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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에 저금통을 가져온 사람

by 라다

꽃가루가 날려 콧잔등과 볼이 간지러워 손으로 얼굴을 긁으며 봄이 온 것을 실감하는 어느 봄 날이었다.

아직은 저녁에 바람이 차서 봄이지만 니트를 입어 등과 팔이 털실로 살갗이 가려워 옷을 벗고 싶었던 그 날은 점심을 먹고 다음 강의를 들으려고 강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언덕을 오르며 무거운 뱃살과 전공책들을 들고 힘들었다. 그 와중에 잠시 숨을 고르려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서 본 동산에는 하얀 눈이 쌓인 땅처럼 화사한 기운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맑은 반달눈의 웃음으로 얼굴을 가득 채우며 외국인 교환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정말 오염되지 않은 청량한 천사의 모습 같았다.


수업을 듣는 내내 그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수업을 듣고 나서 유일하고 내가 알고 있던 우리 학교에서 공부 중인 외국인 친구에게 사람을 하나 찾아달라고 했다. 외국인이랑 대화를 하고 있었으니 분명히 교환학생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까 본 사람이 누군지 같이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고 우리 학교 사람인지 궁금했다. 최대한 그 사람의 외모를 묘사하기 위해서 나의 찰나의 기억력을 총동원했다.



수소문 끝에 알게 된 그 사람은 나보다 3학번이 높은 사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연락처를 알게 되고 나는 그 사람과 카톡을 주고받게 되었다. 오래전 일이라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왜 연락을 하게 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과의 연락으로 내 얼굴은 봄기운의 꽃냄새처럼 싱그러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사람의 연락처를 나에게 준 사람이 내가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어서 연락처를 궁금해하지 않겠냐고 언질을 줬을지는 모르겠다.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점점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연락을 기다리게 되고 혹시나 학교에서 마주치지는 않을까 두리번거리며 비슷한 사람을 쳐다보며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나와의 연락을 계속 이어가던걸 보면 그 사람도 나에게 관심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선뜻 만나자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모든 것이 새롭고 두려웠다. 앗, 내 마음을 읽었는지 친구들과 밥 먹고 후식을 먹으러 간다는 나의 카톡에 그 사람은 나에게 아이스크림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날씨가 더운데 후식으로 친구들이랑

아이스크림 먹어”



나는 아이스크림을 보내준 것이 고마웠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고기를 사주겠다며 농담으로 대답을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정말 만나자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연락만 하던 사람을 만나게 돼서 너무 설레고 기뻤다. 나의 첫 소개팅이 이렇게 이뤄진다는 생각에 너무 떨렸다.


그렇게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으면서 어떻게 교양수업에서 A+을 받았는지 다음 학기에는 어떤 수업을 듣는지 그 사람의 학교생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나에게는 그 만남이 일방적인 소개팅이었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저 어린 후배와의 밥 먹는 시간 그 이상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선배들의 말이 기억났다. 그럼 나에게 기프티콘은 왜 보내줬을까?

역시 나 혼자 앞서가면서 그 사람을 이성으로 생각했나? 내가 오바했나?


밥을 먹으면서 이 대화는 소개팅이나 호감이 있는 사람들의 대화가 아닌 것을 눈치챈 나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고기를 다 먹고 나갈 채비를 하던 중에 그 사람은 나에게 후식을 자기가 사겠다며 맥주를 한 잔 마시러 가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고,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고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쨍그랑 쨍그랑 동전 소리가 가득한 테이크아웃 컵을 가방에서 꺼낸 그 사람은 100원, 500원짜리 동전을 세면서 이 정도면 맥주 정도는 살 수 있겠다며 굉장히 기뻐했다. 삼겹살 기름으로 미끌거리는 식탁 위에 동전 탑을 쌓으며 얼마 얼마라고 세는 모습을 보고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설마 저 동전으로 정말 맥주를 마시러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했다. 제발 아니길 바랐다.


이 사람은 왜 저금통을 가지고 왔을까?

현금이 동전밖에 없었을까?

카드를 잃어버렸을까?

정말 돈이 없는 걸까?

아님 자기가 알뜰하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을까?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고 내 귓가에는 동전의 짤랑거리는 소리가 맴돌며 그 사람에게

갖고 있던 호감이 0%가 되었다.



당시 주말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용돈 마련을 했던 나에게 3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쓰는 것은 꽤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 고기를 사겠다고 말한 사람은 나였으니 결제를 하고 나왔다. 그래도 선배니까 나에게 고기를 사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고깃집에서 나와 대학가 할인마트에서 맥주 두 캔을 사러 갔다. 공원에서 노상을 하자는 것이다.

그래, 오늘 한 번 이 사람과의 만남에서 끝을 보자는 마음에 나는 군말 없이 따랐다.


맥주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서 그 사람은 테이크아웃 잔 저금통에서 동전을 탈탈 털어서 맥주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나는 또 그 사람의 자랑을 들었다. 천사 같은 후광을 비추며 반달눈을 보이던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던 나는 도대체 내가 왜 이 사람이랑 맥주를 마시고 있는지 현타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만나는 사람이 저금통을 가져와서 맥주를 사줬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비록 그 사람은 나와의 첫 만남을 소개팅이라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연락을 줄여가고 학교에서도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고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그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했다. 잊고 있던 대학시절의 저금통 사건이 기억났다.


알뜰하게 잘 살 것 같다. 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