훈련시키고 있었던 셈이었다. 나로 하여금 엄마에게 희망을 제공하도록 말이다.
쿠바를 떠난 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했고, 아버지가 뉴욕으로 돌아간 반면 나는 테네시에 남아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돌렸고, 그 결과 아버지와 함께 살기보다는 내가 늘 각별했던 외가 조부모와 테네시에서 지내기로 선택했다. 다음에 내 삶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가늠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이 공백기 동안, 나는 이 작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무렵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전 세계는 곧바로 핵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열다섯에서 쉰 살 사이의 모든 미국 남성이 징집될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다. 위기는 일단락되었지만, 곧이어 케네디가 암살되었고 세계는 다시 한 번 붕괴하는 듯 보였다.
나는 단지 하나의 장면을, 즉 내가 실존주의와 정신분석을 발견하던 당시의 삶의 초상을 그려 보이려는 것이다. 이 두 학문은 이후 나의 성인기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세계—곧 나의 세계—는 혼돈 속에 있었다. 두 해가 지나 내가 열여덟이 되었을 때, 베트남 전쟁은 거대하고 위협적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언론은 이를 연일 보도했고, 베트남으로 파병될 대규모 징집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면 테네시를 떠나 유럽을 떠돌며—어쩌면 사르트르와 헤밍웨이가 드나들던 카페들 어딘가에서—나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징집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이유로 지역 대학에 등록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병위원회는 나를 징집했다. 나는 국가안보국의 정예 군사 조직이자 육군의 핵심 정보 부대인 육군 보안국에 배치되었고, 입대 후 여섯 달 만에 사이공 외곽의 Tan Son Nhut Air Base에 도착해 있었다.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나는 테네시에서보다도 훨씬 더 분노에 차 있고, 절망적이며, 고립되어 있음을 느꼈다. 테네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이루어졌지만, 트루먼 카포티가 경고했듯이, 이루어진 기도는 경계해야 한다. 서기 타이핑 집단으로 위장된 얇은 외피 아래 실제로는 정보기지였던 제509 무선연구단의 동료들과 함께, 나는 운명이 나를 베트남으로 데려온 이유가 단 하나, 죽기 위해서라고 확신했다. 나는 다시는 미국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 믿었고, 지난 5년간 겪어온 모든 고통은 지금 내가 처한 자리—아무도 정당성을 믿지 않았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적과 싸우는 전쟁—에 이르기 위한 전조였다고 여겼다.
나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읽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나는 테네시에 있는 가족이 보내준 책들을 통해 니체, 카뮈, 카프카, 하이데거를 처음 접했다. 이토록 실존적인 장소에서 나는 사르트르, 니체, 카프카가 생생하게 표현했던 삶의 비극적 감각(tragic sense of life) 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는 이상하리만치 나를 위로했고, 그 1년을 견디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365라는 마법 같은 숫자—어쩌면 어떤 기적의 개입으로라도 본토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그날—를 향해 하루하루를 세며 버텼다.
실제로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지만,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멈출 수 없었다. 모든 냉소와 자기 의심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나는 이 점을 나와 함께한 실존주의자들, 즉 나의 실존적 동반자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믿는다.
열네 살에서 열아홉 살에 이르는 그 시기들은 나에게 결정적이었으며, 베트남에서 귀환한 뒤 내가 따르게 될 방향을 형성했다. 귀국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은, 베트남에서 경험했던 불안이 생명이 문자 그대로 위협받는 전쟁 지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제 나의 불안은 상시적인 동반자가 되었고, 나는 이 불안이 삶의 항상적 상수이며, 적이 아니라 동료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스무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정신분석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 타인들과의 대화에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나의 두 가지 열정—철학과 치료—을 결합하고자 했다. 쿠바 혁명으로 인한 추방, 테네시의 작은 마을에서의 의미 탐색, 어머니의 파국적 상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촉발한 경보와 종말의 감각, 그리고 나의 정부에 의해 대학에서 끌려가 베트남의 레드 존으로 보내진 경험—이 모든 요인들의 응결은 실존철학을 나의 종교이자 구원으로 만들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대학에 복학했고,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의 미국에서 심리학은 유행의 정점에 있었고, 샌프란시스코는 그 모든 흥미로운 변화가 응집된 진원지였다. LSD, 요가, 불교, 명상, City Lights Bookstore—비트 세대의 작가와 시인들의 중심지—Ken Kesey, 잭 케루악, Lawrence Ferlinghetti, 그리고 성, 약물, 록 음악,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모든 것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것에서 숭고한 것까지, 테네시와 베트남이라는 지옥에서 샌프란시스코라는 유토피아로의 이동은, 마치 내가 그것을 벌었고, 어쩌면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듯 느끼게 했다.
