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定住)하지 않은 삶 : 헨리 나우웬의 영성심리

by 낭만소년


Screenshot 2025-12-29 at 03.26.15.JPG 제네시 수도원 채플에서 기도 올리고 있는 나우웬(1974)


나우웬은 일상의 전형적 인간 경험과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의 더 깊은 실재 사이에 존재하지만 흔히 간과되는 접점을 가시화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영성과 심리치료>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


이번에는 헨리 나우웬 자세히 읽기를 하고자 한다.


먼저, 그에 대한 간략한 연대기에 따른 약력을 번역해 올린다.


번역글은 P. 호세 토마스 카리칼(P. Jose Thomas Karickal) 카톨릭 선교 수도사(msfs) 의 뷔르츠부르크 바이에른 율리우스-막시밀리안 대학교 신학부 박사 학위 논문(2006)에서 발췌 번역한다. (『전문적 기능에서 인격적 고백으로: 헨리 J. M. 나우웬의 목회돌봄이 현대 영성에 대한 기여』)


P. 호세 토마스 카리칼의 논문은 헨리 나우웬의 주요 저작을 일대기에 따라 소개하면서 자세한 독해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 텍스트를 고민없이 선택하였다. 헨리 나우웬의 국내 번역들은 내가 파악하기로는 30권이 넘는다. 또한 평전 혹은 전기도 2권 번역되어 있다.


방대한 그의 저작을 어디에서부터 읽어야 할까 고민하던 중 이 논문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헨리 나우웬 읽기를 마음먹었다. 논문은 그의 저서가 집필되던 시기의 사회적 배경 및 개인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저서를 시대별로 배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특히 논문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성과 심리치료>, <영성심리학>, <종교와 정신의학 Religion and Psychiatry>을 중심으로 그의 저작을 소개하고 있어서, 망설임없이 선택하였다. 논문에서 그의 저서가 언급되는 경우 한국어 번역본을 삽입하였다.


글 중간에 사진 자료들은 『The Henri J.M. Nouwen Archives and Research Collection』에서 발췌하여 넣었다. 출처는 토론토 대학교 존 M. 켈리 도서관(John M. Keiiy Library)이다.




그의 저작에 대한 본격적인 읽기는 연대기에 따른 약력의 소개 이후에 또 다른 글을 마련하기로 한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전기 소개>



헨리 나우웬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전기는 네덜란드 하를렘(Haarlem)의 신학자이자 성공회 부제(diaconal preacher)인 유르옌 뵈머(Jurjen Beumer)에 의해 제시된다. 그는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우웬과 친구로 지내 왔기 때문에, 그의 서술은 사실적 성격을 띤다. 이 책은 나우웬이 사망하기 전에 이미 완성되었다. 뵈머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를 평가하려 했지만, 결국 “나우웬의 뜨거운 심장”에 함께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고, 나우웬을 끊임없이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 그려냈다. 뵈머는 전기 대상자의 내밀한 비밀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연대기적 방식보다는 주제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선호했다.




뵈머의 작업은 마이클 포드(Michael Ford)가 집필한 『상처 입은 예언자: 헨리 J. M. 나우웬의 초상』에 의해 보완된다. 포드는 나우웬을 뛰어난 영성 작가로 묘사하면서도 그의 투쟁의 근원을 파고들어 참된 나우웬을 제시하려 한다. 그는 나우웬 안에서 많은 이들이 찾는 스승이자 설교자를 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상처를 지닌 존재로 본다. 명예와 동행을 갈망하면서도, 그는 깊은 고독에 시달리는 절박한 사람이기도 했다.





Ⅰ. 1932~ 1957년 유년기에서 사제 서품까지


Screenshot 2025-12-29 at 03.16.15.JPG 1.어머니와 두 남매(1946) 2. 어린 사제 나우웬 3. 1957년 사제 서품 기념 만찬 메뉴 4. 나우웬의 아버지와 어머니(1960–1969)


헨리 요제프 마힐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은 1932년 1월 2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남동쪽 약 28마일에 위치한 작은 도시 나이케르크(Nijkerk)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 남매 가운데 맏이였다. 아버지 로랑 장 마리(Laurent Jean Marie)는 열한 남매를 둔 독실한 가정 출신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후베르타 헬레나(Maria Huberta Helena)는 번성한 사업가 집안의 일곱 남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나우웬 가문은 이전 세기에는 대장장이 집안으로서 말에 편자를 박는 일뿐 아니라, 자물쇠와 장식품 같은 예술적 단조 작업을 전문으로 했다. 그들은 네덜란드 남부 림뷔르흐 주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 세기 초 벤로(Venlo) 시청 서기를 지냈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여덟 남매 양육을 도맡았다. 그 가운데 맏아들 툰(Toon)은 위트레흐트Utrecht 대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이 삼촌은 나우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랑 나우웬은 1931년 마리아 람셀라르(Maria Ramselaar)와 결혼했고, 9개월 뒤 첫아들 헨리를 얻었다. 사흘 동안 지속된 고통스럽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분만 과정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강한 사랑의 유대를 형성했다.


헨리의 아버지는 “강한 성격과 강인한 의지, 그리고 확신에 찬 자기감각”²을 지닌 인물로, ‘공증 후보자(Notarial Candidate)’라는 직함을 가졌으며 등기·공공 자산 관리 감독관으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이 직을 그만두고, 결국 헤이그에서 개인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마지막에는 나이메헌 가톨릭 대학교(Roman Catholic University of Nijmegen)에서 공증법 및 조세법 교수로 재직했다. 가족은 나이케르크, 벤로, 뷔섬, 헤이그, 나이메헌 등지에서 거주했다. 로랑은 가이스터런(Geysteren)에서 은퇴했고, 헨리보다 1년 반을 더 살다가 1997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헨리 나우웬의 어머니는 문학과 신비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으나 결혼으로 인해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계속하지는 못했다. 여러 해 동안 그녀는 가족 사업의 회계 부서를 감독했는데, 처음에는 어머니가, 이후에는 남동생이 그 사업을 운영했다. 그녀는 따뜻하고 환대하는 성품을 지녔으며, 신심이 깊은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헨리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언제나 “미소와 눈물, 기쁨과 슬픔을 함께 지닌” 사람이었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나우웬의 삶 전반을 특징지은 요소 가운데 하나는 그가 아기 때부터 애정을 갈망하고, 끊임없이 안아 주기를, 사랑받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리 조화롭지 못했으며, 로랑은 아들의 야망과 리더십에 대한 열망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헨리는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는 그의 사고와 내적 투쟁, 그리고 저술에까지 영향을 미친 요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활동적인 아이였으나 만성적인 허기를 겪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붙잡으려는 성향을 음식과 신체 접촉을 제한함으로써 길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한 의사의 이론을 따랐던 것에 대해 미안해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의 사제 성소에 대한 열망을 격려했고, 그의 경건함이 자라도록 도왔다. 할머니는 가게 목수에게 아이 크기의 제대를 만들게 했고, 재봉사에게는 미사 집전을 ‘놀이’로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제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헨리는 야망이 있었고 가족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학교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는 사팔뜨기, 서툰 아이, 체육 시간에는 늘 마지막으로 선택되는 아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촌 툰의 영향은 막대했다. 그는 헨리가 열망하던 모든 것을 구현하고 있었고, 특히 삼촌처럼 미사를 집전하는 일이 그러했다.


