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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May 15. 2024

딸의 마지막 졸업식

아름답게 끝내고 새로운 여정의 시작

딸의 일정에 맞춰서 미국에 왔다. 졸업 작품 상영회와 졸업식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기간을 넉넉히 잡고 왔고, 어제 졸업식까지 모든 공식 일정을 마쳤다.


아이는 긴 여정을 지나 자신의 마지막 학교를 졸업했다. 홈스쿨링을 했던 아이는 대학이 첫 졸업이고, 대학원이 마지막 졸업이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유는, 미국에서의 예술 전공은 석사가 마지막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공부는 그만하고 세상으로 나아갈 때라는 것이다.


그저 사람을 잘 따르고, 호기심이 많던 어린이었던 딸아이가 이제는 진지하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딸은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시작하면서 남들과는 다른 여정을 걸어왔다. 그때 했던 선택이 잘한 것이 될까는 사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아이가 행복해지기만 바랐던 것 같다.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 페이스북에서 올려주는 9년 전 과거에서, 딸아이의 출판기념회가 떠올랐다. 그래, 그때에도 남다른 여정이었지. 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남들이 고등학교 다니던 나이에 집에 있으며, 자신만의 영어 문학잡지를 격월간으로 출판하기 시작했고, 3년간 발행했다. 유료 구독자들은 정말로 아이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꿈을 가진 소녀를 서포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출판사 사장님의 눈에 들어 단행본도 출판하였고, 혼자 모든 준비를 해서 미국 대학에 들어갔다. 전액 학비 지원받고, 우리가 냈던 것은 기숙사 비용뿐이었다. 그 과정이 물론 쉽지는 않았다. 맨땅을 달걀로 때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원하는 대학보다는 돈을 많이 주는 대학으로 가야 했다.


대학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자신이 꾸는 꿈과 너무나 다른 대학에서 많은 실망을 겪었고 상처를 입었다. 대학만 가면 창고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명 또라이(!)들을 만날 거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가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현대 교육에 길들여져서 차근히 따라가려 할 뿐 모험과 탐구를 원하지 않았다.


영문과로 들어갔지만, 교양미술 시간에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전과를 하였다.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영문학과 문예창작을 부전공으로 졸업했다. 무엇이든 진지하게 고민하고 깊게 파고드는 아이를 질시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있었고, 너는 잘하니 어디서든 잘 될 거라는 말을 할 뿐, 선정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불공평한 사회를 마주하며 많은 차별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힘든 시간이 있었다.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버텨냈다. 이어진 팬데믹 시즌으로 인해 엄마에게 올 수도 없고, 미국에서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혼자 가족 없는 한국에서 가라앉은 채 지내야 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서점의 유명한 계단 문구


그때 아이와 끊임없이 이야기 나눈 것은, 다 지나가고 결국 다시 일어날 거라는 것이었다. 파리의 셰익스피어 서점의 계단에 쓰여있는 글귀를 보내주며, 너는 비록 보지 못하지만, 너에게서 나오는 그 빛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혹여라도 아이가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결국은 그 시간들 동안 아이는 웅크린 상태로도 끊임없이 미래를 준비했던 것 같다.


결국 아이는 뒤늦게 엄마 품으로 돌아왔고, 반년의 휴식을 취한 뒤, 팬데믹때문에 일 년이나 미뤄졌던 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상처 투성이었던 아이는 많이 두려웠을 것이다. 이 새로운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대학 입학 때처럼 엄마가 와서 셋업을 해줄 수도 없었기에, 혼자서 모든 일들을 감당해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의 도움을 받지 않는 어른으로 서고 싶었다.


학교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서기로 결심했다. 늘 겸손하려 조심스럽게 행동하다 보니 움츠러들곤 했던 순간들이 전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며, 그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시작했다.


필요한 순간에 앞장서서 학교 일을 맡아서 했다. 나댄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두 귀찮아하는 일들을 솔선해서 하면서, 교수들도 과 친구들도 오히려 아이를 바로 보기 시작했다. 잘난 척한다고 평가하는 대신, 친절하고 성실하며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일들을 놓치지 않고 잡았다. 외부 프로젝트를 맡아하는 학교 프로그램에서 프로듀서를 했고, 자신에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풀어나갔다. 학비와 생활비를 제공해 줄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는 악착같이 살아야 했다. 


할머니와 내가 학비 도움을 조금 주기는 했지만, 생활비는 한 번도 보내준 적이 없었다. 아이는 그 밖에도 학교에서 조교를 하고, 과외도 하고, 디자인 외주 작업도 맡아서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놀 수 없었다. 파티 같은 것은 즐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기나 후배들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외부와의 관계를 이끌어가는 데에 성공을 한 것이다.


학교 수업에도 열성적이었다. 들을 수 있는 모든 과목을 들었고, 남들이 영화 한 편을 만들 때, 두 편을 만들었다. 그건,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함도 아니었고, 그걸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그 작품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오는지를 알기 위한 스스로의 싸움이었다.


아이가 나와 홈스쿨링을 하면서 배운 것, 그리고 지금은 새아빠가 된 아이의 멘토를 통해서 배운 것들 중에 가장 큰 자산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그것을 왜 원하지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부모를 자랑스럽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도 아닌,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탐구하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 그것이 아이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하루 24시간은 1분도 허투루 쓰일 수 없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산 덕에, 아이는 빚 없이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자기를 위한 투자였다.