그러나 히피 문화의 샌프란시스코는 지적 황무지였다. 유행의 장식과 나팔바지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은 나에게 궁극적으로 피상적으로 보였다. 정신분석은 후퇴 국면에 있었고, 프로이트를 읽는다고 말하는 데조차 조심해야 했다. 실망스럽게도 교육과정에는 하이데거도, 사르트르도, 니체도 없었다. 당시 실존주의와 정신분석의 통합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들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정신역동적 관점으로 이식하려 애쓴 논문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두에는 스위스의 두 분석가, 루드비히 빈스방거와 메다드 보스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너무도 무미건조하고 난해하여, 그들의 작업에서 실존적 감수성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랭이 등장했다.
내가 랭을 발견한 것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이후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마린 카운티의 Muir Beach를 걷던 중, 나는 철학과 사르트르에 대한 나의 관심을 주제로 한 흥미로운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젊은 남자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배낭에서 『분열된 자기』의 페이퍼백 한 권을 꺼내 내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요. 아마 마음에 들 겁니다.” 나는 그 ‘러브 차일드love child’를 다시는 보지 못했지만, 이러한 종류의 관대함은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 후 2년 동안 나는 랭이 출판한 모든 저작을 읽었고,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밀도 높은 사유를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방식과 그 사유 자체에 집착하게 되었다. 1972년 가을, 랭은 전국 강연 순회 중 “광기의 철학자”라는 표제를 달고 버클리를 방문했다. 그를 직접 보고, 강연이 끝난 뒤 그와 대면한 경험은, 대학원 과정을 떠나 1973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그와 함께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격려가 되었다.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실존적 정신분석을 훈련할 수 있는 곳은 런던의 Philadelphia Association—곧 랭이 설립한 기관—외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그 10년 동안 랭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널리 읽히는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이는 주로 『분열된 자기』, 『Self and Others』, 『The Politics of Experience』, 『The Politics of the Family』 등 1960–70년대에 출간된 다수의 저작 덕분이었다. 이 책들은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을 통합했을 뿐 아니라, 생동감 있고 설득력 있는 문체로 쓰여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북미와 유럽에서 런던으로 건너가 그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았고,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80년,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해를 전후로, 다른 훈련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는 이미 존재하던, 정신분석이 아닌 방식으로 실존주의를 심리치료와 통합하려 했던 여러 학교들에 더해진 것이었다. 여기에는 취리히의 메다드 보스의 현존재 연구소(Daseinsanalytic Institute), 그리고 빅터 프랭클이 설립한 유럽과 남미 전역의 로고테라피 연구소들이 포함된다. 또한 런던의 Regents College에서 에미 반 두르젠와 에르네스토 스피넬리가 창설한 학위 과정,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커크 슈나이더—롤로 메이의 제자—가 설립한 Existential-Humanistic Institute도 여기에 속한다. 메이의 또 다른 제자인 어빈 얄롬 역시 실존적 심리치료에 관한 저작들을 집필해 큰 반향을 일으키며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어떤 훈련 기관에도 소속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실존주의에 기반한 심리치료의 다양한 구상을 공유한 임상가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롤로 메이를 제외하면 그들 중 누구도 정신분석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정신분석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예외라면 메이를 스승으로 둔 얄롬 정도였다. 메이는 정식으로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인물이었고 랭과도 가까운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의 다수의 저작들—1970년대에 메이와 랭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두 실존적 실천가였다—에는 정신분석적 사유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그는 의도적으로 정신분석적 용어를 회피했다.
