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십 대에 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빠져 살았나.
나는 이제 오십 대 중반이 됐다. 몇 달 전 회사를 퇴사했다. 스물일곱에 결혼으로 인해 그만뒀다가 14년이 지난 마흔한 살에 다시 재 입사했다. 마흔 살은 이제 막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나이다. 재 입사를 강하게 원했던 회사에 대한 고마움과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입사부터 퇴직 하루 전까지도 회사 중심으로 살았다. 애정을 모두 쏟아부었다.
지나고 보니 후회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프면 병원을 가야 했는데, 회사 바쁘다고 미루다 병을 키웠다. 회사를 위한답시고 직원들의 고충을 대표에게 직언하다 보니, 직원들에게는 좋은 상사였으나 대표에겐 점차 생선가시 같은 존재였다. 내 회사처럼 일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회사 같은 입장으로 임했다. 너무 과했다. 과한 것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명언이 있는 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온 세월 동안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사실만큼은 위안이 된다. 누가 알아주든, 못 알아주든 간에.
퇴직 후의 삶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몇 년 전 작가로 등단한 게 큰 위안이 됐다.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건 정작 그것을 하지 않더라도 든든한 백이 됐다.
도서관을 매일 갔다. 틈틈이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내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들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그중 첫 번째 책이 <수레바퀴 아래서>였다.
내 이십 대의 대표적인 책. 누군가가 젊었을 적 읽은 책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연코 이 책을 꼽았다. 나는 왜 이 책에 열광했던가. 열광했고, 기억에 남았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이제 기억이 없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읽고 나서 알았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죄책감. 나의 욕망과 현실과의 괴리감. 거기서 오는 좌절감.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태함을 비겁하다며 끊임없이 자신을 질책한 나의 삶을 주인공 한스기벤라트를 통해서 들여다본 것이다.
위안을 받았고 한스의 죽음 앞에서 많이 울었다.
사람들은 인생의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며 지금을 살고 있다. 그러나 한스가 잃어버린 낚시, 산책, 친구처럼 가끔씩 멈춰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인생을 그나마 잘 유지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