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답답해지고 생각이 많아져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혼자 밖으로 나가 뻥 뚫린 공원을 걷고 또 걷는다. 꾸준히 혼자 하루의 목표 걸음 수를 채우며 명상하고 내 안에 있는 여러 고민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혼자 걷기'가 나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다. 요가나 필라테스와 같이 정적이고 스트레칭 같은 이완동작을 주로 하는 운동을 선호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매주마다 꾸준히 성실하게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새로운 운동자극에 내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을 열정도 지금은 나에게 없어서 퇴근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노을 지는 공원에 혼자 나가 어둑한 저녁 8~9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이 정도가 나에겐 딱 만족스런 움직임이다.
좁은 공간 속 쳇바퀴에 갇힌 햄스터처럼 달리고 싶지 않다.
매일매일 좁은 공간에서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똑같은 장면을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걷기를 하다 보면 멀미가 날 것 같다. 무거운 운동기구를 들어 올렸다 놨다가 하는 반복된 동작을 하는 행위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값비싼 PT를 받으며 열심히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 운동의 "ㅇ"도 모르는 무식한 이의 비겁한 변명일 수 있겠지만 일부러 땀을 비 오듯 흘려가며 숨을 헐떡이고 싶지 않다.
조금 더 넓은 공간에서 바람의 서늘함을 느끼고, 풀잎의 냄새도 맛고, 자연이 내뱉는 다양한 소리들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오르고 내려가는 등산이 난 오히려 더 나다운 운동이라 생각한다. 임용 시험을 준비하며 거의 1년 정도 아침 일찍 모악산(하산까지 딱2시간거리)을 오르고 내리던 그때의 운동이 오히려 나의 정신 건강을 지키고 체력을 키우는데 무엇보다 큰 몫을 했다고 믿는다. 눈앞에 푸른 나무와 풀잎과 붉은 흙의 냄새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를 위로했던 시간이었으며, 하루에 한 번씩 산 꼭대기에 올라 도장을 찍고 내려왔다는 성취감을 나름 내 인생의 자신감으로 바꿔 스스로를 단련하던 시간이었다. 1년 동안 꾸준히 지켜온 아침 등산의 참맛은 그 어떤 유산소 운동의 효과보다 더 설득력 있었다. 임용과 동시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모악산과는 멀어지게 되었지만 그 등산의 습관이 자연스레 동네 공원에서의 걷기로 이어졌다. 간편한 운동복장과 운동화, 야구모자와 워치만 있으면 1~2시간은 금방 걷고 또 걸을 수 있다.
나는 그야말로 '침전 중'인 인간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든다.
뭐든 '그저 그런', '재미없는', '관심 없는', '보통의' 마음들로 채우고 있는 요즘,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있는 능력 있는 후배들의 화려한 커리어가 부러워지다가, 조만간 가족들과 함께 어학연수를 떠나는 친구의 남편 자랑에 움츠렸다가, 장학사 시험을 준비하는 내 또래 교사들의 도전을 볼 때면 더욱 그 불안은 가중된다.
기약도 없이 2세를 위한 몸만들기라는 명목으로 2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는 정말 침전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은 마음대로 많이 느슨해지고, 아기 소식은 없이 속은 타고... 나이를 먹는 속도도 훨씬 가속도가 붙는 것 같다. 인생의 과업을 '빨리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오히려 새로움에 대한 낯가림의 울타리를 더 높여 놓았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나 승진에 대한 욕심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 각종 영양제를 의무적으로 챙겨 먹고 시험관 날짜에 맞춰 나의 모든 스케줄을 조정하는 내 일상 속에서 나의 평온함은 찾아볼 수 없다. 늦은 결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의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2세 계획은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고령 산모들의 마지노선까지 시도해봐야 할 것이고, 그 노력이 그래도 양가부모들에게 나름의 위안거리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요즘 나의 멘털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다. 초기에는 임신이 금방 가능할 거라 안일했고, 처음 임신했을 때는 자만했고, 두 번째 유산일 때에는 건강한 아이가 간절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기 심장 소리에 그동안 내 몸 관리에 대한 자책과 유산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뒤섞여 온갖 어두운 감정들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6번의 시험관 시도와 2번의 유산을 경험했다. 어찌 보면 지난 2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다시 2달간 몸을 만들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다. '다시 처음부터!'를 6번 겪고 나서 선뜻 '다시'를 외치기가 무서워진다. 흔들렸던 멘탈이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갈수록 시간이 많이 걸린다. 수십 개의 주삿바늘과 수십 알의 약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험관 후 혼자 마음을 졸이며 화장실에서 마주할 임테기의 한 줄이 더 공포스러울 뿐이다.
마음의 초조와 불안 때문인지 새로 먹기 시작한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일주일 넘게 불면 증세로 머리가 멍한 상태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카페인으로 직장에서 버티고 있는데 잠들어야 하는 시간에 몸이 초긴장 상태가 된다. 자다가 3~4번 깨다 자다를 반복하니 몸이 말이 아니다.
조금은 더 현명한 생각들로 나를 이끌기 위해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그동안 미뤄왔던 영어 공부도 조금씩 시도하고 무엇보다 꾸준히 글을 쓰며 내 안의 복잡한 감정들을 솔직히 내뱉어보려 노력 중이다. 머릿속을 미친 듯이 헤집고 돌아다니는 어두운 감정들을 나만의 단어와 문장들로 고백하는 순간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하게 되는 기도가 된다.
저 바다 깊숙이 잠영하듯, 새벽의 어둠 속 침묵을 견디다가 한 줄기 여명을 느끼며 그래도 그 어둠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지금을 긍정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계속 끄적이고, 찾아내서 다시 적어보고, 생각하며..
아직도 내게 주어지는 일말의 사건과 이벤트가 내 인생 스펙트럼 위에서 어떤 의미와 의도로 내게 다가온 것인지.. 나는 어떤 포지션으로 그때그때마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나은 것인지..
효율적인 방향과 경로를 따지는 계산적인 선택지와 의미 있는 결정 중에 나는 어디로 향하는지..
나의 맵핑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혹시 지금의 내 불안과 초조가 길을 잃은 낙오자의 심정인 것인지..
아니면 누구나 겪고 있는 보통의 감정을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극복해야 하는 것인지..
두 발은 땅 위에 단단히, 두 눈은 3m 앞을 보고, 두 손은 항상 쉬지 않고.
걷다 보면... 쓰다 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조금은 더 자세히 알게 되겠지.
바보같이 내가 가는 길이 어디인지,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이렇게라도 다짐하며.. 기도하는 건
그래도 지금 내가 가는 그 길 주변엔 여전히 내가 보지 못한 꽃밭이 많이 놓여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