실제로 메이는 한 차례 나에게, Alanson White Institute—해리 스택 설리반이 설립한 대인관계 정신분석으로 유명한 기관—에서의 정신분석 훈련과 이후의 연관이 매우 좌절스러웠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 기관은 실존철학을 교육과정에 도입하려는 메이의 시도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메이는 말하자면 독자 노선을 택해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옮겼고, 이후 자신의 수많은 저작에서 정신분석적 배경을 일절 언급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실존적 정신분석가가 아니라 실존주의 심리학자로 인식되었고, 이것이 그의 직업적 정체성이 되었다. 메이는 개인적으로 제자들을 두고, 샌프란시스코의 Saybrook Institute와의 연계를 맺기는 했으나, 이후 다시는 어떤 훈련 기관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인 어빈 얄롬 역시 롤로 메이의 정신역동적 관점 일부를 수용했는데—이 점 때문에 그는 영국의 실존치료가들과 이른바 ‘분석가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그럼에도 메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작에서 정신분석가들을 거의 인용하지 않으며,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또한 사실상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메이와 얄롬은 인문주의적이든 여타 실존치료가들이든 그 누구보다 정신역동적이지만, 동시에 정신분석을 하나의 학문적 전통으로서 의도적으로 거리두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적절한 의미의 실존적 정신분석은, 모호한 ‘정신역동적’ 원리들에 대한 일반적 참조가 아니라, 정신분석 자체에 확고히 뿌리를 두어야 한다.
<실존 치료(Existential Therapy)와 실존적 정신분석(Existential Psychoanalysis)의 구분>
그렇다면 명시적으로 규정된 실존적 정신분석과, 느슨하게 실존적 치료라는 범주 아래 묶이는 여타 접근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신분석을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과 결합하려 했던 최초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들은 루드비히 빈스방거와 메다드 보스였다. 이들은 모두 스위스 출신 정신과 의사로, 취리히에 있던 C. G. 융과, 빈에 있던 그의 동시대 인물이자 동료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학문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빈스방거와 보스는 두 인물 모두에게서 수련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융보다 프로이트에게서 훨씬 더 많은 이론적 자원을 끌어왔다.
두 사람은 정신분석과 실존철학의 결합 방식에 대해 각기 다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빈스방거는 자신의 치료를 실존분석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에게만 허용된 용어로 간주되던 ‘정신분석’이라는 명칭을 의도적으로 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트에게 지나치게 깊이 빚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실존적 치료가들은 오히려 빈스방거가 자신의 명시적 목표—즉 프로이트 이론을 하이데거의 사유로 대체하려는 시도—와 달리, 실제로는 프로이트에게 과도하게 의존했다고 비판한다.
보스와 마찬가지로, 빈스방거(1963)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과 전이 현상을 자신의 실존분석 안으로 적극적으로 통합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수정’하거나 ‘교정’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유사하게, 보스 역시 『정신분석과 현존재 분석』(1963)이라는 저작 전체를 할애하여, 프로이트의 핵심 이론들을 보다 덜 ‘정신분석적인’ 용어 체계로 번역하고자 했다. 여기서 현존재분석(daseinsanalysis)은 보스가 자신의 실존적 치료 접근을 지칭하기 위해 채택한 명칭으로,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개념을 직접적으로 참조하는 용어이다.
그 결과는 기껏해야 엇갈린 수준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프로이트의 가장 난해한 용어법보다도 훨씬 더 불투명한 명명법에 의해 오히려 짐이 되었다. 사실 프로이트는 탁월하고도 노련한 저술가였으며, 복잡한 사유를 명료하고도 독자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보기 드문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불행히도 빈스방거나 보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이데거를 정신의학의 언어 안으로 도입하는 데에는 분명 성공했으며, 이후 다수의 유럽 정신과 의사들—주로 프랑스와 독일 출신—이 이 새로운 언어를 인간 조건에 대한 자신들의 평가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저술가들은 R. D. 랭과 롤로 메이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들로 하여금 실존적 이론을 자신의 저작 속에 도입하도록 자극했다.
