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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은 Jun 10. 2023

상실의 일기

2023.05.27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상실한 대상은 안경이다. 물론 그전에도 수많은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되찾거나 다른 물건으로 대체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처음이 될 수 없다. 아마 9살 때 즈음, 어릴 적부터 시력이 나빴던 내가 처음으로 안경을 맞추었던 때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눈이 나쁘지 않아서 앞자리에 앉으면 칠판이 보이는 정도였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착용했다가 벗었다가 반복했었다. 기억하기에 안경을 맞추는 데에 든 비용이 적지 않았으므로 엄마는 내게 안경을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덜렁거리는 아이였던 나는 얼마 안 가 그 안경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가방 안에도, 책상 서랍에도, 집에도.
한 동안은 엄마한테 안경을 잃어버리지 않은 척 거짓말을 했다. 학교에서는 보이지 않음에도 보이는 척 수업을 듣지 않았고 집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따금씩 안경 어디 갔냐고 엄마가 물어볼 때면 학교에 두고 왔다고, 학교에는 있다고 거짓을 둘러댔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허술한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결국 찾지 못한 안경을 대신할 새로운 안경을 맞췄고, 잃어버린 안경은 점차 기억에서도 잊혀졌다.
그렇게 상실한 안경에 대해 모두가 잊어가던 어느 날, 학교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나는 잃어버린 안경을 찾았다. 한 학년을 다니는 동안 자리를 고정시켜서 앉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바꿔 앉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안경을 발견한 책상 서랍은 새로이 바꿔 앉은자리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잃어버린 안경이 있을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새로 바꿔 앉은 자리가 몇 달 전에 앉았던 자리였던가. 아니면 누군가가 훔쳐다가 장난으로 숨겨놓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자리를 바꿔 앉은 게 아니라 매일 같이 앉던 그 자리에서 안경이 다시 발견된 것인데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더라도 다시 발견된 안경은 기이할 뿐이다. 왜냐하면 분명 서랍 깊숙한 곳까지 손으로 더듬고 눈으로 몇 번이고 확인을 했으니까. 사건의 전말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고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그러나 되찾은 이 안경이 돌아와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에게는 이미 새로운 안경이 있고 혼이 남으로써 상실의 대가를 치르고 난 상태였으니 말이다.
나는 그 안경을 어떻게 했을까? 그것 보라고, 잘 찾아보면 있을 텐데 제대로 찾아보지 않아서 괜히 새 안경을 맞추지 않았냐고 혼이 날 것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을까? 아니면 솔직하게 어른들에게 이야기했을까?
 


2023.05.28
인간은 누구나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공허함, 상실감, 텅 빈 듯한 느낌은 모두 기원적 상실에서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상실과 동시에 주체가 탄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영원히 미지의 영역에 남아 있을 무형의 것을 그리워하고 되찾고 싶어 하지만 불가능한 갈망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우고 등장하는 산물들이 있다. 우리는 잠시 상실을 보상받았다는 충만함에 기뻐하다가, 내가 찾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다시 새로운 산물을 찾아 나선다. 그건 사람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대상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이념일 수도 있다.


 
2023.05.28
Aveuglante, 눈이 멀 것 같은
                                명백함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오늘 분석실 바닥에서 우연히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언제 쓴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필체가 내 것이었으므로, 아마 꽤 오래전에 적어 놓고 상실한 메모일 것이다. 어디에서 이 단어를 발견했는지 그 또한 알 수 없어서 까뮈의 이방인에서 보았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Aveuglant, 눈이 멀 것 같은, 명백한, 이성을 잃게 하는. 내가 메모한 단어는 이 프랑스 형용사의 여성형이다.(그러니까 나는 이 형용사가 수식한 여성형 명사 또한 상실한 셈이다) 하나의 단어에 눈을 멀게 한다는 뜻과 명백하다는 의미, 그리고 이성을 잃음이 동시에 들어있다.
명백함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아마도 라깡을 염두에 두고 이 메모를 적어 놓았을 거라고, 나는 과거의 나에 대해 추측했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오히려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언어를 통해 정교하게 포착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진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멀리 달아나 버린다. 명백함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눈이 멀어야만 우리는 명백한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 보는 자의 위치에서의 추락, 보여지는 자로서 응시 앞에 선 주체로서의 진리.
 


