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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Sep 22. 2022

잔뜩 벌레 물리고 감사할 줄이야

나는 물것이 잘 타는 편이다. 그래서 여러명이 같이 있어도 혼자 물리는 그런 타입이다. 텃밭에 물 주러 나가면 아주 쉽게 물린다. 모기들은 꽃밭 잎 뒤에도 숨어서 쉬고 있다가, 물벼락을 맞으면 모두 쏟아져 나온다.


그래도 요새는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서 모기가 좀 덜한 것 같아서, 간혹 한 두 군데씩 물리곤 하는 정도다. 물린 자리는 일반적으로 심하게 부푼다. 약간의 알러지 같은 것이랄까? 


엊그제는 저녁때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는데, 허리께가 근질근질한 거다. 뭐지? 언제 물렸지? 그런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자기 전에 샤워하려고 벗어보니 잔뜩 물려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물렸어?


그러다가 보니 모양이 좀 이상했다. 허벅지부터 배 옆구리 쪽으로 띠 모양으로 형성되어있었고, 평소 내가 물리는 스타일처럼 넙적하게 부풀어 오르지 않고 빨긋빨긋 솟아 있었다. 


순간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거 뭐지? 물린 거 아니고 혹시? 띠 모양의 대상포진?

(보기에 좋지 않을 저의 배 사진이나 대상포진 자료 사진은 생략합니다! ㅎㅎ)


급하게 인터넷을 검색했다. 보통은 물집이 있는 포진 모양이고, 발생 전부터 약간 몸살기가 있거나 근육통이 있는 것이 보통이라 나와있었지만, 간혹 벌레 물린 것인 줄 알고 방치했다가 뒤늦게 대상포진인 것을 알아서 치료하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


모양도 사람마다 다르고, 나타나는 양상도 다르다고 하니 바짝 긴장이 되었다. 여행 계획도 잡혀있고,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앓아누우면 너무 골치가 아플 것이다. 그러자 두통이 마구 몰려왔다. 음. 심호흡 한번 하고...


물린 모양을 잘 보았다. 반바지 안으로 벌레가 기어 들어갔다면, 돌아다니면서 물은 거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세어보니 모두 14군데였다. 일단은 위치하젤을 바르고, 혹시 모르니 대상포진에 효과가 있다는 동종요법의 Rus tox를 몇 알 털어 넣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면서 근질근질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버티면서 잤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확인을 했더니, 발진 있는 곳들은 뾰로통하게 올라왔지만, 더 번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만일 대상포진이라면 옆으로 발진이 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휴! 남편은 벌레였던 것 같다며 입었던 옷들과, 그와 함께 세탁바구니에 들어있는 것들까지 싹 쓸어서 세탁기를 돌렸다.


그래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지만, 오후가 되어서도 발진의 수가 늘지 않았다. 그러더니 반대쪽 무릎 근처에 비슷한 발진이 하나 더 나타났다. 대상포진은 몸의 같은 쪽에서 발생하니 저건 아닌 거다. 비슷하게 붓고 비슷하게 가려웠다. 웃음이 나왔다.


벌레 물리면 짜증이 올라오는데, 이젠 벌레 물리니 웃음이 나오는구나. 세상만사가 역시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 전체에 퍼져 십여 군데를 물렸을 때 참 투덜댔었는데, 이젠 그저 "가렵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심리적 반응이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대상포진 소동은 끝이 났다. 그리고 하루 더 지난 오늘 낮, 말벌에게 쏘였다! 에효! 허둥지둥 동종요법 Ledum 주워 먹고, 남편이 가져다준 얼음으로 90분 찜질하고... 아직도 좀 욱신거리기는 하는데, 붓기는 바로 잡혔다. 인생은 이래서 늘 예측불허. 


한국 가서 정리해야 할 전셋집이 여태 나가지 않고 있는데다가, 집주인이 제날짜에 주겠다는 말을 안하고 계속 얼버무려서 몹시 신경이 쓰이는데, 인생이 예측불허라 생각하고 마음을 좀 더 느긋하게 가져봐야겠다. 대상포진도 아니니 말이다.


마당을 가꾸려면 물릴 수 밖에. (왼쪽에 기어 오르는 것은 더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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