전후의 긴장과 교파 간 갈등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온전하고 전통적인 가톨릭 가정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전쟁 상황은 하느님에 대해 더 자주 말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더 강조하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했음에도, 그의 어머니는 인근 마을에서 아이들의 초등교육이 중단되지 않도록 사제 몇 명에게 소년 학교 설립을 요청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이웃을 모아 시 낭독과 예술 토론을 열어 주는 방식으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헨리는 활력이 넘치고 진취적이었으며, 가족 구성원들을 ‘본당 신자들’ 삼아 ‘사제 놀이’를 즐겨 했는데, 이는 매우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대한 열정과 사제 생활에 대한 관심을 보여 준다. 경건함과 리더십에 대한 성향은 건강한 야망과 결합해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길을 열었고, 일정한 성숙으로 이끌었다. 로랑 나우웬이 기록한 아들의 그림자 측면은 주목할 만하며, 헨리의 약점을 엿보게 한다. 그의 강한 리더십은 동시에 그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이가 있을 때, 모욕이나 반대에 격렬한 분노와 돌발적 폭발로 반응했다. 부자 관계는 경쟁심으로 인해 긴장되었지만, 나중에는 『위로의 편지(A Letter of Consolation)』와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서 언급되듯 그 차이가 해소되었다. 포드의 평가에 따르면, 아버지가 애정을 표현하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헨리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소 거리감 있고 냉랭했다.


아버지의 말과 어머니의 말은 뚜렷이 다른 톤을 지니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해낼 수 있음을 보여라.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과 경쟁해라.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음을 보여라.”


이에 대조적으로 어머니의 권고는 다음과 같았다.


“이 생에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과의 연결을 잃지 마라. 유명해지는 것, 큰 자리를 맡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 마음 안에 예수님을 계속 모시고 그분의 빛을 잃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는 말로 드러나지 않은 경쟁, 우위를 차지하려는 조용한 투쟁, 어머니의 관심을 얻기 위한 숨겨진 춤과 그녀의 애정을 얻고자 하는 무의식적 시도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러한 양상은 나우웬 가정에서도 분명히 눈에 띄었다. 헨리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분명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실제의 아버지와 자신의 마음속에 형성된 ‘아버지상’을 구별하고 식별해 가는 과정¹이 필요했다. 『탕자의 귀향』에서 헨리 나우웬은 바로 이 현상에 대해 서술한다.


어머니와의 강한 유대, 그리고 그녀가 아들의 사제 소명 결정에 미친 영향은 그의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요약된다.

“내가 사제가 되기로 결정하는 데 있어—아니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어머니의 깊고도 지속적인 성체성사의 신심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삶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내가 내린 주요한 결정들 가운데 많은 것이, 여전히 나에게 보내 주고 있는 예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어 왔음을 깊이 자각하고 있다.”


엄마와 아들은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하며, 많은 것을 나누었다. 1978년 일흔두 살의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은 그의 삶에 큰 공백을 남겼다. 그녀의 사후에 이루어진 정화(카타르시스) 과정은 『소중한 추억 나의 어머니(In Memoriam)』에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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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웬은 열두 살에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에 의해 만류되었다. 그래서 그는 암스테르담 근처의 학교에 다녔다. 이후 나우웬 가족이 헤이그로 이주하면서 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알로이시우스 칼리지(Aloysius College)에서 학업을 마쳤다.


열여덟 살에 그는 아펠도른(Apeldoorn)의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의 학장은 유대–기독교의 대화에 헌신한 것으로 널리 알려지며 훗날 몬시뇰이 된 삼촌 툰이었다. 이어서 그는 드리베르헌(Driebergen) 근처 레이선부르흐(Rijsenburg)의 신학교(Major seminary)에서 철학 2년과 신학 4년의 통상 과정을 밟았는데, 이 프로그램은 위트레흐트 대교구(Archdiocese of Utrecht)의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가족적 배경 덕분에 그는 존경을 받았고, 반장이나 대표와 같은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친절했고, 효과적으로 연설을 수행하였으며,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한 지도교사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근면하고 기도에 힘쓰는 학생이었으며, 지적 능력은 독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매우 예리했다.


그가 학생 시절 추진했던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컬, ecumenical)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대담한 것이었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였으며, 자신감 있고 지적이었고, 소통에 있어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지적·영적 순수성을 강조하고, 간청과 승화의 훈련된 삶을 요구했던 신학교 양성과정의 영향은 초기 나우웬의 저술과 행적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는 1957년 7월 21일, 당시 위트레흐트 대교구장이었던 베르나르 알프링크(Bernard Alfrink)에 의해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Ⅱ. 계속되는 학업


<1957~1964년 네이메헌 대학교(Nijmegen University)에서 심리학 공부>


나우웬의 주교는 그가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Gregorian University)에서 신학 연구를 계속하기를 원했지만, 나우웬은 심리학이 신학, 특히 목회신학에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네덜란드 네이메헌에서 심리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그의 요청은 허락되었고, 그는 인간 발달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면서 목회적 관점에서 심리학 연구를 수행했다.