2023.05.30
우리는 매일 꿈을 꾸고 꿈을 잃는다. 어떤 꿈을 꾸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꿈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를 상실하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어떤 꿈들은 억압이 느슨해진 틈을 타 망각의 강을 건너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는데, 정신분석은 이러한 꿈의 절편을 무의식을 탐사하기 위한 입구로 사용하곤 한다. 꿈이 기억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의식, 즉 억압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의식적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문법을 가지고 무의식은 꿈을 통해 말을 한다. 그것은 근본환상의 변주이며 중층적으로 왜곡되어 드러난 우리의 무의식이다.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무의식의 소리를 의식은 듣길 거부하며 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
 


2023.06.01 우중런
처음 비 오는 날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2021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있어서 비 오는 날은 달기를 하지 못하는 날이었다. 그날 나는 한강으로 러닝을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난 뒤에야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오늘 나가지 못하겠구나, 반 즈음 포기를 하고 다시 들어와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것인가 옷을 갈아입고 도서관을 갈 것인가.
비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일단은 도서관에 반납해야 할 책이 있어서 우산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뛰지 못하는 대신 걷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비가 많이 온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는 아니었다. 다녀오는 동안이라도 비가 잦아든다면 다시 나갈 생각이었으나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인 반납함 책을 넣고 집으로 향하면서 우산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가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나? 어차피 뛰고 나면 씻고 옷을 갈아입을 텐데.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여태까지 이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 길로 나는 우산과 가방을 집에 두고 바람막이를 챙겨 다시 밖으로 나섰다.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던 소리가 겉옷을 때리는 촉각으로 변했다.
도착한 한강변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걷는 사람도 없었다. 텅 빈 한강변에 오롯이 나 혼자만 있었던 것이다. 보도보다 길이 매끈하게 정돈되어 있는 자전거 도로로 달려도 제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 익숙해졌고 신이 나기 시작했다. 물 웅덩이를 마주칠 때면 옆으로 피하면서 계속 달렸는데, 한 번은 물 웅덩이를 피한다는 것이 진흙을 밟아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 어차피 빨아야 할 거 더 젖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물이 고여 있는 곳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밟으면서 달려갔다. 그때, 내가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물 웅덩이를 밟으면서 노는 걸 좋아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날 나는 비 오는 날에는 뛰면 안 된다는 금기 하나를 잃고 비 속을 뛰는 즐거움을 알았다.
 


