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미안했던 한국 방문
한국에 다녀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무척 바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도저히 뭔가 할 짬이 나지 않아서 브런치 글도 쓰지 못했다. 물론, 내가 하고자 생각했던 다른 일들도 거의 하지 못했다.
다녀와서 돌이켜보니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는다. 하지만, 아마 다시 간다 해도 또 역시 별다르지 않은 한 달을 보내고 오리라 싶다.
내가 이번에 한국을 갔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 남아있는 내 물건들의 정리였다. 캐나다로 올 때, 서울에 전셋집을 그대로 두고 왔다. 물론, 내 뒷 일을 봐주겠다고 말했던 집주인이자 후배의 말이 있기도 했고, 나 또한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에서 그 집을 급히 정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결혼 후에 돌아와서 정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인생은 늘 그렇듯,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 '기생충'에서 그 아빠가 "무계획이 계획이다."라고 할 만큼, 미리 계획했던 것과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지는 일이 다반사이다.
정리를 하러 오기로 했던 때에 팬데믹이 시작되어서 한국 방문이 무산되었다. 그리고 내 거쳐를 챙겨주겠다고 했던 그 후배는 이혼을 했다. 그 다가구 주택을 지을 때 평생 살겠다고 지은 그녀의 꿈의 집이었는데 결국 그 집을 팔아야 했다.
물론, 서울에 거쳐가 있어서 좋았던 것도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딸이 갑자기 한국에 갔을 때에도 그곳에서 잘 지낼 수 있었고, 지난여름에는 남동생네 식구들이 한국에 갔다가 그 집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족이나 내가 얼마나 그곳에 자주 가겠는가. 돈을 거기에 묶어두고, 집은 관리가 안 되어서 쉽사리 곰팡이가 슬어버리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게다가 새 집주인은 집세를 올릴 생각이라는 통보를 해왔다. 그래서 이번에 전세기간이 끝나는 것에 맞춰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내 계획대로 척척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한국의 금리가 인상되면서 부동산 시장이 갑자기 얼어붙은 것이었다. 집세를 올리겠다며 자신만만하던 집주인은 집이 나가지 않자 전세금을 주겠다는 대답을 회피한 채 내 속을 태웠다.
그런 와중에 한 달의 한국행을 잡아두었으니 우리는 무조건 가야 했고, 전세금을 당장 받을 수 있든 그렇지 않든 나는 짐을 정리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머릿속으로는 전세금 받는 문제로 복잡했지만, 몸으로는 산더미 같은 물건의 정리도 큰 일이었다.
억지로 방 세 개를 만든 자그마한 전셋집은 물건들로 꽉꽉 차 있는 상황이었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들어갈 때의 마음 같아서는 "어차피 뭐가 있는지 다 기억이 나지도 않고, 그것들 없이도 3년을 살았으니 미련 없이 정리해야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가서 뚜껑을 열자 상황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이것은 짐 정리가 아니라, 과거 청산이었던 것이다. 추억이 얽혀있는 물건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져가면 잘 쓸 것 같이 보이는 물건들까지, 이것들을 내게서 떼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퀼트 선생을 십수 년 하는 동안 쌓인 원단과 부자재들, 비즈공예 재료들, 거실 벽을 가득 채우고도 방 안에까지 꽉꽉 찬 책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키우며 생긴 간직하고 싶은 물건들까지 있으니 정말 매 순간이 당황스러웠다.
물건의 일부는 가져오고, 물건의 일부는 나중을 대비해 보관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 처음 세운 계획이었다. 가져올 짐은 일단 배로 부치고자 해서, 이삿짐 박스 20개를 배달받았다. 그러나 막상 짐을 꾸리며 보니, 이 많은 것들을 가져간다고 해서 다 어디에 둘 수 있을지 막막했다. 비워야한다는 소리가 내면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짐을 10 박스로 줄이고, 보관할 물건들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대부분의 물건은 중고물품 판매 앱인 당근을 이용했다. 우리 집에서는 하루 종일 "당근!"이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제는 이 일이 그렇게 생각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는데에 있었다. 결국은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었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멀리 한국까지 함께 온 남편은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 부탁에 맞춰서 박스에 테이프를 붙여주거나 식사를 준비해주는 일 정도였다. 마당 있는 캐나다 집에 살다가, 짐이 가득한 좁은 공간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남편은 벌을 서는 것 같았으리라.
