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인간이란 역설
십년 간 집필하는 동안 가끔, 밖에 나오면 계절이 바뀌어있었다. 이번에 1교를 끝내니 여름이 가고 가을이었다. 그 사이에 외출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가령 수술로 완치된 암추적 3년차 검사를 위해 한 번, 결과 듣기 위해 또 한 번, 그 두 번을 제외하고 뚜렷한 외출 기억이 없다.
검사 결과는 쾌청하다. 불편한 증상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다. 암 이전에 10년 앓았던 병에 비하면 천국이다. 그래서일까, 증상이 느껴지면 불안해진다. 기본값이 천국일 땐 세상에 무서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는데 어떤 오류로 지옥 같은 고통을 겪은 후 양쪽 사이 어딘가에 걸쳐져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다가도 느닷없이 걱정하는, 가련한 영혼이 된 것이다.
한 가지 이득이 있다면, 뭐든 잘해보고픈 생각이 옅어진다. 아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프지 않기 위해 지독하게 이어간 노력들은 암 발병으로 무색해졌다. 대체 뭐가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형식 또한 실질적 내용의 인식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것이나, 완성도를 끌어올릴 시간에 자잘한 실수들을 품고 더 멀리 가고 싶다.
병 때문에 정체되었던 기간이 길었기에 이젠 나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만은 아니다. 오래 앉아있을수록 불편한 증상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세상이, 미래의 독자들이 내 개인 사정을 참작해서 봐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특히 정형화되지 않은 작품은 그 정형화를 만들어낸 집단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도 상관없다.
누가 뭐라든 내 방식대로 가도 된다는 생각은 지난 병과 맞물려서 겪었던 사건들에 대한 트라우마의 해소를 도와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방해하는 현실을 마주한 후에 확신이 되었다. 내 작품에 오타가 몇 개든, 이런저런 구멍이 사방에 보인들, 설령 발로 써도 그들보단 잘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아직도 식칼을 잘 쓰지 않게 된 사건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던 정당방위를 쌍방의 다툼으로 둔갑시키는, 한술 더 떠 그러도록 편의를 봐주고 있던 작태에 비하면 맞춤법 오류와 비문은 얼마나 아름다운 흠인가!
의도적으로 설렁설렁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큰 추진력이 되는지, 완벽주의자라면 알 것이다. 1교에 이어 이제 시작한 2교도 윤문 수준이 아닌 퇴고의 유혹을 느끼는 나로선 좀 더 대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디테일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글에 대한 집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루 이틀 쓰고 말 거 아니잖아?
지난 한 달간 복숭아로만 간식을 준비했다. 올해 여름 내내 에어컨을 안 틀어도 그럭저럭 지낼 만 했는데, 생크림이 녹는다는 애로점이 있었다. 그래도 실온 34도에서 아이싱한 결과는 시멘트를 잘못 바른 길바닥처럼 거칠었다. 요거트 크림으로 해도 마찬가지, 장식 또한 시간 없어 대충한 모양새가 투박했다.
몇 명이나 기꺼이 지갑을 열겠는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회의적이다. 반대로 나는 시중 케이크를 안 사먹는다. 시각적으로 눈길을 끌지만, 너무 달다. 과일이 마르지 않고 보기 좋게 코팅처리하는 것도 결국 설탕이다. 혹은 잘랐을 때 미각적인 층위가 빈약하거나. 평균적인 취향이나 단가, 둘 중 하나는 잡아야 손해를 면하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취향이 아닌 내 취향대로 '시간의 단가'도 무시하며 10년을 투자한 내 작품들은 나에게 무엇을 돌려줄 수 있기에 여전히 붙들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이미 받았다. 이 작품들이 아니었다면 내 혼과 육은 분리되어 각각 어둡고 긴 터널 어딘가에 매장됐을 것이다. 숨막히는 암흑에서 동행해준 동지들에게, 이젠 내가 빛을 비춰줘야 할 때이다. 그래서 나는 교정교열인지, 윤문인지, 퇴고인지 모를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1교를 끝낸 후에야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나름 신경 썼다. 꽤 맘에 들어 선물도 했다.
그래도 내 눈에 보이는 미흡함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다. 시간이 부족했다지만, 심지어 리본도 엉뚱한 방향으로 묶었다. 전엔 내 사정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프다는 말을 하면 유리해질 상황에서조차 지독하게 공과 사를 구분해서 후자는 혼자 감당했다. 그러나 이젠 말할 것이다. 암 환자니까 좀 봐주라, 내 자신에게.
나에게 가장 혹독했던 사람은 결국 나였다. 앞으론 내 자신에게 누구보다 친절할 것이다, 완벽하지 않으니 인간인 것이다, 다시금 새겨본다. 정독하는 족족 새로 발견되는 미흡함은 작가가 인간이란 사실의 재발견인 것이다, 당당하게 우길 수 있을 때까지는 교정교열 해야겠지. 이미 시작한 2교도 힘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