우리 부부는 4시간 거리에 있는 내 남동생네 집에서 닷새를 보낸 후, 딸이 사는 동네에 도착했을 때 딸아이는 논문 마무리를 하다가 나와서 우리를 꼭 껴안았다. 대학원 3년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물론 아이가 겨울방학마다 집에 오긴 했지만 말이다.


그다음 날은 졸업영상 상영회에 갔다. 학생들의 영상 작품을 나흘간 상영하는 기간이 있었고, 졸업작품도 그때 함께 상영되었다. 아이의 애니메이션은 8분이나 되었는데, 1인 애니메이션으로는 아주 긴 영상이었다. 그걸 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갈아 넣었는지 알기에,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을 보면서 나까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상영이 끝나고 나서 앞에 나와서 짧은 스피치를 하는데, 영상의 의도를 들으면서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스토리들은 언제나 아무 일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뭔가 터지며 시작되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 중에는 그토록 평화롭게 아무 일도 없는 기간이 실제로 있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과, 그리고 그 문제와 별도로 발생하는 다른 사건을 묘사하고 싶었다고 했다. 남을 돕고, 또 남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해와 마음의 껄끄러움까지 모두 안고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묘사된 작품이었다.


그리고 졸업식까지는 다시 거의 한 주일이 남아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바빴지만 틈틈이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졸업 후에 1년간 학생 비자 연장으로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는데, 학교에서 진행하는 외부 프로젝트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강사 자리도 함께 얻었다. 그래서 아이는 계속 학교 근처에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제 기숙사형 주거형태에서 나와 아파트를 렌트해야 할 때였으므로, 함께 집구경을 다녔다. 지금까지는 자전거를 이용했지만 학교를 벗어난 곳에 아파트를 구하면 차도 필요하기 때문에 차도 알아보러 함께 다녔다.


아이는 부모님과 집 보러 다니는 거 함께 해보고 싶었다며 좋아했다. 곧 쓰러질 거 같은 집부터 화려한 아파트까지 다양한 집을 보았다. 집이 비싸다고 꼭 더 좋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네 인생처럼 말이다.


관광할 생각은 없었지만, 집을 보라 다니다가 라일락 공원을 함께 방문했다. 라일락 축제 직전이라서 오히려 한가로이 즐길 수 있었다.



어느덧 주말이 다가오고, 두 번의 졸업식이 열렸다. 금요일에는 학교 전체의 졸업식이고, 학생 개별 학위수여식 대신에, 단과대 별로 대표가 받는 행사였다. 딸아이는 미대 대표로 선정되었기에 우리는 그 졸업식에 VIP로 초대되었다.


그다음 날에는 단과대별 학위 수여식이 있었고 아이는 학생 대표로 짧은 연설을 했다.



딸아이의 인생 모토는 “올해가 인생 마지막 해인 것처럼 살기”이다. 연설문에서, 자신이 매일 열심히 살 수 있는 이유는, 당장 내일 죽지는 않지만, 인생이 딱 일 년 남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하루하루가 소중해서 보다 더 성실하게 살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정말 일 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하루하루를, 바로 이 학교에 남아서 보내기로 선택하고 그렇게 삼 년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자기를 사랑해 준 학교와 교수님들과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는 연설이었다.


아이의 애절함이 느껴져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른 학생들도 자신의 모습에 감정이입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모양인지, 그런 종류의 인사를 많이 들었다. 졸업식에 온 내 조카 (딸의 사촌언니)도, 만일 자기 졸업식에서 누가 그렇게 연설했다면 아마 자기는 펑펑 울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 대학에서 졸업하는 경우, 보통 조촐하게 참석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남동생네 식구들까지 와줘서 제법 왁자지껄한 졸업식이 되어서 더 좋았다. 뭔가 진짜 가족행사가 된 기분이었다. 한국 같으면 졸업식 후에는 짜장면을 먹어야겠지만, 하하! 우리는 미국에 있으니 양식으로 가족 저녁식사를 가졌다. 


졸업식이 끝났고, 그와 함께 논문도 제출해서 딸은 완전히 학생 신분을 벗어났다. (많은 학생들이 논문을 한 학기 더 여유를 갖고 마무리한다) 정말 끝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딸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주말을 함께 보냈고, 아이는 월요일에 첫 출근을 했다. 우리는 뉴욕으로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려고 학교를 방문했는데, 딸은 직장상사와 미팅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상사가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떠나면서 아이를 품에 꼭 안는데, 참 여러 가지 마음이 들었다. 하나를 잘 마치고, 이제 또 새로운 시작을 하는 아이, 얼마나 머릿속이 팽팽 돌지 보이는 듯했다.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특히나 유학생은 늘 비자 문제가 발목을 잡으니 그것을 제대로 잡는 게 관건이리라.


아이에게 새 출발을 축하하는 카드를 건네주고 우리는 자리를 떴다. 거기에 쓴 말은 대략 이랬다.


새로 출발하는 기분이, 긴장되기도 하고, 살짝 두렵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잘 해왔듯 또 잘 해낼 거야.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 너는 계속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 아직 완벽할 수는 없겠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가끔 미성숙한 너 자신을 발견한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너 자신을 믿고, 너의 가능성을 믿기를 바라. 엄마 아빠가 응원하고 있다는 거 늘 기억하고!


딸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며, 우리는 아이의 성장을 또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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