1957년 9월 헨리는 7년에 이르는 박사 연구를 위해 네이메헌 대학교(Nijmegen University)에 등록했다. 임상심리학(Clinical psychology)이 목회 돌봄(pastoral care)의 영역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나우웬은 심리학과 영성 사이의 공통 기반과 목표를 탐색하고자 했다. 같은 대학교의 법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매우 유명했던 삼촌 덕분에, 나우웬은 이미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네이메헌에서 나우웬은 강렬함과 열정으로 두드러졌다. 군종신부로서 느꼈던 거대한 감정을 서술한 기록에서 보이듯이, 그의 초기 성향은 분명 ‘상향 이동(upward mobility)’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뒤에 그는 가슴을 조이는 벨트가 마음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고, 점차 ‘하향 이동(downward mobility)’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는 종교심리학의 저명한 학자 한 포르트만(Han Fortman) 교수와의 만남, 고든 올포트의 저작 독서, 그리고 안톤 보이젠(Anton Boisen)에 대한 연구를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통찰과 영감을 얻는 것과 더불어, 나우웬은 일상의 거친 현실 속에서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경험하고자 했다. 그는 남(南)림뷔르흐(South Limburg)의 탄광 노동자들과 함께 일했고, 로테르담의 유니레버(Unilever)에서 근무했으며, 군대에서 군종신부로 봉사했고, 또한 네덜란드-아메리카 선사의 선박에서 선박 전담 사제로 방학 동안 일하기도 했다. 처음에 동료 심리학도들은 그가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고 오해했지만, 이후 그가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이메헌 대학교가 그의 논문에서 더 많은 통계적 증거와 과학적 평가를 요구하자, 나우웬은 ‘죄수복 같은 틀에 강제로 끼워 넣어지는 것’을 거부했고, 연구 성과로서 ‘도크토란두스(Doctorandus)’를 받았다. 이는 여전히 박사가 되어야 할 사람을 의미한다. 나우웬은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라기보다는 설교자에 더 가까웠는데, 그것은 그의 영적 갈망이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과학적 작업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인내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64~1966 미국 목회심리학과 임상목회교육>


그가 미국에 가고자 한 관심은 저명한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Gordon Allport)를 직접 만나 그의 지도 아래 하버드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보스턴의 쿠싱 추기경(Cardinal Cushing)의 소개로 만남이 성사되었고, 올포트는 나우웬에게 네이메헌에서의 학업을 먼저 마친 뒤, 미국 캔자스 주 토피카(Topeka)에 있는 메닝거 연구소의 ‘종교와 정신의학(Religion and Psychiatry)’ 프로그램에 등록할 것을 조언했다.

나우웬은 올포트의 조언을 따랐고, 1964년 메닝거 연구소(Menninger Institute)에 입학했는데, 이곳은 현대 목회심리학(pastoral psychology) 과 임상목회교육(clinical pastoral education)의 발원지였다. 그는 그곳에서 2년 동안 머물며 시워드 힐트너(Seward Hiltner)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Screenshot 2025-12-29 at 03.16.43.JPG 메닝거 연구소 시절


나우웬은 정신질환자를 “살아 있는 인간의 기록 (living human documents)”으로 보도록 가르쳤고, 네이메헌에서 이미 그의 저작을 읽었던 안톤 보이젠을 직접 만나기를 열망했다. 보이젠은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나우웬을 가까이에서 도전했고, 이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깊어졌다. 보이젠의 신 이해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가장 높은 가치가 내면화된 것”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그는 자신의 고통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전환한 인물이었다.


그 안에서 일어난 정치적 각성은 1965년 흑인 시민권을 위한 셀마(Selma)에서 몽고메리(Montgomery)까지의 마틴 루터 킹의 위대한 행진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나우웬의 시야는 외부 세계의 현실로까지 열렸다. 캔자스에서 그는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정서적으로는 청년기적 성향을 보였으며, 학문적으로도 성취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는 투쟁, 성장, 성공이 나란히 공존하고 있었다.




<1966~1968 노터데임 대학교에서 교수직 활동>


메닝거 연구소에서의 학업은 이후 나우웬의 삶을 위해 견고하고 적합한 토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본래 의도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모국의 종교교육 속에 심리학을 도입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심리학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하는 데 매우 더디고 회의적이었다. 안타깝게도 나우웬은 유럽에서 충분히 알려지지도, 널리 수용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임상심리학자이자 역동적인 연설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노터데임 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의 눈에 띄었고, 가톨릭 심리학자인 존 산타스(John Santas)와의 친분을 통해 노터데임 대학교 교수직을 제안받게 되었다.


나우웬은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노터데임에서 가르쳤다. 그는 그 곳에서 최초로 이상심리학(abnormal psychology)을 강의했으며,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심리학 교수들을 초청해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강의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영적 삶에도 깊이 참여했다. 학생들을 돌보는 사제들을 대상으로 비학점 강좌를 개설했고, 학생과 교수들과 함께 성찬례를 집전했으며, 상담도 제공했다. 노터데임에서의 이러한 활동—학생들이 심리학적 통찰을 신앙과 그 실천과 연결하도록 돕는 일—은 이후 그가 목회돌봄의 영역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는 전문적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안톤 T. 보이젠, 시워드 힐트너,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나우웬은 자신의 소명을 흐리게 만들고 있던 혼란스러운 문제들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가 켄터키 주 겟세마니의 시토회 수도원 ‘겟세마니의 성모 수도원’(Cistercian Monastery of Our Lady of Gethsemani)에서 훗날 제네시 수도원 원장(Abbot of Genesee)이 되는 존 유드스 밤버거(John Eudes Bamberger)를 만난 일은, 그에게 또 한 명의 훌륭한 친구이자 길잡이를 가져다주는 사건이었다.


나우웬은 종신 교수직을 위해 박사학위 논문을 요구한 학교 당국의 방침 때문에 노터데임 대학교를 떠났다.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의 장례 행렬에 참여한 사건은, 영적 관심과 사회적 관심을 동일하게 강렬하게 품고 있던 한 인간으로서의 나우웬의 면모를 엿보게 해 준다.



Ⅲ. 교수 활동과 명성 그리고 '상처입은 치유자'


<1968~1970년 다시 고향으로, 그리고 저작 활동>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나우웬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공동 목회연구소(Joint Pastoral Institute)에서 가르쳤으며, 동시에 위트레흐트 가톨릭 신학원(Catholic Theological Institute of Utrecht)에서 행동과학부의 책임자를 맡았다.


이 시기에 두 권의 저서, 『열린 손으로(With Open Hands)』와 『토머스 머튼: 관상적 비평가(Thomas Merton: Contemplative Critic)』가 출간되었는데, 이 책들은 원래 네덜란드어로 집필되었다. 나우웬은 목회적 적용 없이 심리학만을 가르치는 데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네이메헌 대학교에 신학 박사 과정으로 등록하여 자신의 심리학적 통찰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나우웬이 목회 사역 영역의 교육에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며, 또한 그의 관심의 초점이 심리학보다는 영성과 사목적 실천에 더 많이 놓여 있었음을 시사한다.


