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로 가득한 날 (크랜베리 소스 레시피)
캐나다 와서 결혼한 지 3년째인데, 나는 오늘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했다. 서양에서는 추수감사절이 크리스마스 못지않게 큰 행사라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는 늘 그냥 지나가는 날이었다. 남편에게 아픈 기억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형님을 잃은 날이다.
그래서 남편은 그 이후로는 추수감사절을 한 번도 센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십 년이 넘도록 묻혀서 흘러갔는데, 이번엔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는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고 혼잣말을 하는 그에게, 나는 칠면조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말을 했다. 사실 꼭 그 고기가 먹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남편의 가슴에 있는 무거움을 이제는 놓아버리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내 그 말에 남편도 힘을 입어, 그러면 추수감사절 저녁을 차려 먹자고 했다. 갑자기 결정을 한 지라, 바로 전날 나가서 칠면조를 사려니, 슈퍼마켓에 모두 품절이었다. 결국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간신히 구해왔다.
나는 사실 뭘 만들어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니, 모든 요리는 남편이 이끌었다. 디저트는 보통 내가 담당하지만, 호박파이는 남편에게 레시피가 있었다. 어머니가 만드셨던 레시피 카드는 글씨가 거의 다 바래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함께 남편의 추억의 음식을 만들었다.
남편이 호박파이를 먹었던 것은 평생 딱 한 번이라고 했다. 남편은 글루텐 불내증이 있기 때문에 밀가루 음식을 못 먹는데, 아주 어릴 때, 병명을 모를 때 한 번 먹어봤다고 했다. 남편이 늘 심하게 아프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결혼한 이후로, 남편을 위해 늘 밀가루 없이 파이를 굽는다. 그래서 이번에 호박파이도 역시 밀가루 없이 파이 반죽을 만들었고, 그것을 깔고 호박파이 커스터드를 만들어서 부었다. 노란 호박 색상이 들어가서 굽기도 전부터 맛있어 보였다. 넛맥이랑 계피 같은 향신료가 들어가서, 굽고 있으니 집안이 향긋한 냄새로 가득 찼다.
칠면조 손질은 남편이 알아서 했다. 칠면조에서 꺼낸 간과 심장도 삶아서 먹으면서 식사 준비를 하였다. 처음 먹어보는 내장이었는데, 나름 맛이 있었다. 원래 칠면조를 구울 때에는 위에 한 번씩 기름을 끼얹어줘서 촉촉하게 굽는 것이 원칙이라지만, 베이컨을 얹어서 구우면, 베이컨의 기름이 배어들면서 번거로운 일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워진 베이컨은 너무 맛있다.
옛날에 이렇게 구울 때면, 아이들이 이 베이컨을 먹겠다고 모두 모여들었다고 한다. 정말 너무나 바삭하게 구워지지 않았는가!
조리를 하는 중에, 미국에 있는 딸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미국은 추수감사절이 아직 한 달도 더 남았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추석은 이미 지난달에 지났는데... 캐나다는 10월 둘째 월요일이고, 미국은 11월 넷째 목요일이다. 각기 나라별로 이렇게 날짜가 다른 것은, 아마도 수확하는 시기가 달라서가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캐나다는 더 북쪽이니 미국보다 수확을 빨리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내가 엊그제 대부분의 텃밭을 정리한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딱 맞는 시기에 맞이한 추수감사절인 것이다.
전화를 끊고서 나는 크랜베리 소스를 만들었다. 미리 만들어서 실온의 상태로 서빙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올해 나온 신선한 크렌베리에 오렌지 껍질을 다져 넣어 향을 더했다. 크랜베리는 끓이다가 보면 늘, 빨간 보석처럼 보인다. 맛도 달지 않고 새콤하기만 한 것이 딱 취향에 맞는다.
칠면조를 마저 익히는 동안, 곁들일 것들을 준비했다. 수확물의 대표로 호박을 먹는 것이 보통이란다. 처음에는 서양 호박을 먹자고 해서 버터넛 스쿼시 하나 남은 것을 따왔는데, 지난번에 따놓은 조선호박이 어쩐지 더 구미가 당겼다. 서양의 추수감사절에 한국의 호박은 어쩐지 좋은 조합 같았다. 잘랐더니 노랗게 익은 모습이 색감도 합격이었기에 이 녀석으로 당첨되었다. 그 외에도 감자는 쪄서 오븐에 다시 구울 수 있도록 준비했고, 당근과 꼬마 양배추는 각각 삶은 후, 물을 따라내고 버터에 버무려서 완성할 수 있게 준비를 완료하였다.
이제 칠면조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준비했던 부가 반찬들을 모두 동시에 마무리하였고, 테이블 세팅 준비를 완료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칠면조를 잘랐다. 원래 서양에서는 가금류 요리를 하였을 때, 집안의 가장이 잘라서 나눠준다.
식구들이 다 모여서 먹었다면 여러 가지를 상 위에 올려놓고 추가로 덜어가며 먹겠지만, 우리는 이번에 갑자기 차리면서 자식들도 부르지 않았기에, 거창하게 하지 않고 아주 큰 접시를 꺼내서 그냥 한꺼번에 모두 담아서 서빙을 하였다.
식탁 위에는, 가을걷이를 하면서 꽃병에 꽂은 깻잎과 깻잎 꽃대가 자리 잡았고, 3대째 물려받은 촛대를 놓았다.
접시 위에는 야채들을 색 맞춰 담았고, 칠면조는 크랜베리 소스를 찍어서 먹었다. 빨간색이 화려한 크랜베리 소스는 칠면조와 정말 찰떡궁합이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조금 얹어서 먹어보았는데, 정말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거위와 함께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고, 한국식이라면, 닭가슴살 같은 것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식사를 하면서 남편은 옛 어른들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 했던가. 크리스마스같이 왁자지껄하지 않은, 그저 조용한 우리의 추수감사절은, 한국의 추석과도 또 다른 모습으로 흘러갔다. 가끔 남편의 눈가에 스치는 눈물을 보며, 나는 그저 손을 꼭 잡아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고맙다고 말했다. 남편은 내 덕분에 드디어 추수감사절을 다시 맞이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했고, 나는, 이렇게 멋진 식사를 준비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가을의 수확을 일궈낸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나눴다.
식사를 마치고는 디저트로 호박파이를 잘랐다. 내가 밖에서 몇 번 사 먹어봤던 호박파이는 솔직히 별 맛이 없었는데, 이 파이는 정말 별미였다. 생크림을 휘핑해서 올리고, 그 위에 계핏가루를 솔솔 뿌려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남편도 평생 먹어 본 파이 중 최고라는 감탄사를 날리며 좋아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니,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6인분/서양식 계량(1컵=240ml)
재료:
생 크랜베리 (또는 냉동 크랜베리) 3컵 (340g 정도)
자일리톨 1/3컵 (또는 설탕)
물 3/4컵
오렌지 제스트 (껍질의 노란 부분만 잘게 다져서 준비) 1개 분량
기타 취향에 따라서 계핏가루나 넛맥, 올스파이스 등등을 넣어도 된다 (옵션)
만들기:
1. 모든 재료를 다 섞어서 냄비에 담아서 끓인다.
2.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이고 15분 정도 졸여준다.
3. 감자 으깨는 도구를 이용하여 크랜베리를 으깨주고, 농도를 확인하여, 적당히 졸여진 것 같으면 불을 끈다.
4. 서빙 용기에 담아서 실온으로 식힌 후 상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