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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Feb 19. 2022

20. 모든 건 길 위에 있었어




2015년 8월 19일. 순례길에 오른 지 36일 만에 산티아고에 도착하던 날 아침. 익숙해진 옷을 챙겨 입고, 걷기 전 스트레칭을 하고, 익숙한 무게의 배낭을 멨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한 달 동안 반복해온 아침 일상이 새삼 새로웠다. 숙소에서 출발하기 전 화장실에 들러 순례길 위의 내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지금까진 순례길을 걸으며 걸어온 거리를 계산하곤 했는데, 이젠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계산하려니 반대로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늘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도착을 미루고 싶어졌다. 20km, 10km, 5km.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남은 길이 아까다. 바람과는 달리 남은 거리는 계속해서 줄어들었고 점차 SANTIAGO라는 단어가 표지판에 반복해서 보이기 시작했다.


가능한 천천히 걸으며 그리워질 길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방향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 안내 표지판, 순례자들이 길가 철조망에 나뭇가지로 만든 십자가, 미련을 버리듯 걸어두고 간 옷가지들, 함께 길을 걷는 '우리'의 그림자. 산티아고 도심으로 들어서기 전 설치된 커다란 SANTIAGO 글씨 앞에 잠시 멈춰 기념사진을 찍었다. 평범한 일상이 흘러가는 도시에 들어서 가게를 지나고, 집을 지나고, 놀이터를 지나 산티아고 대성당이 있는 광장으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섰다. 배낭을 멘 사람들이 모두 한 곳을 향해 가니 더 이상 화살표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멀리서 음악 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곧이어 나타난 낮은 계단을 걸어내려 가, 짧은 터널처럼 생긴 문을 지났다. 문을 지나자 광장이 나왔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기가 산티아고인가?' 잠시 두리번거리다 산티아고 대성당을 발견했다. 아직 공사 중이라 한쪽은 철골 계단으로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아, 여기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그 산티아고'구나. 조금 기쁘고,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36일에 걸친 순례길이 그렇게 끝났다.


다비데와 손을 잡고 광장에 안으로 들어서, 서로의 도착을 축하하고는 대성당을 마주 보는 자리에 멈춰 섰다. 배낭을 내려놓고 벽에 기대앉아 한동안 대성당과 광장에 도착한 다른 순례자들을 바라봤다. 중간에 헤어졌는지 광장에 들어서는 친구를 발견하고 얼싸안고 기뻐하는 사람, 이미 한참 전 도착한 듯 둘러앉아 자리 잡고 휴식을 취하는 그룹, 한편에 조용히 앉아 성당을 바라보는 사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순례길의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의 끝은 생각했던 것처럼 아주 기쁘거나 감동적이지도,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느낀 기분은 약간의 후련함과 생각보다 특별할 것 없는 '끝'에 대한 공허함이었던 것 같다. 굳이 비교하자면 수능이 끝난 후 느꼈던 기분과 비슷했다. 혼자였다면 외로웠을지 모를 순간이었지만 다행히도 다비데가 곁에 있었다.


광장에 도착한 지 30분이 지나지 않아, 대성당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방씩 찍고는 점심을 먹으러 길을 나섰다. 이리저리 구경하며 맛집을 찾아다니다 다비데가 고심 끝에 고른 엠빠나다 (Empanadas, 스페인식 파이) 가게에 들어가 치킨, 대구, 문어가 들어간 엠빠나다를 한쪽씩 사서 나눠먹었다. 엠빠나다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순간은 희미해졌지만 그때 먹은 엠빠나다 맛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점심을 해결하고, 알베르게를 찾아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낮잠을 잤다. 한숨 자고 일어나 다비데와 저녁을 먹고 산책하며 산티아고의 야경을 감상했다. 대성당을 보고도 끝이 실감 나지 않았는데 저녁 10시가 넘어서도 다음 날에 대한 걱정 없이 야경을 즐기며 맥주 집으로 향하는 순간에야 이제 정말 순례길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순례자 숙소는 보통 저녁 10시가 되면 전체 소등을 한다.)


다음날 아침, 오랜만에 맘 편히 늦잠을 자고, 배낭 없이 가벼운 어깨로 숙소를 나섰다. 대성당 박물관과 산티아고 골목골목을 구경하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순례길 완주 인증서를 받으니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날 저녁, 나는 프랑스 길 끝에 있는 바다 마을인 묵시아 (Muxía)까지 가는 버스를 예약하고 다비데는 다음 날 마드리드로 떠날 준비를 했다. 짐을 싸는 그에게 그동안 빌린 옷을 건넸는데 그는 한사코 받질 않았다. 옷으로나마 그를 기억하고 싶어서 나도 더는 묻지 않고 옷을 다시 내 배낭에 넣었다. 다비데랑 눈이 마주친 순간, 엄마를 따라 우는 아이처럼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가 처음으로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도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마음에 가득 찼던 말이 흘러넘치듯 밖으로 튀어나왔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지 이튿날 아침, 다비데는 공항으로 떠나고 나는 묵시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다비데와도 첫 이별을 했다. 다시 홀로 남아 버스를 타고 순례길 끝의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마음이 뻥 뚫린 듯이 휑했다.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매일 나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 길에 온 걸까. 나를 찾기 위해서일까. 꿈을 찾기 위해서일까. 무엇을 찾기 위해 나는 이 길을 걷고 있을까. 길을 다 걷고 나면 내가 이 길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길이 끝나고, 길 위에서 만난 이들과 헤어지고 나서야 나는 이 길이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매 순간 한 걸음씩 걸어온 걸음들, 길을 걸으며 울고 웃고, 두려워도 용기를 내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고, 나와 다투고 화해하고 결국 나를 돌보며 걷는 법을 배웠던 날들, 그리고 그 여정에 함께해준 모든 사람들, 그들이 나눠준 이야기, 내게 베풀어 준 사랑과 선한 마음들, 그 모든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변화해온 나. 나는 목적지에 도착한 내가 아닌, 36일 간 매일 고민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한 발씩 내딛던 나를 만나기 위해서 이 길에 온 것이었다. 내가 찾고자 했던 모든 것들은 목적지가 아닌 길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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