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 정신분석과 응시
https://lacanquotidien.fr/blog/2011/11/sous-le-regard/
라깡 꼬띠디앙은 라깡이 죽기 직전에 세웠던 '프로이트 원인 학교(École de la Cause freudienne)'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이다. 여기에서 하이퍼 모던 사회에서 응시와 시각장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출몰하는 응시가 어린아이 정신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글을 발견하여 가져와 보았다. 원문은 위 링크를 클릭하면 볼 수 있으며 이제부터 시작될 글은 위 글에 대한 설명이다.
Le secret du champ visuel
시각장의 비밀
먼저 응시와 시각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인간은 무언가를 보는 주체이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에는 내가 '자발적으로' 또는 '주체적으로' 본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차가 오는지 살펴보면서 건널지 말지를 판단하고, 영화나 그림을 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고 판단하기도 하며,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보고 아름답다거나 옳다고 판단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였을까?
유아기 시절 우리는 파편적인 존재였다. 멋대로 버둥거리는 팔과 다리, 통제되지 않는 신체가 있었으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시기가 있었다. 갓 태어났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보기 이전에 '바라보아짐'을 먼저 감각하게 된다. 그 시기의 우리는 보는 존재이기 이전에 어머니라는 하나의 거대한 대타자로부터 바라보아지고 보살핌을 받는 존재였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 바라보아짐, 응시에서는 쾌락이 발생하고 하나의 충동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흔히 주이상스라고 표현되는 이 쾌락, 응시, 시관충동을 아이는 탐닉하지만, 이 충동은 곧 거세되어야 할 대상이다.
충동을 거세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le nom-du-père)이다. 문명 속 법과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형적 충동(대표적으로 구강충동, 호원충동, 항문충동, 시관충동)을 거세 당하고, 언어-상징계가 제시하는 욕망의 대상을 좇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거세된 우리는 어머니의 젖가슴이 아닌 음식, 담배, 군것질 거리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게 되고, 우리를 불러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탐닉하는 대신 법과 질서를 규제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따르며, 때로는 음악을 들으며 살아간다. 항문 충동, 대변을 보는 행위의 경우에도 기저귀를 갈아주는 어머니의 손길을 탐닉하고 자신의 배설물을 어머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느끼는 대신, 아주 당연하고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정해진 장소에서 처리해야 하는 사적이고 때로는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응시의 경우에는 어떨까?
본다는 행위 역시 '바라보아짐, 응시, 어머니의 시선, 시관충동에 대한 방어'일 뿐이다. 우리를 바라보아주는 어머니의 눈길, 응시를 탐닉하는 대신 우리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이미지를 보도록 강제된다. 그렇게 우리는 응시를 느끼지 않기 위해 이미지라는 보호막을 치고,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 따위는 없다고 믿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까지의 설명이, 이 글에 나와 있는 자크-알랭 밀레의 인용문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Jacques-Alain Miller a fait, de la schize entre l’œil et le regard, « le secret du champ visuel », puisque cette schize contient la castration comme condition de l’ouverture sur le monde du visible.
자크 알랑 밀레는 응시와 눈 사이의 분열에 대해 “시각 장의 비밀”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러한 분열이 가시적인 세계로 개방되는 조건으로서의 거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응시가 거세됨으로써 우리는 가시적인 세계, 무언가를 보는 세계에 비로소 들어갈 수 있다. 시각, 본다는 것은 보여짐을 당하는 것에 대한 방어로 출현하며, 보는 주체 이전에는 보여짐을 당하는 주체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충동을, 응시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 않다. 완전하지 않은 언어 상징계의 억압이 약화되는 순간, 혹은 그에 대한 방어가 과도해지는 순간, 장벽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 틈을 파고들어 응시는 다시 출현하게 되는데, 이미 그 충동들을 억압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우리들은 응시의 충동을 예전처럼 쾌락으로 느낄 수 없게 된다. 이제 응시는 우리에게 기이하고 알아볼 수 없고 공포스러운 것, 불안으로 다가온다. 어두운 산에 혼자 남겨졌을 때 느껴지는 공포나,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집에 혼자 남겨진 밤, 옷장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것과 같은 공포의 형태로 말이다.
Tout le réel étant visible, ce qui ne se voit pas n’est pas réel.
