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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은 Aug 20. 2020

자살과 타살의 문제에 대하여


현재 진행 중인 꺅텔 중 하나에서, 이런 논의가 이어졌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고, 쉽사리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라 여운이 깊게 남는 주제였기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다.


8월의 어느 날,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중 하나는 자살에 관한 것이었다.


한 분이 "자살이란 결국 타자를 향한 공격성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됨으로써 자살을 하게 되는 것 같다"라고 말을 하셨고, 그러자 다른 한 분이 이어서 이런 말을 하셨다.

"그런데 결국 타살인 거 아닌가요?"

"아, 그러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논의는 여기까지만 진전된 채로 다음 주제를 향해 나아갔다.


꺅텔에 모인 사람들이 어느 정도 라깡의 이론에 대해 알고 있으니 가능한 대화였으리라.


하지만 자살이 타살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수긍하는 이 보다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기에, 먼저 자살이 어째서 타살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보도록 하자.


참고로 모든 자살하는 이들을 이렇게 설명해볼 수 없으리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자살의 이유나 형태 등은 매우 다양할 테고 당연하게도 자살로 마무리된 한 인간의 개인사를 이와 같은 설명으로 일축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안다. 다만,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는 이 꺅텔이라는 모임에서 흥미로운 관점이 제시되었기에 이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인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 글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자끄 라깡의 이론에 의한다면, 우리가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는 '자아'라는 것은 결국 타자의 산물이자, 현실 세계 내의 고정되어 있는 좌표이자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흔히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면 우리는 이름을 말하고, 나이, 직업, 출신 학교 등등에 말한다. 나의 성격은 어떠하며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고 취미는 이거라고.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MBTI를 통해 자기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직업, 출신 학교 등등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타자의 산물임을 잘 알 수 있을 테고, 이름 역시 본래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니, 누군가가 지어준 것인 동시에 대한민국 내에서 통용되는 이름들은 완전히 새로울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김나르빌헬란마 뭐 이런 이름을 자식에게 지어주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여기에도 한국 이름이라는, 한국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요코라는 이름을 보면 일본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직감할 수 있듯이. 더군다나 이 이름 하나에 나의 모든 것이 대변되지도 않고 말이다.


성격이라는 것에는 타고나는 것 아니냐 이게 왜 타자의 산물인 것이냐는 반박이 가해질 수 있는데, 이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예민함'이라는 기표가 따라붙는다고 생각해보자. 예민하다는 것은 남들보다 냄새와 같은 각각이 민감할 수 있고, 남들보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함을 의미할 수도 있고 그 외에 다양한 곳에 쓰일 수 있는 기표이다. 그런데 뭐가 되었든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들보다'이다. 나와 비교할 수 있는 남들, 타자가 없으면 내가 예민한 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즉 예민함, 활달함, 조용함, 내성적임 등등 성격을 묘사하는 표현에는 남들보다, 정상 범위보다, 평균치보다 그러하냐 아니냐의 기준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들은 한 개인의 고유함을 짓밟고 그 단어 속으로, 그 기표 속으로 개개인을 속박시켜버리고 만다. 그 단어로 나를 설명하는 순간 나만의 고유한 개별성은 배제되어 버리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타자들의 모임으로 분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MBTI 또한 강력한 타자의 산물이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규정 속에 주체성이란 없다.


위와 같은 논점에서,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는 것, 자아란 타자가 만들고 규정해 놓은 속성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으며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비추어 본 나의 모습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란 주체가 아닌 타자라는 명제가 도출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위에 나온 자살을 타살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발화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를 좀 더 세밀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 구분할 필요성이 제시된다. '자아'로서의 '나'가 '자아'로서의 '나'를 살해한다면 그것은 자살이 될 것이요, 자아가 아닌 '주체'로서의 '나'가 '자아'로서의 '나'를 살해한다면 그것은 타살이 될 것이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자면 논의가 늘어질 수 있으니 간략하게 주체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이렇다. 

'자아 = 타자'라는 명제까지 다다랐다면, 그렇다면 주체란 무엇인가? 흔히 라깡에 대해 조금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분열된 주체' 내지는 '빗금 쳐진 주체'라는 단어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된 주체를 의미하며, 상징계, 대타자, 언어가 쳐 놓은 빗금-억압의 기능을 하는 빗금-에 완전히 포획된 부분과 포획할 수 없이 빠져 나가는 부분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상징계, 대타자, 언어는 주체를 완전히 포획할 수 없다는 점, 포획되지 않고 빠져나가는 지점이 반드시 발생한다는 점이다. 항상 균열의 지점이 발생하고 설명이 되지 않는 지점이 출현하게 되며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겪게 된다. 나는 나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설명하고 있지만 말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발화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들이 발생하게 되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게 발화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들, 설명이 되지 않는 지점들,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주체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왜 주체의 장소가 되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내뱉은 말, 발화된 말들은 결국 타자의 언어로 설명된 나, 즉 자아에 불과하기에 이 상대항으로서 타자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주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답이 되리라.


이 주체의 장소를 다시 한번 환유하자면 이곳이 바로 무의식의 장소가 된다고 규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무의식이란 것이 어떤 실체로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라깡이 세미나 11에서 규정하는 무의식이란 균열, 말실수, 상징계의 회로가 정지하는 지점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자 박동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를 한 번 더 재정의해 보자면 무의식이란, 주체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장소, 공백이라는 발화 또한 가능해진다.



우리 인간 신경증자들은 이 공백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에, 다시금 타자들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는 우울과 불안의 증상들이 찾아왔을 때 이것들을 제거해 달라고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사에게, 멘토에게 요청하면서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를 일상으로 끌어당기는 대타자, 팔루스의 중력장은 매우 강력하기에 우리는 어느샌가 타자들 속에 섞여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이 있으니, 바로 자살이란 이렇게 공백에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자아로 대변될 수 있는 의식으로 인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일상성과 남들과도 같은 삶에 대한 환멸을 느낀 '주체'들. 나에게만 찾아온 듯한 기이한 균열, 공백, 증상에 먹혀버려 자신이 살고 있던 영토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


물론 자살의 이유는 다양하기에 이렇게 일원화하여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이 날 논의된 내용에 따라 정리를 해보자면 이런 과정이 도출될 수 있겠다.


자살하는 이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도,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자살은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할 뿐.

하지만 그럼에도 타자들에게 완전히 먹혀 버리지도 나에게 일어난 균열에 완전히 먹혀버리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의 길은 있다. 정신분석이란 이렇게 개별적인 제3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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