힐트너(Hiltner)의 정신(영성)을 따르면서 더욱 실천적 성격을 띠었던 나우웬의 박사 시기 연구는 사례 연구 스타일이었는데, 그의 지도교수는 그것이 충분히 신학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나우웬이 이를 다시 쓰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 번째 'Doctorandus' 학위를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여러 대학으로부터 명예학위(박사학위 포함)를 수여받았다. 이 시기 토머스 머튼, 마더 테레사, 장 바니에(Jean Vanier),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저작과 네덜란드 거장 화가들의 회화 작품은 나우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우웬은 네이메헌에서 교수 임명을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전기 작가 포드의 평가에 따르면 기대가 좌절되자 그 일을 그만두고 방 한 칸을 빌려 학생 신분으로 1년을 지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취약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내가 오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오지 않았고, 초대해 주리라 기대했던 친구들은 침묵했다. 주일 전례를 도와 달라고 부탁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동료 사제들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항상 혼자 일하고 싶어 했지만, 막상 혼자가 되었을 때는 일할 수 없었고 점점 음울해지고, 화를 내고, 심술궂고, 미워하고, 쓰라리고, 투덜대는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 해 동안 나는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나의 취약성을 깨달았다.”


나우웬은 목회심리학(pastoral psychology)의 전개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자신의 관심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 그는 미국의 발전상이 더 우호적이라고 판단했다. 이제 그는 흔적을 남길 것인가, 미국으로 갈 것인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1971~1981년 예일 신학대학원 그리고 명성>


Screenshot 2025-12-29 at 03.19.31.JPG 예일 신학대학원 시절


뉴헤이븐 코네티컷(New Haven, Connecticut)에 있는 예일 신학대학원( Yale Divinity School)의 콜린 윌리엄스(Colin Williams) 학장으로부터 강의 초청을 받으면서, 그의 결정 과정은 한결 수월해졌다. 처음에 그는 네덜란드 교회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이유로 공손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온 요청에는 긍정적으로 응답했는데, 다양한 교파에서 온 학생들의 역량과 건강한 구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조건을 제시한 뒤 이를 수락했고, 목회신학 강사로서 일을 시작했다.


1971년부터 1981년까지 약 10년 동안의 교수 생활 동안 그는 신비주의, 영성, 심리학, 목회심리학이라는 광범위한 영역 전체를 재검토했다. 그는 사역과 영성에 관한 강의를 수강하고 가르쳤다. 나우웬은 매우 성실하게 일했지만, 학계의 기업가적 분위기에 적응하며 좋은 경력을 쌓는 대신, 영감을 주는 일련의 저서들을 집필했다.


점차 나우웬은 분주한 삶에서 물러나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져 있던 감정, 갈망, 욕망, 문제들을 인식하고, 맞서고, 고백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7개월 동안 트라피스트 수도원(Trappist Monastery)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에게 1960–70년대의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쇄신, 즉 외적 쇄신이 개인의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내적 쇄신 없이 진행되는 것은 인류를 탈선시키는 일로 보였고, 그는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 하느님 및 타자와의 '친밀성', 그리고 사회정치적 참여 사이의 통일성을 탐색하고자 했다.



종교의 내면화에 대한 나우웬의 호소는 고향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온 관심이 ‘쟁점들’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기독교화와 세속화가 보다 균형 있게 진행되고 있던 미국에서는 그의 저서 『열린 손으로(With Open Hands)』가 큰 호응을 얻었다.


‘거의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지녔지만 거대한 공허’를 동시에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나우웬의 글은 숨을 불어넣는 것이었으며, 그의 성찰은 분명 다수의 사람들의 삶과 문제들과의 직접적 접촉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나우웬은 신학적 난제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신 이를 넓은 원을 그리듯 비켜가기를 선택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언제나 사물의 다른 측면을 바라보라고 제안했고, 삶의 그늘진 국면들 속에도 많은 빛나는 면들이 있으며, 빛과 어둠이 만나는 지점에서 하느님은 빛을 선택하셨다고 말했다. 이 빛은 모든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도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나우웬은 자신의 삶 또한 역사 일부이며 그 형성에 기여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따라서 세계의 선과 악은 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고독의 중심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1974년 나우웬은 예일 신학대학원에서 부교수로 종신 재직권(tenure)을 받았고, 같은 해 상충하는 관심사와 열망들 한가운데에서 뉴욕 주 피퍼드(Pfiffard)의 제네시 수도원(Abbey of the Genesee)에 몇 달간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이 강박적이고 안절부절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기도와 고독을 통해 어려운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해 학문적 삶에서 물러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마도 나는 하느님에 대해 말은 많이 했지만, 그분과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도에 관해 글을 쓰는 일이 나를 실제 기도 생활에서 멀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하느님의 사랑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염려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점차 하느님의 약속으로 해방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대에 사로잡힌 포로가 되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모든 것이 분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아프더라도 그 어려운 질문들이 나를 건드리도록 내버려 두어야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행동이 흘러나오는 ‘하나의 원천’, 곧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인정과 거부의 흐름 아래 놓인 ‘고요한 물줄기’, 그리고 삶이 닻을 내리는 ‘정지 지점(still point)’을 찾고자 했으며, 그 지점으로부터 희망과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길 원했다.


1974년 6월부터 12월까지 제네시 수도원 체류 동안 나우웬은 존 유드스 수도원장의 지도를 받으며 소중한 통찰을 얻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자신의 내면을 매우 직접적이고 친밀한 방식으로 대면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목적은 “삶의 어려운 질문들이 아프더라도 나를 건드리도록 허락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 『제네시 일기 :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온 보고 (The Genesee Diary : Report from a Trappist Monastery)』는 체류 기간 중의 흥미로운 사건들과, 그가 하는 모든 일과 계획 속에서 계속 드러나게 될 그의 삶의 거대한 변화를 서술한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나우웬은 예일에서 정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외유(excursions)’를 중시여겼다. 자주 여행을 다녔고, 다른 일을 하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 1976년 그는 미국 미네소타 주 컬리지빌(Collegeville)의 에큐메니컬 연구소(Ecumenical Institute)에서 펠로(fellow)로 활동하며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The Living Reminder)』을 집필했다.



나우웬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그의 저작들은 널리 인정받았으며, 1978년에는 『Pastoral Psychology』지에 의해 그해의 목회신학자로 선정되었다. 힐트너는 그의 한 ‘사례 연구’에 대해 이론과 실천의 건강한 결합을 높이 평가했다.


1978년 그는 북미대학(North American College)에서 상주 연구원으로 5개월 동안 로마에 머물렀고, 그 성찰은 『로마의 어릿광대(Clowning in Rome)』라는 책으로 형상화되었다. 이 책의 한 장인 「기도와 사유(Prayer and Thought)」는 가톨릭 언론 협회로부터 1979년 저널리즘 상을 받았는데, 여기에서 나우웬은 기도를 자기중심적 독백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대화로 묘사했다.