가시적인 모든 실재, 보여지지 않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점점 더 기술이 정교해지고 발달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카메라와 마주치게 된다. 골목에서, 상점에서, 심지어 보안 목적에서든 반려 동물이나 아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든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화재 사건이 일어나도, 길 한복판에서 싸움이 일어나도, 누군가는 어김없이 휴대폰을 들고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 이런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보여지지 않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믿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강화된 시각장 때문에 우리는 또한 불안해진다.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갈 때,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처럼 말이다.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홈캠을 통해 아이와 반려 동물을 지켜보지만, 역으로 이 때문에 보이지 않는 순간 또는 보지 않는 순간 전보다 더 많은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또는 역전된 방식으로도 불안은 찾아오는데 내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 또한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계 없는 보는 행위,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은 모든 것 속에 속해 있는 나 또한 보여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카메라가 없어야 할 화장실에, 모텔에서도 우리는 보여질 가능성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는가? 하지만 본 글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까지는 다루고 있지 않으므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응시에 대한 방어로서 생겨난 보는 주체였지만 점점 더 기술이 발전하는 하이퍼 모던 사회에서 본다는 행위, 방어로서 생겨난 시각장은 전과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한다. 흔히 억압이 과도해진 강박증자에게 되려 증상이 출몰하게 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대 사회에서 응시와 시각장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전개시키기 위해 글쓴이는 동료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제라르 바즈먼(Gérard Wajcman)의 책 '절대적인 눈(l'oeil absolu)을 소개하고 있는데, 책 내용에 대한 설명을 가져와 보면 이렇다. (참고로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프랑스어판을 찾아보려고 해도 절판되었는지 구할 수 없었다.)
Dans son dernier livre, « L’œil absolu », Gérard Wajcman dénonce l’omniprésence du regard et le franchissement de la réalité vers le réel qu’il constitue. La disparition du voile de la pudeur, qui est l’une des conséquences de l’idéologie de la transparence propre au monde hypermoderne, détruit, du même pas, toute possibilité d’élision de l’objet regard, de la dimension du hors-champ. Et là surgit l’angoisse. Cette mutation sans précédent dans l’histoire des hommes, décrite par Gérard, a pour conséquence que la promesse de tout voir change la nature du désir de voir en volonté, qui devient une loi, une exigence de visibilité, qui a enfanté une multinationale du regard. La thèse est alors limpide : si tout est visible, il n’y a plus de hors-champ. Mais, par là-même, le champ du visible est annulé. Un œil sans paupière est sur le monde, Gérard Wajcman l’appelle « l’œil absolu ».
자신의 최신 서적인 “절대적 눈”에서 제라르 바즈먼은 응시의 편재성(l’onmiprésence du regard)과 그것이 [응시] 구성하고 있는 실재를 향한 현실 횡단하기를 말한 바 있다. 부끄러움(pudeur, 조심성)의 베일이 사라지는 것, 그것은 하이퍼 모던 세계 고유의 투명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결과 중 하나인데, 이는 같은 선상에서 장 너머의 차원으로 응시의 대상이 모음 생략(élision)될 모든 가능성 또한 소멸하게 만든다. 그때 그곳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은 불안이다. 제라르가 언급한 바에 따른다면, 인간 역사에 전례 없는 이러한 변화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가능성(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약속, la promesse de tout voir)이 자발적으로 보고자 하는 욕망의 본질을 바꾼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욕망의 본질은 응시의 다국적성(multinationale)을 낳는 하나의 법칙으로, 가시성에 대한 요구(exigence, 필요성)로 이어진다. 논점은 투명하다. 만약 모든 것이 가시적이라면, 더 이상 [시각] 장의 외부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가시적인 장 또한 소멸되고 만다. 눈꺼풀 없는 눈이 세상에 있고, 제라르는 이를 ‘절대적 눈’이라고 부른다.
[] 안에 적혀 있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넣은 문구이다.
이 글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음 생략이라는 표현을 한 번 뜯어보자. 모음 생략이란 a, e, i와 같은 것들이 모음 앞이나 h앞에 올 때 생략되는 것을 말한다. 모음 생략을 의미하는 프랑스 단어 élision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므로 이 단어로 예를 들어 보자면 이렇다.
여성 명사인 élision 앞에 정관사가 온다면 la가 붙어서 la élision 이 된다. 하지만 a와 모음인 é가 연결되므로 여기에 모음 생략이 일어나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la élision 이 아닌 l’élision로 표기하게 된다.
la + élision ⇒ l'élision
여기서 모음이 생략되고 난 자리에는 아포스트로피(')가 생겨나게 된다. 즉 이 표시(')가 지시하는 바란 여기에 생략된 모음이 있음이다.
이제 이 모음 생략과 응시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모음이 생략된 자리에 생겨난 아포스트로피 기호 너머에는 생략된 모음이 있다. 시관충동이 거세되고 생겨난 시각장 너머에는 은폐된 응시의 존재가 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아포스트로피란 시관충동이 거세되고 난 빈자리를 차지한 '보는 자'라는 팔루스적 환상을 은유한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그렇게 생략된 모음이 상징계 내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공백과 균열의 형태로 상징계 내에 존재한다는 해석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응시의 대상이 모음 생략될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위에서 말한 바에 따른다면 충동의 거세를 모음 생략으로 비유한 것이라면, 모음 생략될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성충동이 완전히 거세되지 않고 억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응시의 대상이 모음 생략될 가능성'이란 응시가 거세되고 은폐될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이로 인해 도처에 불안이 출몰하게 됨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출몰하는 불안 때문에 본다는 행위는 이제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보고 판단하는 주체성을 의미하기보다는 더 많은 CCTV에 대한 요구로, 하나의 의무로 변해가고 있다.