정신과 의사와 정신분석가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세대는, 보스, 빈스방거, 민코프스키 그리고 다른 여러 유럽 실존적 치료가들의 논문을 모아 롤로 메이, 어니스트 엔절, H. F. 엘렌베르거가 편집한 『존재: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새로운 차원』(1958)이라는 논문집이 출간되면서 이러한 사유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1960–70년대는 유럽 실존적 임상가들의 저작이 영어로 대거 번역되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Journal of Existential Psychiatry and Psychology와 같은 미국 내 새로운 학술지들이 창간되며 이 새로운 심리치료 학파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존적 치료의 초기 수용자들 가운데 다수—어쩌면 대다수—는 실제로 정신분석가들이었으며, 그중에는 프리츠 펄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R. D. 랭과 롤로 메이를 제외한 실존적 치료의 1·2세대 실천가들은 거의 모두 사망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사실상 누구도 정신분석가가 아닌 새로운 세대의 실존적 치료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새로운 세대에는 이른바 영국 실존분석 학파(에미 반 두르젠, 에르네스토 스피넬리), 로고테라피 연구소의 여러 분과(빅터 프랭클), 샌프란시스코의 실존–인본주의 연구소(커크 슈나이더), 볼더 심리치료 연구소(베티 캐넌), 그리고 198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Free Association, Inc.라는 명칭 아래 설립된 나의 실존적 정신분석 신학교⁴가 포함된다. 이들 기관은 공통적으로, 심리치료사들에게 실존철학을 소개하고 교육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해 왔다.
또한 특정 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채 실존적 치료가들의 훈련과 교육에 관여한 인물들로는 롤로 메이, 어빈 얄롬, 루드비히 르페브르, 발터 멘라트, 율리우스 호이셔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는 샌프란시스코에 기반을 두고 활동했다. 이들 집단 가운데 Free Association, Inc.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기관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정신분석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 왔으며, 실제로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들의 명칭에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모든 집단과 기관에는 실존철학과 실존적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뛰어난 사상가들과 치료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제공하는 치료는 탁월하며,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지속적으로 존속하거나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나는 실존적 정신분석이 실존주의적 감수성에 기반하지 않은 다른 형태의 정신분석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다거나, 더 효과적이거나, 더 사용하기 쉽다거나, 어떤 의미에서든 우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실존적 정신분석을 정신역동적 기반을 갖지 않는 다른 실존적 치료들로부터 구별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어쩌면 동시에 정신분석을 비(非)정신분석적 치료들과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먼저 실존적 정신분석이 기존의 관습적 정신분석 학파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간단히 짚고자 한다. 실존적 정신분석을 다른 모든 정신분석 학파들과 구분 짓는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 실존적 정신분석은 가장 개인적으로 개입되는 정신분석이며, 그 핵심은 기법의 부재로 요약된다.
둘째, 실존적 정신분석은 무엇보다도 인간 조건에 대한 명시적 관심을 중심에 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왜 고통받는가, 왜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르는가, 그리고 고통이 삶에서 수행하는 근본적 역할과 우리는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치료의 중심에 놓인다.
실존적 정신분석은 기법을 제거할 뿐 아니라, 적용 가능한 단일한 기저 이론 역시 갖지 않는다. 이는 중간 학파의 정신분석과 유사하게, 각 실존적 정신분석가가 스스로의 이론적 관점을 형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만 누구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든, 그 토대는 반드시 실존철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어떤 실존 철학자를 중점적으로 참조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실천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각 실천가는 자신의 정신분석적 비전을 어떤 정신분석가와 결합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프로이트이든, 위니컷이든, 비온이든, 라캉이든, 혹은 랭이든 상관없다. 나의 경우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R. D. 랭을 중점적으로 참조한다. 본 실존적 정신분석 입문서에서 나는 프로이트를 사실상 최초의 실존적 정신분석가로 간주하는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프로이트는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고, 고통과 정신병리의 관계를 핵심 문제로 다루었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인간 이해의 사상적 원천으로 삼았고, 나아가 그의 회의적 태도 역시 그리스 철학에 빚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는 사랑 — 그리고 그 부재 — 가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회복 과정에서도 수행하는 결정적 역할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실존적 정신분석을 비정신역동적 실존치료와 구분할 때 주목해야 할 근본적 차이는 세 가지가 있다.
