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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Feb 25. 2022

21. 나의 까미노 친구들에게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날, 나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산티아고까지 걷도록 도와준 루이지와의 약속,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그의 아내를 위한 초를 켜는 것'. 산티아고에 도착한 둘째 날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초를 켜려고 했지만, 대성당 안은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로 시장통처럼 북적였다. 사람들 사이에 떠밀리다시피 성당 내부를 돌아다니며 둘러봤지만,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켜지는 가짜 초밖에 없었다. 루이지와 아내를 위해서 진짜 불을 붙인 초를,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켜고 싶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다른 성당에도 가보자 생각하며 산티아고 대성당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셋째 날, 땅끝 마을 묵시아 (Muxía)와 피스테라 (Fisterra)를 둘러보고 돌아오니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서둘러 산티아고 내에 여러 성당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몇 곳을 가봤지만 모두 대성당에 있는 것과 같은 전기로 불이 들어오는 초 모형뿐이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급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근처의 다른 성당을 찾아 뛰어갔다. 그곳에도 초 모형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전날 대성당에서 초를 켤 걸 그랬다는 후회도 잠시, 어찌 됐던 약속을 지켜야 했다. 동전을 넣고 두 개의 초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뒤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했다. 루이지의 아내 테레사를 위해, 그리고 루이지와 그의 가족을 위해. 테레사가 옆에서 듣고 있을 것 같아서 '이 길 위에서 루이지를 만나게 해 주어 고맙다'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진짜 초를 켜지 못해 속상했지만, 그래도 불이 켜진 초 사진을 찍어 루이지에게 보냈다.



올라, 루이지! :)

내가 해냈어! 지난주 수요일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오늘 테레사와 너, 그리고 네 가족을 위해 초를 켰어.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초를 켜고 싶었는데 성당 안에 사람들이 너무 붐벼서 다른 작은 성당에 들러 초를 켜고 기도했어. 내 까미노(순례길)는 너와 함께 해낸 거라 생각해. 너를 만난 것에 늘 감사해.



안녕, 나의 소중한 친구

네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끝까지 완주했다니 진심으로 기뻐. 나는 네가 해낼 줄 알고 있었어. 너는 산티아고에 이르기 위해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냈고, 그건 네가 인생에서도 수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순례길의 경험들이 앞으로 펼쳐질 네 삶의 여정에 늘 너와 함께할 거야. 살아가며 언젠가 어려움이 닥칠 때면 그 경험들을 돌이켜 봐. 그것들이 네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힘을 줄테니까.

초를 켜주어 고마워. 네 덕분에 테레사와 나는 정말로 행복해.


네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애정을 담아, 루이지



내가 산티아고까지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준 루이지와의 약속까지 지키고 나자 순례길이 정말로 마무리된 느낌이 들었다. 이 길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모든 걸 혼자 해낼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길에 오르던 순간, 그리고 길 위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도움을 건넨 이들을 통해 나는 지금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다리를 움직여 순례길을 완주하긴 했으나 사실 나의 마음은 거의 매일을 누군가에게 기대어 걸어왔다.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 때 표지가 되어준 모든 앞서 걷던 이들, 어두운 새벽길 위에 함께한 순례자들, 혼자였으면 고행이었을 시간이 여행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던 말동무들, 모르는 사이여도 필요하다면 음식과 약을 나누던 사람들. 순례길 위의 모든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안내자이며, 용기이자, 위로였다. 길 위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약함과 부족함을 통해 우리는 모두 연결되었다. 누구도 혼자 이 길을 걸어낸 사람은 없었다. 내가 길 위에서 배운 것은 삶 또한 결국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었다.



순례길에서 만난 호세 (Jose)의 편지


나의 모든 까미노 친구들에게,

오늘 마침내 피스테라에 도착해 순례길에서 입었던 옷을 태우며 저의 길을 마쳤습니다.

제가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길 위의 수많은 '까미노 친구들' (설령 당신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해도)이 없었다면 이 모든 걸 해낼 수 없었을 거란 걸 알아요.

당신은 내게 '길을 따라 함께 걷는 나의 동행, 갈래길의 안내자, 지친 나를 이끄는 에너지, 위험을 막아주는 방어막, 더위를 피하는 그늘, 어둠 속의 빛, 낙담 속의 위안'이었어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기억해주세요. 내가 곁에 있는 한 당신은 결코 혼자 걷지 않을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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