<1978년 어머니의 죽음과 제네시 체험>


1978년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나, 그는 마음을 움직이는 일들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중한 추억 나의 어머니(In Memoriam)』과 『위로의 편지(A Letter of Consolation)』가 그 근거이다.



나우웬은 바쁜 삶을 이어가면서도 ‘한 발 물러서기’를 잊지 않았고, 1979년에도 같은 수도원에서 다시 반 년을 보냈다. 이 시기에 쓴 기도문들은 이후 『긍휼을 구하는 기도(A Cry for Mercy)』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내적 명료성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Ⅳ. 하향 이동 (downward mobility)


<1981~1983 남미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대두는 나우웬의 관심을 중앙·남아메리카로 이끌었다. 헨리는 도전을 원했고 자신의 영성에 새로운 전망을 부여하고자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격동은 그에게 개인적 응답을 요구했고, 그는 라틴아메리카로 가기 위해 예일과의 공식적 결별을 결정했다. 그는 이미 1972년에 볼리비아에서 여름을 보내며 스페인어를 배운 바 있었다.


제네시 체험은 그에게 사역자의 삶이 기도에 기초해야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제 그는 가난한 이들 곁에서 사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기도의 삶과 사역의 삶 사이에 지극히 중요한 연결을 발견했다.


“기도의 고요한 친밀성 속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들판(campo)에서, 시장에서, 광장에서 또한 그분을 만나게 된다. …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보고, 서로에게 그분을 보이게 하는 것이 사역의 핵심이자 관상적 삶의 핵심이다.”


나우웬에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본질적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에서든 행위와 성찰, 투쟁과 예배의 이중성이 발견되는 곳이라면, 그는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1980년 그는 버지니아 신학대학원(Virginia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우웬은 1981년에 예일을 떠났는데, 명성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을 겪었고 도전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소명에 대해 더 큰 명확성을 얻고자 했다.


1981년 10월부터 1982년 3월까지 나우웬은 라틴아메리카에 머물며 자신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교사로 부름받았다고 생각했다. 먼저 그는 볼리비아 코차밤바(Cochabamba)의 메리놀 수도회 언어연구소(Institute de Idiomas of the Maryknoll Congregation)에서 3개월간 스페인어 과정을 수강했다. 그 후 페루 리마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3개월간 함께 생활했다. 리마의 해방신학의 창시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에 대해 나우웬은 깊은 존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은 그의 저술에서 발견된다. 나우웬의 글에서 점차 두드러지는 비판적 성격은, 이전에는 듣거나 읽기만 했던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직접 경험한 데서 크게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을 신비적 전통과 결합하는 그의 통찰은, 해방신학이 단순한 사회비판을 넘어 “유배 혹은 포로의 영성(spirituality of exile or captivity)”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주장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구티에레즈의 저서 『우리는 우리의 샘에서 마신다: 한 공동체의 영적 여정 (We Drink from Our Own Wells: the Spiritual Journey of a People)』의 서문에서 나우웬은 진정한 자유를 위한 투쟁의 본질적 요소로 개인적 우정, 정서적 관계, 쓸모없어 보이는 기도, 그리고 친밀한 기쁨을 제시한다.


나우웬의 소명에 대한 불확실성은 “열악한 환경 한가운데 모인 작은 공동체가 하느님의 현존을 축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는 비전”으로부터 솟구친 갑작스러운 희열 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The Road to Daybreak)』에서 고백했듯이,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기보다 자신의 영적 야심을 따르는 것이었음을 나중에 깨닫고 수정하게 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체류가 낳은 흥미로운 기여 가운데 하나는 ‘역(逆)선교(reverse mission)’—남(南)에서 북(北)으로의 움직임—라는 개념이다. 나우웬은 라틴아메리카의 무수한 순교자들이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가시화하며, 북반구 사람들의 스승이 된다고 느꼈다.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어졌으며, 우리의 삶을 쉼 없는 감사 행위로 만들라고 부르는 선물임을 마음과 정신으로 알도록” 북의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페루에 남지 않겠다는 그의 결정은 일정한 양가성도 보여 준다. 그는 위대한 이상과 꿈, 열망을 갖고 있지만, 근본적인 불안정성과 ‘진정한 부름’을 향한 지속적 탐색 때문에 그것을 오래 지속하기 어려운 면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라틴아메리카 체험 이후 나우웬은 비폭력적 영적 길의 힘을 더욱 강하게 옹호하게 된다. 기도에서 행동이 나온다고 보는 입장도 있고, 행동 속의 기도를 강조하는 입장도 있지만, 나우웬에게 그것은 근본적으로 기도의 우선성 문제였다.


1982년 3월 나우웬은 미국으로 돌아왔고, 그 사이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강의를 요청해왔다. 일부 친구들이 “가르침과 저술을 통해 그는 남반구에서보다 북반구에서 남반구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던 데 담긴 진실을 그 자신도 깨달았기 때문인지, 그는 이 명문 대학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6개월만 대학에 얽매이고, 나머지 기간은 집필, 광범위한 여행, 강연 등 다른 활동에 사용하기로 했다.


1983년 하반기 그는 한 달간 멕시코에 머문 뒤 니카라과와 온두라스를 방문했다. 1984년에는 남아메리카의 상황에 북미 사회의 관심을 환기하는 일련의 강연을 진행했다.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여정과 강연·학회 활동을 통해 나우웬은 중미의 억압적 체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83~1986년 프랑스 라르쉬(L’Arche) 공동체의 체험>


그 무렵 시카고에서의 침묵 피정(silent retreat) 동안 장 바니에와의 만남은 나우웬의 관심을 라르쉬(L’Arche) 공동체로 향하게 했다. 1983년 가을 그는 프랑스 파리 북쪽의 마을 트로즐리(Trosly)를 처음 방문했다. 라르쉬의 창립자 장 바니에와 토마 피리프의 영향이 컸다. 장 바니에는 나우웬이 ‘집이 없는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나우웬에게 강연이나 집필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나우웬에게 ‘집home’을 제안했고, 함께 시간을 “낭비해도 된다(waste some time)”고 말했다.


1984년 8월 말 나우웬은 과테말라에서 일주일 이상을 보냈다. 순교한 사제 스탠리 로더(Stanley Rother)의 열정적이고 용감한 사역과, 그 사명을 이어받은 친구 존 베지(John Vesey)의 활동을 목격한 체험은 『두려움을 이긴 사랑(Love in a Fearful Land: A Guatemala Story)』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었다.



