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다고 당겨 쓰지도 훗날을 위해 아껴 쓰지도 말고.

by 신새벽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생애 동안 쓸 수 있는 에너지도 한정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만약 태어날 때 에너지가 가득 찬 상태로 세상에 온다면 마흔두 살의 나는 지금까지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썼을까. 그리고 남아있는 것은...


2022년 기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2.7세라고 한다. 나이와 에너지가 반드시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보통의 사람들은 애써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 그래프를 따라가며 산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통계를 기준으로 나는 내가 가진 에너지 총량 중 이미 반쯤은 쓰고 이제 반정도 남아있는 걸까. 그렇지 않을까 말하는 것도 왜인지 머뭇거리게 된다.


몇 년 전, 남편의 건강 때문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병의 치료와 회복에만 집중하며 보낸 날들이 있었다. 처음 생각으로는 한 달 길어야 두 달 정도의 시간이면 회복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기에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치료는 잘 진행되었다. 수술 후 각종 검사 수치도 안정적이었고 퇴원하는 날 의사 선생님께서 "그럼 6개월 후에 뵐게요." 하고 밝은 얼굴로 말씀해 주셔서 일단은 우리 앞의 큰 고비는 무사히 잘 넘겼음을 알 수 있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와서도 삶의 어떠한 거추장스러운 문장도 만들도 않고 회복을 위한 온전한 쉼에만 집중했다. 이 시기 다행히 수술 후 받은 약간의 보험금이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안정 궤도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신체적인 회복 너머의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에서 오는 회복도 있었다. 단순한 생활이 주는 마음의 안정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우리 자신이 전보다는 조금 더 인간다워짐을 느꼈다는 점이다.


단순한 생활이라는 것은 단어 그대로의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생활을 뜻한다. 나는 그것을 이미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기간 동안 골수 깊이 느끼고 있었다. 병원에 한 번이라도 입원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병원 생활이라는 것이 참 단순하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밤이 지나 아침 6시쯤이면 병실 밖 복도에 발소리가 하나둘 늘어난다. 어김없이 간호사 선생님이 가장 먼저 들어와 혈압을 재고 손에 꽂힌 바늘로 약물이 잘 들어가고 있는지, 밤새 대소변은 얼마나 봤는지 등을 체크한다. 그래, 여기까지는 의학적으로 필요한 사항들이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빠지지 않고 묻는 것이 있다.


"식사는 얼마나 하셨어요? 반찬은 뭐뭐 드셨어요? 소화는 잘 되세요?"


처음에는 반찬을 뭐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도 묻네 싶었지만 식판 반납하는 곳을 몇 번 드나들면서 생각보다 식사를 못 하시거나 음식의 대부분을 남기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먹고, 얼마나 먹는지는 그동안의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치료법과 약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다고 해도 사람을 살리는 첫 번째는 바로 음식이었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은 그냥 듣기에는 좀 거창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말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요즘은 밥을 먹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tv나 유튜브 같은 것을 틀어놓고 식사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혼밥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도, 식사시간이라는 잠깐의 짬을 이용해서라도 팍팍한 사회생활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벗어나 나만의 즐거움을 찾는 것도 모두 좋지만 가끔은 먹는다는 것의 본질과 식재료의 맛도 천천히 음미하며 그때만이라도 뇌가 먹는다는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좋지 않을까.


두 번째 단순한 생활은 자연을 가까이 하기. 흙의 느낌을 아는가. 바슬바슬한 흙을 손으로 비벼 골고루 섞어주었을 때의 코 끝을 스치는 흙냄새. 그 속에는 지렁이가 살고 지렁이의 배설물에는 질소, 인산염, 칼륨 같은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훌륭한 영양분이 된다. 여기에 햇볕과 물만 있으면 일단 땅을 품 삼아 사는 곡식, 꽃과 나무들은 뿌리를 내릴 준비가 된 것이다. 더 좋은 품질과 더 많은 수확물을 얻기 위해서 요즘은 다양한 농법이 적용되지만 크든 작든 농사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좋은 흙, 충분한 햇볕, 적당한 물.


사람도 살아가는데 그렇게 기본적이고 꼭 필요한 것들로만 건강히 뿌리내리고 많든 적든, 모양이 예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이 가진 만큼 열매 맺을 수 있다면 좋겠다. 흙의 느낌, 나뭇잎의 느낌, 바람의 느낌, 햇살의 느낌을 잊지 않기 그리고 나의 뿌리를 건강하고 단단하게 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을 가까이 더 가까이해야 한다.


마지막은 서로의 온기가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 집엔 '호두'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가 산다. 길냥이로 만나 가족이 된 녀석은 고양이답게 독립적이면서도 밤이면 꼭 곁으로 와 내 몸 어딘가에 자신의 몸을 기댄 채 잠이 든다. 나는 보드라운 털을 가진 이 작은 생명체가 전해주는 온기가 좋아 새벽녘 잠결에 어딘가 불편함을 느끼고도 일부러 자세를 바꾸지 않을 때도 있다. 호두를 만나고 무심히 지나쳤던 다른 길냥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들에게도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을 위한 환경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 세상은 인간과 동물, 식물 같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가진 온기로 채워짐을 알게 되었다. 작은 고양이 한 마리로 인해 어쩌면 내가 그래도 조금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에너지를 반쯤 쓰고 이제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때 순간 절망적인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남아있는 에너지가 빨리 소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몇 달 동안의 온전한 쉼을 가지며 나의 생각은 바뀌었다. 한 사람이 생애동안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내 삶이 마치 줄어드는 자동차 연료 계기판처럼 보이는 날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스스로 좋은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소하고 평범한 햇빛과 바람이 하나의 큰 에너지를 만드는 것과 같이 말이다. 결코 우리의 삶은 소멸만을 향해 가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젊다고 당겨 쓰지도 훗날을 위해 아껴 쓰지도 말고 자신만의 에너지로 꾸준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어느 해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 세 번의 계절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