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의 기원이라고 한다면 흔히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지역의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철학이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무엇에 의존해서 사유할 수 있었을까요? 혹은 그 이전의 사람들과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흔히 철학의 시작 이전 시대를 서사시의 시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격적인 서양철학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사시 시대를 다루고, 이와 더불어 그리스인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그리스인은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는가입니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연도를 외우기보다는 전체적인 흐름만 이해하고 넘어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원전 1500년 경 러시아 지방을 떠돌던 유목민 유럽인도 어족이 최초로 이주
→ 1400년 경 테세우스 설화로 알려진 미노스 문명(크레타 문명)이 크레타섬에 자리 잡음(청동기 시대)
→ 발칸반도 북쪽 이주민인 아카이아인이 남하하여 그리스 본토 남부 장악
→ 미케네 문명(트로이 전쟁을 다루고 있는 일리아드가 미케네 시대 말기에 해당함)
→ 기원전 1100년 경 도리아인 남하(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 스파르타의 조상 / 철기시대)
→ 당시 토착민들(아카이아인)이 스파르타 인들의 농노가 되거나 이오니아 반도에 식민지를 세워 이주하게 됨
결과적으로 이렇게 북쪽에서 이주한 민족(도리아인)과 토착민(아카이아인)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민족이 그리스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그리스라는 하나의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문화적 공동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침략자를 피해 이오니아 반도로 이주하여 식민지를 건설하며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일부 있었는데요, 바로 여기서 탈레스를 비롯한 최초의 철학자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요약
미노스 문명(크레타섬) → 아카이아인 남하 → 미케네 문명(호메로스의 희곡 '일리아드'가 미케네 시대 말기에 해당합니다) → 도리아인 남하(스파르타의 조상) → 토착민들이 이오니아 반도에 정착(밀레토스 학파의 본거지)
그리스인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서사시 시대를 다뤄보겠습니다. 서사시가 오늘날처럼 시와 같은 문학의 한 장르인 듯 여겨질 수 있지만 이것이 하나의 문학적 글쓰기의 방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대의 서사시란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노래인 동시에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무엇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답을 제시해 주는 도덕 교과서이자, 신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성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서사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테바이 서사시: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로 대변되는 서사시
트로이아 서사시: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8편의 서사시 / 호메로스가 썼다고 알려진 서사시로, 파리스의 재판에서부터 오디세우스의 죽음까지 다룬 이야기입니다. 이 트로이아 서사시 8편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해당하는데, 나머지 6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가 8편 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실상 핵심적인 내용은 전달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두 편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00년경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이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교훈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의 작품을 철학의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서사시와 고대 철학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서사시 시대는 신화적인 사고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화적 사고란 번개는 제우스 신이 노해서 일어난 것이고 해일이 일어나면 포세이돈이 그 원인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어떤 현상에 대해 신화적인 원인으로 사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게다가 서사시가 교훈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한 인물의 운명을 그리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현재의 삶을 노래할 뿐입니다.
탈레스로 대변되는 최초의 철학자들의 관심사는 이러한 삶의 층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만물의 원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가시적인 세계 배후에 있는 하나의 원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즉 계속해서 변화하는 현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하나의 진리, 하나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은 눈앞에 변화하는 현상 너머에 있는 변화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 만물의 원천을 각기 제시합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기에 그들이 제시하는 것들이 매우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답을 내놓았는가 보다 그들이 왜 이런 답을 구하게 되었는가, 어떤 질문을 던졌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변화하는 것들 이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외양을 넘어선 사유, 근원적이고 지속적이며 변화의 과정을 겪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던 것이지요.
다음 편에서는 최초로 이런 사유를 하기 시작한 이오니아 지역의 밀레토스 학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아래 지도는 앞으로 펼쳐질 철학자들과 그들의 출생지를 간단하게 표시한 것입니다. 지리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알면 공부하는 데에 보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