2023.06.02
상실한 것의 빈자리는 계속해서 대상을 찾아 나선다. 결여를 있는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맞지 않는 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잃은 것이 없다는 환상이 있어야 인간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마치 카사노바가 새로운 여인을 끊임없이 바꿔 나가는 것처럼. 한때는 내게 이 대상이 고양이였던 적이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잃어버리지 않은 고양이를 상실할 것에 대한 이상한 두려움과 불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이 불안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고양이가 집을 나가거나, 고양이를 잃어버리거나, 고양이를 지키지 못한 악몽으로 반복해서 꾸었다(지금은 이런 꿈을 꾸지 않는다).
이 불안이 촉발된 사건이 있었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외에도 본가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는데, 고양이를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이 고양이와 관련이 있다. 그때 당시에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었던 나는 퇴근을 하고 아침에 잠을 자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밖에서 나는 소리가 생생하고 크게 들렸고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던 나는 잠들기를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소음의 원인은 제대로 닫히지 않은 현관문이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나간 사람이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것이리라. 그때 갑자기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을 나갔다는 가능성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소음 때문에 무서워 집 안 어딘가에 숨었을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일단 문을 닫고 고양이가 있을 법한 곳을 샅샅이 찾았다. 그러나 없었다. 다시 문을 열고 고양이를 불렀다. 사람들이 오가고 떠드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때부터 패닉 상태에 빠졌던 것 같다. 집 안을 다시 찾아봐도 없어서 나간 게 확실한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계속 고양이 이름을 계속 불렀는데, 그때 울음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재빨리 문 밖으로 나가서 다시 이름을 부르니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한두 층 아래로 내려갔을 때 겁에 질린 고양이가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도한 나는 고양이를 안아 들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확인해 본 결과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 사람은 언니였다.
이 날의 사건이 일어나고 몇 년 뒤 고양이를 잃어버릴 뻔한 일이 한 번 더 있었는데 그것 역시도 언니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 고양이를 잃어버리는 것과 관련된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은 이런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였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고양이의 상실에 대한 악몽은 언니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난과 분노에 대한 억압 그리고 표출되지 못한 감정의 상실, 그 자리를 채운 불안의 대상.
혹은 분노로 표출되지 못하여 불안으로 드러나는 마음.


 
2023.06.06
분석이 진전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나는 어릴 적 일에 대해 많은 부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고 그나마 기억하는 부분은 조각난 단편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하루는 예전에 살던 집을 돌아보기로 결심하고, 옛 동네로 향했던 적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계속 비슷한 동네에 살았기에 많이 이동할 필요도 없었다. 도착한 동네는 많이 변하기도 했고 변하지 않기도 했다. 처음 향한 곳은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자 가장 많은 기억이 있는 집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15살부터 23살까지 나는 거기에서 살았다. 그곳으로 가장 먼저 향한 이유는 내가 가족들을 데리고 그 집을 탈출함과 동시에 아버지를 버렸던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시작하고 돈을 벌자마자 빚을 내서 무리하게 이사를 감행했다. 이미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은 지 몇 년 째였지만 그 사람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불시에 집에 찾아왔고, 우리는 몰래 이사를 하기 위해 야반도주를 하듯 전 날 밤부터 짐을 쌌다.


그런데 몇 년이 흐른 후 다시 찾아갔을 때 그곳은 사라지고 없었다. 허름했던 우리 집은 재개발이 되어 밀려 버렸고 그 터에는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내가 종종 집에 빨리 가기 위해 이용했던 작고 좁은 샛길만이 남아 있었는데 어둡고 음침했던 그 골목에는 이제 꽃이 심어져 있었다. 이미 크고 높은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집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건 명백했다. 흔적을 찾듯 그 주변을 계속 서성이다가, 결국 실패한 나는 다시 내가 태어났던 집으로 향했다.


어릴 때 뛰어놀던 골목길 앞 교회와 슈퍼가 아직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살던 집으로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막상 와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를 나도 모르게 알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였음에도 골목은 조용했고 나이 든 할머니들만이 듬성듬성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집 근처 방앗간에서 키우던 개가 무서워 지나다니지 못했던 곳에는 이제 사람도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그 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나무로 된 대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릴 때는 크고 넓어 보였던 문이 작고 초라해 보였고 아무도 살지 않은 지 오래된 듯했다. 들어갈지 말지를 고민하면서 나는 같은 골목을 계속 왕복했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왠지 무서웠다.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고 빈집이었고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그곳을 떠나 다음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로 찾아 간 초등학교 때 살던 집, 중학교 때 살던 집들은 모두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 만화 가게에 간다고 오갔던 길을 다시 걸어가기도 하고 자주 들렀던 슈퍼와 가게들을 다시 찾아갔지만 내가 없는 사이 동네가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골목은 이제 넓고 정돈된 대로가 되었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없기도 했다.
상실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옛 동네를 방문한 것이었지만 그날 내가 확인한 것은 그저 상실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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