이 책은 과테말라에서의 사건들을 단순히 기록한 것 이상이며, 나우웬은 여기에서 사역에 관한 자신의 성찰을 제시한다. 사역에서 중요한 요소는 “보냄받은 자리”에 실제로 함께 머무름으로써 신뢰를 형성하는 일이다. 때로는 거의 열매를 보지 못한 채 모든 역경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인내와 자기 비움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줌’ 자체가 약하고 ‘희망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역이 되기도 한다.


1984년 나우웬은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촛불을 켜는 것이 낫다’는 모토로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든 저자·단체·방송 제작자에게 수여되는 크리스토퍼 상(Christopher)을 받았다. 1984년 12월 그는 다시 트로즐리를 찾아 30일 피정을 했다. 그는 분주한 학문 활동 속에서 자신의 영적 삶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느꼈다.


“사제로 25년을 산 뒤, 나는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다소 고립되어 있었으며, 시급한 문제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내가 아주 어두운 곳에서 살고 있으며, ‘번아웃’이라는 말이 영적 죽음을 편리하게 심리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트로즐리 체류 이후 그는 이 공동체에 강하게 끌렸다. 이제 그의 내적 갈등은 하버드에 남을지, 라르쉬로 갈지의 문제로 구체화되었다. 나우웬은 두 가지 가능성을 보았다. ‘상향 이동(upward mobility)’과 ‘하향 이동(downward mobility)’이다. 그는 가르침을 사랑했고 많은 청중을 끌어모았지만, 하버드를 야심이 지배하는 장소로 인식했다. 그는 지적 토론에 머물고 싶지 않았고, 가르침을 영적 형성으로 향하게 하기를 원했다. 이 견해는 모든 동료들과 일치하지 않았고, 이는 나우웬으로 하여금 학계에 남아 있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끼게 했다. 그의 내적 투쟁은 1985년 봄 학기 이후 하버드 사임 결정을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로버트 더백(Robert Durback)이 소개한, 나우웬의 일기 『희망의 씨앗 Seeds of hope』에서 그의 고통이 엿보인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의 경쟁적이고 커리어 지향적인 삶을 떠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나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이렇게 크게 외치고 싶다. ‘하버드를 섬기지 말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고독·우울·영적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희망의 말을 건네라.’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야심에 묶여 있을 때 가난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므로 지금은 예언자의 역할을 할 때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더욱 주의 깊게 귀 기울일 때이다.”


나우웬은 하향 이동(downward mobility), 곧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가난한 이들, 특히 장애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완전성의 표징이었고, 우리 모두도 그 조건 아래 놓여 있다.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충성, 가까움, 그리고 실제적 현존이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상처 입음을 드러내며, 그들과의 진정한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 자신 또한 가난해져야 한다. 이러한 결정을 둘러싼 내적 투쟁과, 자신의 일생의 과업을 발견하는 기쁨은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The Road to Daybreak)』에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우웬은 자신의 소명이 재산이 없는 이들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이들—장애인들—과 함께 평생을 사는 것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1985년 8월부터 86년까지 그는 자신의 소명을 시험하기 위해 트로즐리로 옮겼다. 그 결정은 정말로 해방적이었다.


“떠나자마자 너무 큰 내적 자유, 기쁨,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올라서 이전의 삶을 내가 스스로를 가두어 놓았던 감옥처럼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우웬의 이 “어둠 속으로의 도약” 혹은 “돌아갈 다리를 불사르기”는 어리석음, 불안정, 경솔함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참된 소명을 향한 진지한 탐색이었다. 그는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 21장 18절)라는 말씀에서 영적 성숙의 길을 보고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Ⅴ. 마지막 정거장, 데이브레이크(Daybreak) 공동체에 정착, 그리고 죽음


<1986년 새로운 ‘부름’>


1985년 8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나우웬은 1년 전체를 트로즐리에서 보냈다. 일기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The Road to Daybreak)』은 그 기간 동안의 경험과, 그 결정이 그에게 어떻게 새로운 빛을 체험하게 했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그는 생산적(productive)이기보다 열매 맺는(fruitful)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살고 일하는 기쁨을 경험했다. 태도의 급진적 변화 속에서 그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이 우리의 영적 삶의 안내자, 치유자, 그리고 인간 영성의 진정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음을 배웠다. 학계는 나우웬에게 성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트로즐리에서 그는 이른바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이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줄 수 있음을 배웠다. 그들의 취약성과 정직함을 통해 그들은 우리의 사역자이자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분노에서 무조건적 사랑에 이르기까지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도록 강요한다. 이것이야말로 ‘생산성’이 아니라 ‘열매 맺음’을 지향하는 진정한 치유의 사역이다. 죽음조차도 성공·생산성·명성·중요성의 종말일 수는 있으나, 열매 맺음의 종말은 아니다.


1985년 10월 나우웬은 캐나다 토론토 인근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의 ‘데이브레이크(Daybreak)’ 공동체를 방문했다. 그해 12월 그곳에서 받은 한 통의 편지가 결정적이었다.


“우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와 함께 살 것을 고려해 주길 청합니다. 너에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고 진심으로 느낍니다. 동시에 데이브레이크 또한 너에게 좋은 곳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너의 중요한 소명인 글쓰기와 강연을 지지하고 싶고, 너를 사랑하며 성장을 요청하는 공동체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나우웬은 자신 안에서 새로운 ‘부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성급히 결정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과 상의했고, 자신의 주교의 승인을 받기 위해 고국으로 날아갔다. 그는 많이 기도했고, 주교의 축복을 받았을 때, 신앙공동체 안에서 살고 일하게 될 미래에 대해 큰 기대를 품었다.


고국 방문 중 나우웬은 조국의 번영과 세속화가 상당히 진행된 모습을 보고 놀람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하느님과만 함께 있을 내적·외적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그의 가족 일부를 포함해—친절하고 착하며 성품도 좋았지만, 너무 많은 것에 휘말려 산다는 점에서 산만한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데이브레이크’로 옮기기 전에 헨리 나우웬은 1986년 5월부터 6월까지 세계 순방을 했다. 그는 내적 일치와 평화를 찾는 일이 하루아침에 성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이 성장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해졌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지금 내가 스물아홉 살 때와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1986년 8월 나우웬은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의 사제가 되었다. 나우웬에게 데이브레이크는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이상화된 낙원은 아니었지만, 공동체 생활과 그곳 구성원들의 단순하고 진실한 사랑은 그에게 참된 ‘집’을 주었다. 불안정한 영혼이 기도와 고독을 영적 존재의 중심이자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의 진정한 연대의 토대로 발견했고,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공동체 안에 정착했다. 라르쉬(L’Arche)는 나우웬을 다시 기도의 삶으로, 무엇보다 예수와의 관계를 가꾸는 삶으로 불러냈다. 라르쉬가 요구한 단 한 가지는 고독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마음과 접촉을 유지하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많은 일을 성취하는 것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함께 나누는 것이 더 본질적이었다.


