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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꾸 Dec 24. 2018

보석함보다 피크닉 바구니가 더 좋더라

영화::물랑 루즈(2001)

 똑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영화에서 좋았던 부분을 말해보라고 하면 사람마다 다르게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줄거리, 배우의 연기, 연출 기법, 배경 음악, 시각적 효과, 대사의 아름다움 등등... 영화를 빛내주는 요소들이 이렇게 다양하고, 또 사람마다 영화를 볼 때 감동을 더 잘 느끼는 부분들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를 묻는다면, 나는 '스토리'라고 대답하고 싶다. 정성 들여 설계된 캐릭터들과 그들 사이의 흥미로운 갈등 관계, 그리고 이야기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장치들이 오밀조밀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 스토리가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것. 나는 거기에서 짜릿한 감동을 느낀다. 


 따라서 나에게는 영화의 '보는 맛'을 살려주는 시각적 효과나 '듣는 맛'을 살려주는 배경 음악들은 스토리를 보조하는 역할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들은 스토리가 탄탄하게 잡혀 있는 상태에서, 그 스토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고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줄 때에만 제대로 된 감동으로 다가온다. <라라랜드>의 보라빛 하늘이나 <드림걸즈>의 'Listen'처럼. 특히 배경 음악의 경우에는 그것이 특별히 강조되지 않는 한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에도 현재 상황이나 대사, 캐릭터들의 심리 등을 파악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극찬을 받았던 영화 <물랑 루즈>에서 커다란 여운을 선물 받지 못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랑 루즈>는 1900년 파리에 자리하고 있는 환락의 장, '물랑 루즈'에서 펼쳐졌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크리스티안은 보헤미안이 되기 위해 런던에서 파리로 건너와 우연히 물랑 루즈의 극단과 마주치게 된다. 물랑 루즈는 춤과 노래가 끊이지 않는 쾌락의 공간으로 물랑루즈의 꽃은 단연 '스파클링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샤틴이다. 샤틴은 공작에게 더 큰 투자를 받아 물랑 루즈를 더욱 확장시키고 배우의 꿈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샤틴은 크리스티안을 공작으로 오해하고 되고, 그 만남을 계기로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샤틴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려는 공작의 눈을 속여가며 크리스티안은 물랑 루즈에 올릴 연극의 대본을 써 나간다. 크리스티안과 샤틴의 사랑 이야기가 그대로 녹아 있는 연극을 만들면서 둘의 사랑도 한없이 깊어져간다. 하지만 공작은 이를 눈치채게 되고, 샤틴은 거짓말로 크리스티안을 떠나보낸다. 샤틴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물랑 루즈로 돌아온 크리스티안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녀를 드디어 품에 안은 순간 샤틴은 전부터 앓아온 불치병 때문에 숨을 거두고 만다.



 <물랑 루즈>는 이처럼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처럼 보기 좋게 담아낸다. 한 편의 화려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화면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오브제들과 화면 연출은 가히 압도적이다. 특히 눈부시게 치장된 샤틴의 방에서 펼쳐졌던 '무대'를 보고 나서는 박수가 절로 나왔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Elephant Love Medley>, <Come What May>, <El Tango de Roxanne>와 같은 OST도 정말 아름답다. 물랑 루즈에서 춤을 추던 이들이 던진 모자들이 건물 위까지 솟아오르는 장면이나 눈코입에 수염까지 달고 있는 달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두 주인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면처럼 전통적인 뮤지컬 영화들의 기법 또한 보는 맛이 쏠쏠하다. 꺼져가던 뮤지컬 영화의 불씨를 되살려내며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에 깊은 감동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바로 '개연성'과 '미리 정해진 결말' 때문이었다. 물랑 루즈의 다른 무희들이 공작에게 크리스티안과 샤틴의 관계를 눈치챌 수 있도록 해주는 부분에서는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평소에도 살벌한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니는 공작의 거처에서 쇼콜라가 혈혈단신으로 침입해 샤틴을 구해오는 장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각혈을 하면서 불치병으로 점점 시들어가고 있던 샤틴의 건강 상태를 크리스티안이 끝까지 몰랐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각적인 부분과 청각적인 부분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것은 좋았지만, 이렇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설정이나 설명이 누락된 듯한 이야기들 때문에 몰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가며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미 시작부터 비극적인 사랑이 예고되어 있는 <물랑 루즈>의 스토리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물랑 루즈>는 분명 매력적인 작품이다. 내가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도, 보는 맛과 듣는 맛이 있는 뮤지컬 영화의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감독이 일부러 희생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반짝거리는 보석함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보다는 소박해도 촘촘하게 엮여 있는 피크닉 바구니 속에 담겨 있는 사랑 이야기에서 더 깊은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을. ⓒ라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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