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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은 Aug 08. 2021

랑종후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랑종을 보았다. 생각보다 별로라는 후기가 많이 들려왔지만 곡성을 재밌게 본 만큼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최고라 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서사 자체는 흥미로웠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상징이나 복선, 떡밥 같은 이야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풀어놨을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영화 랑종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과 더불어 정신분석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히스테리적 주체로서의 밍


먼저 귀신이 들리는 주체인 밍에 대해서 살펴보자. 밍은 어떤 인물인가? 영화 속에서 밍은 다양한 악령, 원혼이 들어가는 신체이다. 그녀의 몸에 벌레, 짐승, 억울하게 죽은 사람 등등의 혼이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바로 부계 측인 야산티야 가문으로부터 내려오는 업보가 그 원인이다.


야산티야 가문은 대대로 방직공장을 운영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운영이 어려워지자 밍의 할아버지는 공장에 일부러 불을 질러 보험금을 타려 했었다. 이후 그것이 스스로 저지른 방화임이 드러나면서 할아버지는 자살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의 저주가 밍에게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또 어머니 노이는 어떠한가? 어머니 노이 또한 신의 노여움을 산 존재이다. 바로 가문 대대로 여성에게 내려오는 바얀 신을 거부하고 신을 속여 동생 님에게 내림하도록 하였으니 말이다.


밍 자체에게도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 초반에 밍의 오빠인 맥이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후에 남매인 밍과 맥은 근친 관계를 가졌고 이로 인해 맥이 자살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가족 관계가 얽힌 서사와 업보와 죄책감보다는 사랑하는 오빠이자 연인을 잃은 밍 자체에 주목을 해보려 한다.


악령, 주술, 업보,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제거해 놓고 보자면 밍은 사랑하는 오빠가 자살한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 그리고 근친상간의 금기를 어긴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오빠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오토바이 사고로 위장되었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지된다. 영화 속 밍이 오빠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 죽음에 대한 슬픔을 내비치는 장면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억압이 일어나는 것이다.


오빠의 죽음,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 대한 애도 작업은 일어날 수 없었고 발화의 기회를 빼앗긴 주체는 신체를 통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무절제하게 마시는 술, 성적 일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영화 속에서 이 장면들은 악귀가 씌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으로 묘사되지만 그 이전에 애도되지 못한 슬픔과 억압당한 신체가 있다.


밍의 이러한 모습은 히스테리적 주체에게서 나타나는 증상과도 닮아 있다. 이유 없이 몸에 마비가 일어나고 물을 마시지 못해 과일을 통해 수분을 섭취해야만 하는 증상, 모국어인 독일어로는 알아듣지 못하고 이탈리아어나 영어, 프랑스어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안나 O의 사례처럼 말이다.



2. 굿과 퇴마, 이야기를 들으며 혼을 달래는 자와 쫓으려는 자


여기에서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굿과 퇴마의 이야기다. 혼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여기서 발견한 것은 서사의 유무이다. 혼자서 밍을 구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님은 아는 퇴마사인 싼티를 찾아가게 되는데, 이 둘의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님과 싼티의 방식을 비교해 보자.


영화에서 보면 님에 대한 소개는 랑종, 무당이지만 싼티에 대한 소개는 무당이 아닌 퇴마사다. 둘의 소개가 다른 만큼 일을 처리하는 데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님은 혼의 이야기를 듣고 달래는 반면 싼티는 악으로 규정된 것을 퇴치할 준비를 한다.

일례로 밍에게 나타난 증상을 맥이 한 짓으로 착각했던 님은 맥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매일 같이 맥의 화가 풀리도록 기도를 올리고, 밍에게 씐 악령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도 네 정체가 뭐냐고 묻는다. 하지만 싼티는 그 악령이 왜 악령이 되었는지 관심이 없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일단 악으로 규정된 이상 그 혼을 봉인하고 퇴마 의식을 준비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님은 아마도 어떤 원혼들이 밍의 몸속에 들어갔는지 알았던 것 같다. 계란을 깼을 때 검은 물이 나온 것을 보자마자 불에 탄 방직 공장으로 달려간 것을 보면. 하지만 그 공장 안에서 약 한 달가량 밍이 방치되는 동안, 억울하게 불에 타 죽은 원귀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과 벌레의 혼까지 그 몸에 들어간 상태였고 혼자서 처리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님은 샨티를 찾아가게 된다. 어쩌면 그 원망에 가득 찬 혼들을 달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님은 샨티와 함께 퇴마를 하기로 결정했다. 조카를 살리기 위해.