Screenshot 2025-12-29 at 03.21.28.JPG 데이브레이크 시절


나우웬은 점차 장애인의 세계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먹고, 놀고, 일하고, 배웠다. 데이브레이크는 영적 돌봄을 맡아 줄 사제를 맞이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공동체는 전례력에 따른 신앙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성경 이해를 넓히며, 기도 생활을 심화하는 영적 삶의 성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나우웬의 집필과 강연의 소명을 존중하고 지지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나우웬은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맑은 유리 성작에는 그의 말씀을 들으러 온 수천 명의 얼굴이 비쳤다….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러 올 뿐 아니라,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광휘의 현존 속에 머물기 위해 온다…. 그들은 그가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말씀’이 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온다.”


나우웬은 데이브레이크 안에 소규모 피정센터 ‘데이스프링(Dayspring)’을 설립했다. 이는 그곳에 사는 이들뿐 아니라 친구와 방문자들의 영적 쇄신을 돕기 위함이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수 모스텔러( Sue Mosteller) 수녀는, 나우웬의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자유롭고 개방적이었으며 로마 가톨릭 전통의 울타리를 넘어 보았다. 그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복잡하고 고통스럽고 힘들면서도 동시에 놀랍고 은혜로운 일이었다.


나우웬은 여섯 명의 장애인과 함께 사는 집에 머물렀고, 간질 발작을 겪고 말을 할 수 없으며 좀처럼 웃지 않는 스물다섯 살의 아담(Adam) 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우웬은 아담 안에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고, 아담은 그의 스승이자 친구가 되었다.



아담을 돌보면서 나우웬은 성취와 무관하게 존재 그 자체의 가치에 눈뜨게 되었다. 장애인들과의 삶과 노동 속에서 그는 자기 안의 가장 깊은 ‘장애’를 발견했다. 전기 작가 크리스토퍼 드 빈크(Christopher de Vinck)는 이 관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담을 사랑하는 법을, 실제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아담을 돌보는 가운데 광야의 수도자들이 긴 수련 끝에 겨우 얻는 겸손과 비움을 배웠다. 아담을 돌보는 시간은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관상의 시간이 되었다.”


데이브레이크에서 나우웬은 노동과 집필 사이의 균형을 찾고자 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그는 다시 불안정해졌다. 그의 책들이 명성을 얻으면서 강연, 회의, 세미나 요청이 쇄도했고, ‘편지를 통한 사역’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을 찾았음에도 그의 내적 투쟁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어떤 친구나 공동체도 채워 줄 수 없는 친밀성에 대한 갈망(longing for an intimacy)이 그 안에 있었다.




<1988~1996 탕자의 귀향>


1988년 그는 한 가까운 우정 관계의 붕괴로 정서적 붕괴를 경험했고,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The Inner Voice of Love)』에서 이 사건을 언급한다.



갑작스러운 단절은 깊은 위기와 우울로 이어졌고, 그는 심리치료뿐 아니라 정서적·영적 지지가 필요했다. 캐나다 위니펙(Winnipeg)의 한 공동체에서 그는 신체적으로 안아 주고 돌봐 주는 깊은 보살핌을 통해 회복을 경험했다. 나우웬은 불안감 속에 데이브레이크로 돌아왔지만, 점차 화해와 강한 영적·정서적 성숙에 이르렀다.


“영적 암흑의 밤을 통과한 이들에게 흔히 그러하듯, 나우웬은 더 깊어진 통찰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자아 정체성을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만 근거 두는 것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되었고, 그의 전체 사역의 어조도 미묘하게 변화했다.”


나우웬은 서서히 영적 성인으로 성장했다. 1989년 트럭 사고로 죽음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동료들에게 용서를 구했고 이렇게 썼다.


“이 말을 하면서 나는 군에서 대위 계급의 군종신부로 있을 때 착용했던 넓은 가죽 허리띠를 벗어던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띠는 허리만이 아니라 가슴과 어깨를 가로질러 메어져 있었다. 그것은 내게 명성과 권력을 주었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각자의 자리에 묶어 두도록 나를 부추겼다. 비록 군에 있었던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이 띠를 완전히 벗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띠에 사로잡힌 채로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무력하게, 띠 없이, 판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죽어야만 했다.”


헨리는 모든 인간관계와 친구들과의 평화를 이루었고, 하느님 한 분께만 신뢰를 두는 새로운 신앙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데이브레이크에서의 세월은 자기 성취와 저술의 관점에서 매우 열매 맺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여러 권의 영감을 주는 책들이 집필되었고, 이는 그의 명성을 더욱 널리 알렸다. 1993년 그는 우크라이나의 장애인 공동체를 방문하여 연대와 격려의 뜻을 표현했다.


뵈머(Beumer)와 포드(Ford)는 나우웬의 개인적 투쟁이 그를 특별한 주제, 즉 몸의 영성에 이르게 했다고 보았다. 더 오랜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이는 심화 연구의 주제가 되었을 것이며 한 권의 책으로도 발전했을 것이다. 아담을 돌보는 가운데 그는 촉감의 신성함을 발견했고, 서서히 몸의 언어를 배워 갔다. 뵈머는 나우웬의 끊임없는 탐색을 그의 소명을 향한 진지한 추구, 곧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는 과정으로 본다. 결국 소명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내적 성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위대한 발견은 『탕자의 귀향(Return of the Prodigal Son)』에서 아름답게 서술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태도의 분명한 전환을 본다. 바깥에서 하느님을 찾던 시선이 내면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시선으로 바뀌고, 봉사하는 자리에서 돌봄을 받는 자리로 이동한다. 그의 영적 성장의 길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삶을 통과해 결국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을 포함했다. 그것은 투쟁의 삶이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 속에서 승리로 이끌렸고 마침내 기쁨과 평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1986년부터 1996년까지 나우웬은 계속해서 하느님을 찾았고, 신학적 공식들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 했다. 그는 하느님을 “숨겨져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의 삶 속에 현존하며, 살아 있는 실재로서 특히 인간성 안에서 가장 밝게 드러나는 분”으로 이해했다. 성체성사에 대한 충실함과 글쓰기에 대한 충성은 그의 삶의 표지였다. 글쓰기는 그에게 어둠 속의 은총이자 구원의 형식이었다.