그 중 첫째는, 실존치료가 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적 개념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실존치료는 대체로 무의식을 의식 아래 어딘가에 잠복해 있으면서 우리의 의식적 동기와 행동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주체로 이해한다. 이러한 설명이 다수의 정신분석가들이 무의식을 기술하는 방식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저술에서 무의식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를 이끄는 동기들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고,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임을 논증한 바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우리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취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을 감당하지 못할 때뿐이다.
둘째로, 실존치료는 무의식적 과정에 대한 거부를 전제로 하여, 전이에 대한 정신분석적 개념 역시 거부한다. 전이란 우리가 과거의 관계에서 형성된 양상을 현재의 관계, 특히 치료자와의 관계에 지속적으로 투사한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전이 현상은 무의식적이라는 점, 다시 말해 우리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존치료자들은 무의식 개념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전이 개념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로, 실존치료는 의학에서 차용되어 심리 현상에 적용된 진단¹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문제는 복잡한 쟁점을 포함하지만, 프로이트가 설정한 진단 범주들—이후 정신분석의 여러 학파에 의해 채택·변형된—이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컨대 프로이트가 신경증이나 정신증을 논할 때, 그는 의학적 질환이나 임상적 진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려움과 불안을 억압하거나 부인함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하는 수많은 방식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도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는 정신의학적 진단 범주의 ‘성서’로 불리는 DSM(1~5)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체계이며, 정신과 환자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증상에 대해 어떤 향정신성 약물이 가장 적합한지를 결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실제로 나는 『욕망의 죽음: 정상성과 광기에 대한 실존적 연구』라는 저서를 통해, ‘정신병리’라는 개념 자체를 다루는 대안적 접근을 제시한 바 있다.
다만, 특정 내담자를 치료에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비교적 경미한 신경증적 증상과 보다 심각한 정신증적 증상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실존치료자들은 대체로 진단을 수행하지 않지만, 동시에 정신증적 증상이나 조현병적 증상을 겪는 환자들과의 작업을 회피하는 경향 역시 보인다. 나의 견해로는, 실존적 지향을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정신분석적 훈련을 받은 치료자들이 비(非)정신분석적 훈련만을 받은 치료자들에 비해 심각하게 교란된 환자들과 작업하는 데 더 잘 준비되어 있다.
이후의 장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보다 심층적으로 탐구하며, 다른 정신분석 학파들과 실존치료와 대비되는 실존적 정신분석의 고유한 특징들을 분명히 정식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금까지 나는 ‘실존’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완벽하게 다듬어진 정의를 제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직접 규정하기보다는 암시해 왔으며, 아마도 이 문제에 접근하는 유일하게 진정성 있는 방식은 이러한 암시적 접근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앞으로 전개될 논의의 전채(前菜), 즉 더 많은 것을 예고하는 맛보기 정도는 제공했기를 바란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다양한 실존 사상가들을 참조하며, 그 각각을 어떻게 정신분석 전통과 결합시키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이해하는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잠재적으로 언제나 실존적이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실존적 이론도, 실존적 기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존주의에는 단계별로 적용 가능한 ‘방법서’에 해당하는 것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미완성적 성격상, 실존주의와 그것에서 파생된 어떠한 치료 접근도 보편적 합의를 충족시키는 이론적 체계로 정식화될 수는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실존적 정신분석은 언제나 하나의 감수성³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으며, 그 감수성은 다시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방식, 즉 관계적 존재 양식에 근거한다.
결국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실존적 감수성'이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개인적이면서도 포착하기 어려운 하나의 관여 양식이며, 우리가 가장 신비롭고도 난해한 소명이라 할 치료 과정에 스스로를 내어맡기는 매 순간을 끊임없이 배회하는 존재 방식이다. 이제 나는 ‘실존적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 장 폴 사르트르로 논의를 옮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