원숭이에게 응시당하는 소년, 조엘
그렇다면 범람하는 응시와 어린아이의 정신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적 현상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 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로흐 나보는 자신이 적십자 병원에서 만났던 5살 소년 조엘의 사례를 소개한다.
조엘은 매일 밤 자려고 침대에 누울 때마다 원숭이가 쳐다보는 증상에 시달리는 아이였다. 원숭이 때문에 무서워 매일 밤 조엘은 부모님의 침대로 달려갔고, 그저 조용히 넘어가기 위해 부모님은 조엘을 침대에서 함께 재웠기 때문에 조엘은 5살이 될 때까지 혼자 자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어머니 대타자와 아이의 관계가 상징계에 의해 분리되지 않고 유착된 채로 지속될 경우, 정신병이 발생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조엘 역시 그러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조엘과 단 한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 했고 이로 인해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항상 응시당해야만 했다. 아이가 밤마다 시달렸던 원숭이의 응시는, 어디에나 있는 실질적인 어머니의 응시가 사라졌을 때 회귀하는 실재(réel)인 동시에 불안의 대상이었다.
상담 과정에는 조엘의 부모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어머니부터 살펴보자. 조엘 어머니의 이야기는 크게 외할머니와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볼 수 있다.
1. 외할머니와의 관계(조엘의 증조 외할머니)
조엘의 어머니는 면담 초기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조엘이 태어났을 때 마치 종말 된 세계 속에서 엄마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고, 모성애와 관련하여 어려움을 느꼈다고 말이다. 그녀는 또한 완벽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는데, 이러한 말들은 그녀의 외할머니, 즉 조엘의 증조 외할머니와 관련이 있었다.
완벽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어머니의 말에 분석가는 그녀의 어머니가 어떠하였는지 물었고, 그녀는 어머니 대신 자신의 외할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머니 대신으로 선택된 대리물이었던 외할머니와의 관계는 조엘이 태어나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는 조엘이 태어나기 전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다가, 조엘이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자는 동안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본문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추가적인 분석을 해보자면 이렇다. 조엘 어머니가 품고 있었던 완벽한 어머니라는 환상은 어머니의 빈자리 대신이었던 외할머니와의 관계로 인한 것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할머니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나와있지는 않지만, 부재중인 어머니에 대한 결여의 반작용으로 완벽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환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더불어 종말이 찾아온 세계에 어머니가 된 듯한 기분 역시, 조엘의 어머니가 외할머니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더라면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세계를 종말이 찾아온 세계로 느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으리라.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정신분석가는 어머니에게 두 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어머니 인생에서 중요한 여인이 자는 동안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가 어떻게 밤에 잠들 수 있겠냐'라고 지적하면서 외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조엘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완벽한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한 다른 방법을 탐색해 보라고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서사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이후 진행된 면담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대상 선택,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게 되면서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된 또 다른 서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2. 아버지와의 관계 (조엘의 할아버지)
그녀의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빚을 갚은 건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불행을 목격한 그녀는 배우자를 고를 때 아버지와는 정 반대인 현실적인 사람을 골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반대의 남편을 고름으로써 사라진 줄 알았던 아버지의 무능력함(indignité du père, indignité 는 무자격, 부적격이라는 뜻도 있다)은 조엘이 태어나면서 아이에게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조엘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를 묘사할 때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다(il est dans les nuages)'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조엘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똑같이 사용된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라디오에서 자폐증(autiste)이라는 단어를 듣곤 조엘이 자폐증인 건 아닐까 두려워했다고 고백했는데, 이 자폐증이라는 단어를 정신분석가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불안과 두려움을 촉발시킨 이 단어는, 부성적 태만(carence paternelle)을 메우고 보충해 주고 있던 주요 인물[조엘의 아버지]이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아버지의 무능력함이라는 속성이 아이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되었을 때 느낀 어찌할 바 모르겠는 감정(perplexité, 난처함, 당혹스러움)을 지시한다고 말이다.
이렇게 조엘의 어머니는 외할머니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완벽한 어머니'와 조엘에게 투사된 '아버지의 무능력함'(이로 인해 모성애를 가지게 되는 것에 어려움을 겪게 됨)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체였다. 추측컨대 이로 인해 아이에게 일관된 방식으로 대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상징적 법에 의한 거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지속된 면담을 통해 조엘의 어머니는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조엘과 분리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매일 밤 조엘이 침대로 달려올 때마다 남편을 분리자로 이용하였고, 조엘이 환시로 두려워할 때면 아버지는 조엘을 구하기 위해 와서 원숭이를 내쫓아주었다.
그리고 결국 조엘이 “원숭이들은 동물원에 있어요”라고 말하는 날이 오게 되었다. 이후 조엘은 4명의 가족 구성원을 모두 그리고 4까지 셀 수 있게 되면서 가족들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위 내용에 대한 설명을 영상으로 담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