그는 단순했고, 전염성 있게 사람을 끌어당겼으며, 확신에 있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연과 그림을 영적인 눈으로 보았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그의 내적 어두움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고통스러운 내적 여정은, 그가 이 위대한 인물들을 크게 존경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회화「탕자의 귀향」에서 자신의 삶의 요약을 발견했다.


Screenshot 2025-12-29 at 03.00.14.JPG 램브란트, 탕자의 귀향


그는 ‘아버지 됨’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귀향의 진실임을 깨달았다. 렘브란트는 나우웬이 자신의 성숙 과정과 하느님의 정체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도왔다. 렘브란트는 나우웬의 여정을 가장자리의 어둠에서 그림 중앙의 빛으로, 곧 하느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인도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했으며, 짐을 덜고자 찾아오는 이들에게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다.


장애인 '아담'과의 관계는 타인에게 이끌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었고, 수동성과 하느님께 의탁하는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이 수동성의 영성은 공중 그네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고, 그는 ‘트라피즈의 영성’을 발전시켰다. 나우웬이 배운 영적 비밀은, 핵심 기술이 날아오르는 사람(flyer)보다 붙잡는 사람(catcher)에게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하느님을 능숙한 포착자로 신뢰하게 했고, 사역과 영적 삶 모두에서 ‘붙잡아 주시는 분’을 신뢰하는 새로운 영성의 관점을 형성하게 했다.


1995년 9월부터 1996년 9월까지는 다시 안식년이었지만, 헨리는 집필과 자신의 소중한 프로젝트—저서 『탕자의 귀향』을 영상으로 제작하는 일—준비에 몰두했다. 원작이 소장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hermitage)에서 촬영팀에 합류할 예정이었고, 일정은 1996년 9월 17일부터 24일까지로 잡혀 있었다.


한편 그는 데이브레이크의 새 사제 부임을 기다리며, 일상 예배와 피정, 기도를 위한 센터인 ‘데이스프링(Dayspring)’에 더 집중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단계를 계획하고 있었다.





<1996년 죽음, 가장 큰 선물>


9월 15일 암스테르담으로 떠난 그는 갑자기 병을 얻었다. 심장 상태가 나빴고 치료 후 호전되는 듯 보였다. 모두가 다시 일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1996년 9월 21일 토요일 새벽 또 한 번의 큰 발작을 일으켜, 생명을 구하려 애쓰던 의료진과 함께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친구들 곁에서 죽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93세의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 곁에서 기도를 바쳤다. 헨리는 히베르쉼(Hiwersum)의 한 장례식장에 안치되었다.


9월 24일 화요일 가족과 지인을 위한 문상 예식이 있었고, 저녁에는 위트레흐트의 성 카트리나(St. Catherine) 대성당에서 또 한 번의 문상이 거행되었다. 그의 관은 39년 전 사제 서품 때 엎드렸던 바로 그 계단 위에 놓였다. 다음 날 거행된 성찬례에서 헨리는 마지막 배웅을 받았다. 대주교 아드리아누스 시모니스( Adrianus Cardinal Simonis)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했고, 장 바니에는 나우웬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묘사하며 고무적인 묵상을 전했다. 관을 둘러싼 해바라기는 상징적이었다. 늘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나우웬을 떠올리게 했고, 빈센트 반 고흐를 사랑했던 그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작별의 몸짓이었다.


가족의 결정과 그의 유언에 따라, 나우웬의 유해는 9월 28일 토요일 토론토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로 옮겨져 장례미사와 매장을 거행하게 되었다. 위트레흐트에서의 장례미사 자리에서 동생 폴이 전한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너를 곁에 두고 싶었고, 게이스터런(Geysteren)의 고요한 숲과 마스(Maas)강의 잔물결 가까이에, 아버지 곁에 너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우리 모두는, 마흔 해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너는 또 다른 여정을 떠난다.”



Screenshot 2025-12-29 at 03.50.07.JPG 서커스의 축제 분위기


디어드르 라 누(Deirdre La Noue)는 장례 관련 기록들을 검토한 뒤, 토론토에서 나우웬에게 이루어진 작별 인사를 아름답게 묘사한다.


“이별할 때의 날씨는 부슬비가 내려 우울했지만, 변모의 대성당 안의 분위기는 축제에 가까웠다. 나우웬의 관은 데이브레이크의 목공소 ‘우더리(Woodery)’에서 만든 소박한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많은 장애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색색의 그림을 그렸고, 데이브레이크의 한 예술가가 그 그림들을 관 뚜껑에 옮겨 그렸다. 미사 동안 노래가 기타, 플루트, 바이올린의 반주에 맞추어 불렸고, 공동체의 배우들이 복음 봉독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무용수들도 까치발로, 어떤 이들은 휠체어에서조차 하느님께 찬양을 표현했다. 수십 명의 어린이가 들고 들어온 해바라기와 붓꽃이 제대와 그의 관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 참석자는 그것이 거의 서커스의 축제 분위기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헨리는 데이브레이크 근처의 성심 묘지(Sacred Heart Cemetery)에 안장되었는데, 그곳은 그가 ‘집’이라 부르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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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가 단순하면서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의 내면 감정에 직접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심리학 지식,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 경험에 대한 접근 능력은 그로 하여금 진짜 문제를 식별하고 그것을 단순하게 표현하도록 도왔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사랑받는다고 믿었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다.


그의 삶의 은총과 투쟁은 얽혀 있었다. 혼란스러운 정서생활, 불안과 두려움은 동시에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거대한 이해와 연민의 선물이 되었다. 그가 즐겨 반복한 주제들은, 그가 너무 깊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믿기도 하면서 동시에 믿기 어려웠던—가 있었다는 증거다. 그것은 끊임없는 여정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엿보고 잃어버리길 반복했고, 항상 새로운 이미지들을 찾았다. '부서져 나누어지는 빵, 텅 빈 교회, 벌린 두 손, 익살스러운 어릿광대, 서커스, 거울, 춤, 귀향' 등과 같은 이미지들이다.


데이브레이크에서의 삶은 그가 사제, 친구, 작가, 강연자, 멘토로서 가장 깊이 충만해지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에 ‘예’라고 말하고,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살며, 약한 이들을 돌보고, 내 삶이 열매 맺을 것임을 신뢰한다.”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나우웬을 하나의 축복으로 기억한다. 그는 <산상수훈>의 영성, 특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라르쉬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영성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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