첫 며칠은 전세금을 받기 위한 일을 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변호사 친구의 도움을 받아 난생처음 지급명령서라는 것도 써봤다. 그러고 나서는 짐 분류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물론, 편찮으신 어머니를 만나는 일도 이번 방문의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종종 어머니를 뵈러 갔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주 갈 수는 없었다. 대중교통으로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곳이기에 일부러 차를 렌트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만큼 자주 가지 못했다. 내가 시간 때문에 종종거리는 줄 아시는 어머니는 뭐라 하지도 못하고 기다리시다가, 떠나기 이틀 전에야 안타까움을 표현하셨다.
"벌써 낼모레 간다고? 어떻게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갔니?"
그랬다. 시간은 정말 빨리 갔다. 친구들에게는 연락도 못 했다. 그나마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친구들은 알아서 먼저 연락을 해줬고, 내가 있는 곳까지 와서 짐 정리를 도우며 대화를 나누었다. 나를 아끼는 몇몇 친구들은, 오히려 만나지 말고 나중에 캐나다 돌아가서 영상통화로 만나자고 배려해줬다. 종종거리는 내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며 나보다 더 안타까워했다. 아예 한국 왔다는 연락을 못 한 친구는 더 많았다.
와중에 집까지 찾아온 친구들은, 임시 거처에서 식사가 어려울 것 같다며 먹을 것들을 챙겨 오기도 했다. 고추장도 한 숟가락, 깨도 한 움큼, 김치 조금 등, 남지 않을 만큼의 음식들이었다. 일하면서도 때로는 맛있는 것도 먹어야 한다며 관자를 직접 인천에서 생물로 사들고 온 친구도 있어서, 그 덕에 근사한 저녁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며 종종거리느라 나는 모두에게 미안했다. 어머니께 죄송했고, 동생에게 미안했고, 친구들에게 미안했고,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미안했다.
농담처럼 말하기를, 한국 가면 친구들보다도 먼저 만나야 하는 미용실 언니도 못 만났다. 돌아와서 딸과 통화하면서 "그래서 결국 머리를 못 자르고 왔잖니!"라고 말했더니, 딸이 어이없어하면서 말하더라.
"그 반나절을 못 내셨어요?"
그랬다. 그 반나절을 못 냈다. 주변인들이 모두 어이없어 했다. 나라고 왜 한국에서 머리 손질을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정말 그 시간 내기도 아까웠다. 어차피 캐나다 돌아와 봐야 누구를 딱히 만날 것도 아니고, 농사짓고, 집에서 글 쓰고 있을 텐데 머리는 해서 뭐하냐며 스스로 핑계를 댔다. 안과 진료도 못 받았고, 건강검진은 꿈도 못 꿨다.
이렇게 모두에게 미안했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니, 비행기에 앉아서 참으로 마음이 씁쓸했다.
"나, 뭐 한 거지, 한 달 동안?"
급격히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러고는 다시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그래도 어머니를 만났고, 안아드리고 어머니의 상태를 알게 되었으니 그걸로 감사하게 여기기로 했다. 전세금은 다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일부 받고 11월 말에 마저 다 받기로 약속을 받았으니 그것도 어느 정도 해결을 한 셈이다. 동생 필요한 것도 좀 도와줄 수 있었으니 그것도 나름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몇몇 친구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나눴고, 못 본 친구들과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으니 그것도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남편을 주로 방에 가둬뒀지만, 막판에 부지런을 떨어서 결국 4박 5일의 빡센 여행을 감행하고, 한국의 모습을 일부 보여줬으니 그것도 나중에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병원 투어는 친구네 치과를 방문해서 스케일링받은 것으로 퉁치면 될 것이고, 남편과 한의원도 방문했으니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쇼핑은, 막 쓰는 머리핀 두 개와 빨간약을 샀으니 아예 못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리라. 짐은 싹 정리해서 정말 많이 버렸지만 미련이 많이 남은 물건들은 미래에 정리하자며 남겨두었다. 그리고 일부는 직접 들고 오기도 했다.
살면서, 욕심을 내자면 끝이 없고, 마음이 서운하려 해도 끝이 없지만, 또 이렇게 열거하다 보니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던 한국 방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이렇게 열심히 달렸으니 다음번 방문은 언제가 될지 몰라도 좀 여유롭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위안을 해본다. 물론, 그때에도 미안할 일은 또 있겠지만 말이다.
이제 한 달 동안 비워둬서 미안했던 집안과 정원을 보듬어야겠다
소식 기다려주신 분들께도 또 역시 죄송한 여행이었습니다. 한 달간 글을 안 쓰다 보니, 차분히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이 몹시 어려웠습니다. 그 와중에도 떠나지 않고 기다려주신 덕분에, 꾸준히 구독자가 늘어서 어느덧 2000명이 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간신히 포스팅을 이렇게 마무리했으니, 한국에서 지낸 시간에 대한 글들도 차츰 정리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