꺅텔을 진행하면서 무의식은 선험적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의외로 의견이 분분하여 몇 자 적어보았다. 먼저 라깡의 세미나 11에서 바라보는 무의식은 선험적이지 않다. 이 시기 라깡이 바라보는 무의식이란, 언어와같이 구조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극, 균열, 공백으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대상에 관계없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우리의 경험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무의식이 선험적이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 내면에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이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의식 너머에 먼저 '존재하고 있어야만' 하고,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 억압되어 있는 무엇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무의식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세미나 11에서 이야기하는 무의식이란, 원인인 동시에 간극이자 균열이자 말실수의 지점이다. 이를 달리 이야기하자면 의식이 발을 헛디디는 지점으로, 의식을 지배하는 담론, 즉 대타자가 정지하는 순간을 말한다.
이러한 대타자는 우리가 사유하고 의식하는 주체로 구성되기 이전에 우리를 이미 포획한다. 언어를 배우고 부성적 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 사유하기 이전에 사유하는 틀을 부여받고 각인받게 된다는 말이다. 달리 이야기해보자면 부성적 법의 세계, 대타자의 장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의식적인 사유가 가능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를 셈하기 전에 우리는 세계를 셈하는 논리에 셈해진 자들이며, 말하기 이전에 대타자의 언어로 말해진 존재들이며(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말이란 타자의 말의 반복일 뿐이다), 사유하기 전에 이미 사유된 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언어, 그것도 중립적이고 아무런 권력도 쥐지 않은 언어가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통용되는 권력의 언어이다. 그리고 무의식이란, 그렇게 주체가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언어에 포획되어 타자의 말을 반복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빈 종이에 원을 그리면 원의 내부와 외부가 동시에 생겨나듯, 언어가 우리를 포획하는 순간 포획된 부분과 포획되지 않은 부분이 동시에 생겨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정리를 해보자면 이렇다. 무의식이란 우리의 의식 세계 이전에 미리 주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무의식이란 개별적이고 고유하며 언어에 포획되지 않는 것인 동시에 실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엇이다. 이러한 무의식을 억압하기 위해 언어가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개입하여 억압을 함으로써 무의식이 만들어진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 같겠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무의식이 먼저 있고 그것을 언어가 억압하는 것이라면, 무의식은 실체를 가지게 된다. 무의식이 실체를 가지게 되면 우리 내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찾아낼 수 있는 대상으로 가정되어 버리지만, 라깡이 바라보는 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무의식에는 실체가 없고 알아볼 수 없으며, 오직 균열과 간극으로서만, 배운 대로 말하는 우리의 언어가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순간, 내가 왜 이러한 지 설명이 되지 않는 지점에서 잠시 드러나는 방식으로 사라지는 개념일 뿐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근거의 뒤집힌 형태로, 이전 세미나3에서 규정한 무의식의 정의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명제를 살펴본다면 무의식은 선험적이 된다. 세미나11 에서 균열, 간극으로 규정한 무의식이 아닌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 무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무의식이란 의식적인 활동 이전에 유입되고 각인된 타자의 언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주 단적인 예로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와 외국어를 할 때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의식적으로 사고하지 않아도, 문법을 고민하지 않아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한국말을 내뱉는다. 반면 모국어가 아닌 제2외국어를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매우 느리고 많은 고민을 하면서 발화한다. 단어의 뜻을 생각하고, 시제와 주어에 맞춰 동사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 지를 '의식적으로' 고민하면서 말을 내뱉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어가 내가 지니고 있던 고유의 언어인가, 이 한국어가 정말 나의 언어인가를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한국어 역시 먼저 존재하고 있던 타자의 언어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 타자의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습득한다. 그리고 한국어를 비롯한 모든 언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무고하지 않다. 모든 언어는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어떤 언어가 되었든 우리가 최초의 언어를 습득할 때에는 동시에 그 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이 따라 들어올 수밖에 없다.
결국 무의식이 선험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 건 중요하지 않다. 무의식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론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주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라깡을 공부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