하지만 님이 원인미상으로 죽고 난 뒤 샨티 혼자 주도한 퇴마 의식은 실패로 끝이 난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퇴마 의식이 실패한 이유는 밍을 가두고 나오지 못하도록 부적을 붙여둔 문을 외숙모가 열여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그 퇴마 의식은 성공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그 대신에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퇴마가 아니라 굿을 통해 그 원혼의 한을 달래주었더라면 어땠을까?라고 말이다.


이런 생각은 1에서 발화의 기회가 사라진 억압된 히스테리증자로서의 밍과도 연결되어 있다. 밍은 자신이 겪은 슬픔과 상실에 대해 말할 기회를 빼앗겼고, 죽은 혼령들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틀어 막힌 무언가는 언제나 돌아오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런 발화의 억압은 언제나 실패할 운명이다. 따라서 샨티의 퇴마 의식은 어쨌든 실패할 운명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굿을 해서 영혼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한들 사태가 나아졌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3. 보는 자에서 보여지는 자로, 초과하는 응시


마지막으로는 밍을 집요하게 쫓는 카메라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에 대해서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키치적인 소비, 페이크 다큐라는 형식을 빌어 정당화하려는 폭력적인 카메라의 시선 등등에 대한 평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이런 의견에 대해 일견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해석에 정답은 없으니까.


초반에 신내림(또는 악귀에 쓰임)으로 멈추지 않는 하혈 때문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밍, 그리고 그녀를 쫓는 카메라. 도움이 필요함에도 그저 관찰자의 입장만을 유지한 채, 벌어진 문 틈 사이로 그녀를 관음 하는 남성적 시선. 그 외에도 밍이 빈 사무실에 남자를 데려와 성관계를 맺는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는 여성의 신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CCTV 화면이라는 형식으로 한 차례 필터를 거쳤다고는 하지만 많은 관객들, 특히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 이후 밍의 모습, 더 이상 향유할 수 없는 지점으로까지 초과되는 밍의 신체에 대해 좀 더 주목해 보려 한다.


영화는 계속 진행되어 마침내 퇴마 의식이 거행될 날짜가 잡혔다. 그날이 다가오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왠지 밍의 행동이 이상한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어질러져 있는 방이 아마도 그녀의 짓일 것이라고, 사람들은 짐작했고 밍을 더 면밀히 관찰하고자 카메라의 대수를 늘린다.


공포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 장면 이후부터가 가장 무섭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무서움을 주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흥미롭다고 느꼈던 부분은 그 수많은 카메라, 그녀를 지켜보고 감시하는 시선으로부터 밍이 빠져나갔던 순간이다. 그것도 자신의 조카 퐁을 데리고서.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고 아이의 아빠이자 밍의 외삼촌인 마닛 역시 칼로 찔르려 했지만 실패로 끝이 난다.


그렇게 많은 사건사고 끝에 퇴마 의식 날이 다가왔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퇴마 의식은 실패한다. 퇴마 의식의 실패 이후 의식을 주도했던 퇴마사 싼티가 (아마도 악령 때문에) 자살을 하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악령이 씌게 된다. 촬영 기사들은 하나둘씩 악령에 씐 사람들에게 쫓기고 물어 뜯겨 살해된다. 즉 밍을 카메라에 담은 (혹은 담았던)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자들의 연속적인 죽음은 보는 행위의 주도권을 밍에게 빼앗기는 순간 절정에 치닫는다. 그 장면에서 밍은, 좀비 같은 사람들에게 쫓겨 쓰러지면서 카메라를 놓친 촬영기사에게 다가가 다음과 같이 말을 건넨다.

"제가 찍어드릴까요?"라고.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카메라를 주워 들고선 여태까지 자신을 찍어대던 촬영기사에게 카메라의 시선을 들이미는데, 그때 카메라에 담긴 촬영기사의 몸은 물어 뜯겨 내장이 드러난 채였다.



여기까지의 내용이 이제부터 전개하려는 이야기에 필요한 영화의 줄거리였다. 이제 본격적인 논의를 좀 더 전개하기에 앞서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시각'과 '응시'의 관계에 대해 짚고 넘어 가려한다.


