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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은 Apr 06. 2021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라깡을 공부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유명한 명제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무엇이 좋은 집이고, 무엇이 좋은 직장이고, 어떤 인생이 좋은 인생인지를, 우리는 안다. 그것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인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인생인지와는 별개로, 일반적인 사람들이 욕망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쫓으며 살아간다.



이미 설계되어 있는 욕망, 내 것이 아닌 (대)타자가 제시하는 욕망을 우리는 마치 나의 것인 양 믿으며 계속해서 환유의 삶 속을 빙빙 돌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명제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면, 이 명제를 통해 인간의 성충동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유아기의 성충동이란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표지되는 것을 말하는데, 성충동이 생겨나는 과정에도 바로 이 어머니라는 타자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 어머니를 우리는 상징적 아버지, 상징계의 대타자가 도래하기 이전의 모성적 대타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보편적인 욕망 뿐만 아니라, 매우 개별적이고 억압되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신경증자들의 근본환상을 구성하는 충동의 장소 역시도, 타자가 개입하게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이 어째서 타자의 욕망인지가 아니라,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세미나7에서 논의되고 있는 승화, 억압없는 충동의 만족, 세미나 7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산물을 큰사물의 위치까지 격상시키는 것과 연결시켜 이 명제를 사유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게 된 것은 이 부분에 대한 꺅텔을 진행하다가 불현듯 던월이라는 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여 내용에 앞서 영화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해보려 한다. (내용에 대한 스포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 공원에는 아무도 암벽 등반을 시도하지 않은 암벽이 있다. 가장 먼저 새벽 빛이 닿는 곳이라 하여 '던 월'이라는 이름이 붙는 곳이다.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부위가 없어 암벽등반을 할 수 없는 곳으로 유명해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이 곳을, 토미 콜드웰이라는 암벽 등반가가 도전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토미 콜드웰은 어린 시절부터 암벽 등반으로 유명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왼손 검지 손가락을 잃고 만다.(그의 개인사에 더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기에서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다.) 암벽 등반을 할 때에는 돌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검지 손가락이 매우 중요한데, 토미 콜드웰은 그것을 잃은 것이다. 검지 손가락을 잃었으니 이제 암벽 등반은 불가능하다고 의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말했지만, 그는 다른 손가락의 힘을 키우고 신체를 단련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여 다시 암벽 등반에 도전한다.


그러던 중 부인과 이혼하게 되는 시련을 또 한 번 겪게 되는데, 이 심리적 고통을 잊기 위해 던월을 등반하기로 마음을 먹고 몇 년에 걸쳐 여러 우여곡절 끝에 파트너와 함께 성공한다는 게 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욕망의 차원에서 분석해 보자면 이렇다.


먼저 최초의 욕망이 촉발되는 시점에 타자가 있었다. 이 암벽 등반은 말도, 발육도 늦었던 어린 아이를 강하게 키우고자 했던 아버지에 의해 시작된 일이었고 이후 이것은 타자들에게 토미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중 16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참가하게 된 경기에서 우승을 하게 되면서 토미는 본격적으로 암벽 등반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까지는 흔히 말하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명제를 잘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그저 수많은 암벽 등반가들 중 한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그가 다른 이들과 달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몇 가지 다양한 삶의 사건들이 있긴 했지만, 그 사건들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선택한 길이 바로 암벽 등반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토미 콜드웰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을 반복하는 지점을 벗어나는 순간을 분리해 내고, 거기에 주목을 해보려 한다.




타자의 욕망을 타자들로부터 지켜야 한다.


토미와 그 동료 케빈 조거슨이 던월을 등반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가족과 몇몇 지인들 외에는 딱히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다 점차 매니아들이 그 국립공원의 절벽 밑에 모여 두 사람의 행보를 구경하고 응원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미국 미디어와 전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요세미티 국립 공원에 모여 그들이 등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언론사에서 실시간으로 생중계를 하기도 하는 등 그들이 하는 이상한 짓에 타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케빈이 어느 한 구간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게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케빈을 두고 혼자서 그 구간을 지나 등반을 지속하던 토미가 별안간 더 이상 진전을 하지 않고 케빈이 그 구간을 넘어설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포기하고 토미의 등반을 돕기로 결정한 줄 알았던 케빈이 다시 도전을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은 케빈이 토미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론이 그러한 보도를 했으며, 케빈의 마음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목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토미가 다시 한 번 내린 결정은 타자들과의 단절이었다. 휴대폰을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린 것이다. 이후부터 그들은 타자들의 시선, 목소리,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욕망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장면으로 구분지어 보자면 토미가 휴대폰을 버리는 장면, 그 실제 사건은, 그들의 욕망이 뻔한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승화의 지점으로 들어서게 된 순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들의 도전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은 완전히 타자로부터 단절되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개별적이고도 고유한 욕망을 추구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아마도 문명 내에서 억압없는 충동의 만족이, 승화가 실현된다면 바로 이러한 형태이리라.


우리의 욕망은 대타자가 용인한 범위 내에서 제시된 선택지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음악이 되었건, 미술이 되었건, 게임 개발자가 되었건, 축구 선수가 되었건, 간호사가 되었건, 정신분석가가 되었건 말이다. 그 기표들이 이미 우리 사회 내에, 이 문명 내에 용인되어 있고 하나의 욕망으로 자리잡은 뒤에야 우리는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한 상징계 내부의 욕망에는 아주 적은 양의 쾌락만이 있을 뿐이라고 라깡은 이야기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더 큰 쾌락으로 나아가는 길, 즉 승화가 가능하다고도 이야기를 한다. 승화란 사회적으로 용인된 범위 내에서 우회된 충동을 억압없이 향유하고 만족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얼핏 사회적으로 용인된 욕망을 추구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라깡이 이야기하는, 특히 세미나7에서 말하는 승화는 조금 다르다.


라깡에게 있어서 승화란, 그렇게 대타자에 의해 셈해진 대상, 상징계 내에 진입해도 좋다고 허가된 대상으로서의 산물을 다시 큰사물, 주이상스의 영역으로 격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산물 → 큰사물)



라깡이 승화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것은 성냥갑의 일화이다. 잠시 소개를 해보자면 이렇다. 똑같은 성냥갑이 장식처럼 매우 많이 쌓여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을 성냥갑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이질적이고 기이한 것으로 보게 되는데, 그러한 일상성의 파괴까지 밀고 가는 것이 바로 승화이다. (일상적으로는 똑같은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해 말하다 보면 그 단어의 뜻이 와닿지 않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경험으로도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대상이 지닌 의미와 속성, 기능이 사라지고 텅 빈 껍데기만 남기는 것. 욕망의 차원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라깡은 말한다. 영화 속, 아니 실제 인물인 토미 콜드웰이 실제로 추구했던 욕망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지닌 욕망은 타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충동의 영역에서건, 욕망의 영역에서건 말이다. 우리 모두는 타자의 욕망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타자의 욕망을 타자로부터 지켜내야 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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