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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은 Aug 15. 2020

파문에 대하여

20200815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꺅텔Cartel은 라깡 세미나11에 대한 강해서인 라깡의 정치학을 읽고 쓰는 모임이다. 라깡의 세미나 11은 파리 정신분석 협회로부터 파문 당한 뒤로 파리 8대학에서 이어나간 세미나를 엮은 책으로, 라깡의 이론에 있어서 굉장이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래 이어지는 글은, 세미나 11을 강해한 책의 프롤로그 부분에 대해 읽으면서 작성한, 일종의 발제문이다. 꺅텔을 진행하는 나는 발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꺅텔이 원활이 진행될 수 있도록, 기표가 순환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해보지도 않은 것을 타인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모순되다고 느껴 종종 발제문을 작성할 계획이다.




파문破門을 당하고, 파문波紋을 일으키다

파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깨뜨릴 파와 문 문이라는 한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였다. 직역하자면 문을 깨트린다는 뜻이 될 터이지만, 국어 사전에 표기된 바에 의하면 ‘사제의 의리를 끊고 문하에서 내쫓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동음이의어인 또 다른 파문(波紋)은 수면에 이르는 물결 내지는 어떤 일이 다른 데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라깡의 파문에는 이 두 가지 동음이의어가 함께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파문破門

파문, 문을 깨뜨리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쉽게 열 수 있는 문이라면 굳이 깨뜨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열 수 없도록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내부와 외부를 가를 때, 밖으로 나가거나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할 수 있는 행위가 문을 깨부수는 것이다. 

외부로 통할 길이 없던, 문이 잠겨 폐쇄되어 있는 내부의 세계에서 파, 문을 함으로써 – 즉 문을 깨뜨림으로써 – 문을 뚫고 외부로 나가는 행위. 내부의 문에 균열을 일으켜 외부와 잠시나마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행위로서의 파문. 이러한 유한성의 빗장을 깨뜨리는 파문의 실천을 통해서 라깡은 유한성에서 무한성에로의 개방을 실천했다. 

이런 의미에서 라깡의 파문은 ‘당하게’ 되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능동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두 번째 파문波紋

라깡이 매번의 세미나에서 던진 기표는 수면 위에 물결을 일으키듯, 국제정신분석학회와 프랑스정신분석학회의 매끈한 표면 위에 일렁이는 파동을 만들었다. 하나의 기표가 만들어 낸 파동이 가라앉을 새 없이, 다음 기표를, 다른 기표를 던져 끊임 없는 물결 무늬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라깡이 만들어 낸 파동은 그 표면 위에 맺힌 상을 일렁이고 일그러지게 만들고 또한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파문을 일으켰다는 표현은 또한 라깡에게 수식이 가능하다. 


꺅텔, 탈사회적 주체들의 모임

프롤로그에도 나와 있듯이, 라깡의 사위이자 제자인 자크 알랭 밀레는 정신분석가들의 공동체를 탈사회적 주체들의 결사체라고 언급한 바 있다(10p). 동일한 의미를 가진 기표를 공유하는 공동체로부터 스스로를 이탈시키고, 일원화된 의미화에서 벗어난 자들 즉 팔루스의 영토에서 벗어난 자들의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꺅텔 또한 정신분석가들의 공동체처럼, 탈사회적 주체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꺅텔에 온 이들 중에는 정신분석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지닌 사람도 있겠지만, 이외에 라깡의 기표에 매혹되어 여태까지 잘 유지되어 온다고 믿었던 자신의 삶에 의문을 던지고 다른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이미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경계에 속한 자들이고, 그 내부의 논리에 의심을 던지며 믿지 못하게 된 자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정신분석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더라도, 이미 스스로를 새로운 기표로 밀어 넣으려 하고, 방황의 여정을 떠나기 시작한 자들의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꺅텔 또한 탈공동체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통 가능성에서 소통 불가능성으로의 이행

그렇다면, 위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가 이미 공동체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자들의 모임이라면, 그리고 그로 인해 소통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 존재들이라면(13p), 꺅텔에서 소통 가능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혹은 이러한 소통 가능성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같은 책을 읽고 발제문을 준비하고 또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평을 달며 서로의 기표에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만약 서로가 이미 소통 불가능성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면 이러한 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일정 정도의 상호 공유 가능한 의미화 안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 되는데, 결국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라깡이라는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 또 다른 팔루스에 의거하여 단일한 의미화 아래 집결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결국 하나의 기표에서 다른 하나의 기표로 나를 내어주는 또 다른 환유에 지나지 않을까?

이에 대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라깡의 정치학이라는 단일한 책 아래 의미를 공고히 하고 개념과 지식을 확장하고 라깡을 더 잘 알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라깡의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면 이 모임은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 또 다른 팔루스, 또 다른 권력장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표들을 가지고 소통을 하고 이해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기표들로 공고히 지속되어온 욕망을 정지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개별적 진리, 개별적 욕망을 발명하고 그 속에 들어가기 위해 모인 자들인 것이다. 마치 정신분석 상담의 시간에서 분석가와 내담자가 서로 소통하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통 가능성의 영역에서 소통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무고하지 않은 기표들이 좀 더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아버지의 이름도, 라깡의 이름도 아닌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의 공유 가능한 의미만을 남겨 놓고서, 최소한의 교집합만을 공유한 채로 교차되지 않는 지점들을 넓혀나가는 방식으로, 마치 정신분석 세션에서의 자유연상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물론 개별적 망상 속을 살아가는 정신병적인 공동체를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다. 개별적 망상, 개별적 욕망이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인 것은 맞지만 이러한 개별적 구조는 이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욕망의 발견 또는 욕망의 창조는 나의 욕망의 구조가 어떠한지, 나의 욕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이 얼마나 타자적이었는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거친 뒤만이 가능할 것이기에, 이 소통 불가능성은 소통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와 관련되어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백상현 선생님의 첫 번째 저서, 라깡 미술관의 유령들에 나오는 문장인데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글귀이다.

“누군가 미술 영역에서 진정한 창조를 시도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기존의 형식들을 해체하면서 무작정 수조 밑바닥으로 하강하는 용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중략)... ‘수조 밑바닥의 공백에 등을 댄 채 미술사를 거꾸로 올려다보는 실천’을 통해서만 미술은 비로소 허무주의에 익사하지 않고 창조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라깡 미술관의 유령들, 백상현 저, 200p

이를 욕망의 영역으로 치환하여 설명해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욕망의 영역에서 진정한 창조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니고 있는 근본 환상의 가장자리까지 나아가 공백을 등에 맞댄 채로, 나의 개인사를 거꾸로 올려다 보는 실천을 통해서만 우리는 욕망의 창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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