아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정신분석에서 응시란 '시관 충동'을 의미한다. 즉 시각장에서 발생하는 충동의 한 형태이며 우리가 탐닉하는 쾌락의 대상인 동시에 억압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나를 바라보아주는 시선에는 쾌락이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유아기 때 겪게 되는 최초의 시선이란 바로  나를 바라보아주는 '어머니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쾌락은 곧 상실될 쾌락이다. 모든 쾌락, 성충동이 그렇듯이. 법과 규범의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쾌락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어머니와 분리되어 충동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야만 한다. 이 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버지의 법, 곧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아주는 시선이 억압되고 난 빈자리에는 무엇이 생길까?


여기에 생겨나는 것은 바로 '보는 자'라는 주체성이다. 우리는 보여짐의 대상에서 벗어나 이제 보는 행위의 주체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책을 보고, TV를 보고 느끼며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나를 보아주는 시선 앞에 놓인 대상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고 판단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연인이 바라보아주는 시선이리라)


그러나 억압은 언제나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럴 때면 충동은 언제나 증상의 형태로 우리를 찾아오게 되는데, 자신의 기원이 무엇이었는지는 감춘 채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어머니의 시선이었던 응시는 이제 옷장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무언가의 '시선'이라는 공포의 형태로, 나를 감시하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또는 보는 자의 위치에서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태로 말이다.


여기까지가 억압의 대상으로서의 응시와 억압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서의 시각장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다시 랑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밍은 다양한 방식으로 응시와 시각장의 관계를 변주시킨다. 먼저 밍은 그 잔인함과 적나라함으로 우리들의 눈을 감게 만든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초반에 밍은 신내림의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지켜봐야 하는 '대상'이었다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감시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어쨌든 영화 속에서 밍이란 카메라가 주시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으며, 그녀에게 주체성이란 없어 보인다. 영화 중간중간에 찍지 말라는 밍의 요구는 관철되지 않았고 하혈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화장실로 도망갔을 때에도 카메라는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볼거리로서의 밍의 신체가 점차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기괴하게 비틀린 신체, 짐승과 같은 몸짓과 행동, 잔인한 행위. 점차 화면 속 밍은 즐길 거리로(공포영화로서가 아니라 여성의 신체로서 즐길 수 없는 지점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는다. 비단 영화 관객뿐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젊고 예쁜 여자에서 악령이 씌고 기괴한 행동을 하는 여자로 말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밍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거나 시선을 회피함으로써 보는 자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계속 바라보면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데, 이것이 보는 자라는 우리들의 위치를 (잠시나마) 흔드는 밍의 첫 번째 효과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계속해서 감시망을 뚫고 탈출하는 '실패의 지점'이다. 위에서 밍이 우리로 하여금 눈을 감게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우리의 눈을 피해 도망을 간다. 이상한 신내림을 받았을 때 한 번, 그리고 퇴마 의식을 앞두고 자신의 조카를 훔쳐서 집 밖으로 나갔을 때 또 한 번. 밍은 이렇게 두 번 카메라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물론 첫 번째 이탈에서는 님이 밍을 찾아내고 두 번째 이탈에서도 곧 사람들에게 붙잡히지만, 잠시 동안의 탈출 자체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시 포획되는 순간이 아니라 아무리 억압하려고 해도 빠져나가는 순간이다. 어쩌면 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카메라를 많이 설치하고 감시를 하고, 또 문에 자물쇠를 걸어 잠가도 언제든 탈출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제 마지막 지점으로 넘어가 보자. 언제나 보여짐의 대상이었던 밍이 카메라를 잡아든 순간으로 말이다.

영화의 끝자락에 가면 내내 '보는 자'의 위치에서 밍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관찰하던 촬영 기사가 주체성을 잃고 대상의 위치로 전락해 버린다. 이제 촬영 기사는 보는 자가 아니라 카메라 앞에 보여지는 대상인 동시에, 응시 앞에 여과 없이 노출된 자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란 주체의 추락이다.


더 이상 억압이 불가능해진 응시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충동 그 자체, 죽음뿐이다. 어머니가 바라보아주는 시선이라는 그 기원을 잊은 채 우리에게 되돌아온 응시(충동)에서 우리는 더 이상 충만한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대신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죽음과 공포인데, 카메라를 집어 든 밍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공포란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다.



마치 메두사의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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