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하는 공부
혼자서 공부를 하니 제대로 하는 것같지 않고, 학원을 갈까,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할까, 그룹 스터디를 해야 할까, 어떤 교재를 이용해야 할까 고민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배우든 막상 해보면 배운 것 같지 않고 뭔가를 할 줄 알게 되는 것 같지도 않다. 공부한 세월은 길었는데 나는 할 줄 아는게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배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을 딛어야 내 것을 효과적으로 내놓을 수 있다고 선생님에게 배웠고, 자신도 그렇게 믿는다. 열심히 받아적고, 강의를 녹음해서 돌려 듣는다. 애초에 그 지식을 만든 건 사람인데, 사람인 내가 오히려 지식에 종속되는 모양새다. 남의 것을 먼저 보고 베껴적는 태도와, 내 것을 적는 중에 모르겠어서 남의 것을 참고하는 태도는 아주 다르다. 학습에 필요한 것들이 이미 있고 내가 그것을 배운다고 생각한다면 마치 말이 마차 앞에 놓인 꼴이라는 말이다. 내가 앞에 있고 학습자료가 내 뒤에 따라붙는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대면할 때 앎이 나에게 온다. 어딘가에 있는 앎이 내 머리로 다운로드 되는게 아니다.
아래 그림에서 학습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표현했다. 우측 상단의 주황색 돈으로부터 이어지는 화살표가 우리가 학습이라고 부르는 절차다. 돈이든 성적이든 뭔가를 얻기 위해 공부할 필요를 느낀다. 검색을 하고 그 결과를 머리로 받아들인다. 몸은 가장 나중에 반응한다. 검색 결과로 나오는 것들은 이미 그것을 아는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지식이다. 나는 받아들이는 입장이므로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부가가치를 창출할 일은 없다. 검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지식을 소비한다. 배울수록 내 돈과 시간은 나가는데, 내 능력이 자라지는 않는다. 능력이란 없던 부가가치를 만들 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앎 (?->!)은 모르는 상태를 아는 상태로 바꾸는 생산활동이다. 소비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게 아니다.
생산하는 학습 방식은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한다. 내가 모른다는 것에 반응한다. 몸의 그 반응을 머리가 이성으로 살펴본다. 머리가 모르겠으면 검색을 해 본다. 몸이 반응한 것은 처음부터 생산 활동이다. 잘 되면 가치를 인정받아 돈이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사용료를 지불하고 다운로드 받는다. 앎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성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몸을 반응하게 한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사람의 앎을 이끄는 것은 언어로 기술이 완료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추상적인 기호들로 가득한 수학 공부를 한다면 몸이 아니라 머리를 사용하는게 아닐까?
문제는 머리로 푸는 것 아닌가.
길고 복잡한 수식을 증명할 때는 이미 손으로 익숙해진 길 위에서 혹시 잘못 가는 길이 있는지를 머리가 판단한다. 말로 형언할 수는 없지만 왠지 옳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온다. 그것을 몸이 포착해 기술한다. 예컨대 물리학의 양자역학을 공부할 때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손으로 풀어서 몸에 익힌 다음에 머리로 이해하라는 격언이 있다. 양자세계는 실재하지만 사람의 직관이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머리로만 그것을 상상해봐야 틀린 결과를 낸다. 복잡한 공식만이 그 세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몸으로 먼저 익히고, 머리는 나중에 사용한다. 양자역학이라는 분야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내가 직관을 발휘할 수 없는 분야를 배우려면 몸으로 먼저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몸으로 반응하는 훈련이 된 후에야 앎이 온다.
사람의 직관은 자기가 이미 잘 아는 영역에서는 유용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는 옳은 답을 내놓지 못한다. 아는 분야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는 직관 (intuition)을 사용하지만, 모르는 영역을 익히려면 반직관 (counter-intuition)이 필요하다. 수학 공부를 하든, 음악 공부를 하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느낌에 옳은 길을 따르면 나중에 앎이 온다. 먼저 알면 그 뒤에 하는게 아니라, 먼저 해야 뭔가를 알게 된다.
알면 하는게 아니라 해야 안다.
음식점 주방에서 접시를 닦는 일이 겉에서 보기에는 몸만 쓰면 되니까 쉬워보이지만 막상 해보면 팔을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걸 알게 된다. 수학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지 않고 피아노를 잘 치게 되는 방법은 없다. 음악적인 생각을 아무리 심오하게 해도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들어보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수학이나 프로그래밍처럼 앉아서 머리를 쓰는 일도 다르지 않다. 손으로 증명이나 문제를 풀어보지 않고 수학을 잘 하게 되는 수는 없고, 손으로 코드를 입력해보지 않고서 프로그래밍을 잘 하게 되는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강의를 듣는다거나 외부의 지식을 배우는게 전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다. 혼자서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것을 배우기는 해야 한다. 그런데 배우는 그것에 내가 종속되면 정작 그것을 배우는 이유를 상실한다는 말이다. 말 (=나)는 마차 (=지식) 앞에서 달려야 한다.
우리는 모르니까 배운다. 알면 배울 필요가 없다. 학교나 학원에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면 수강생은 광고전단이나 커리큘럼을 보고 어떤 것을 배우리라고 짐작한 상태로 수강신청을 한다. 배움은 내가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다. 학원에 가서 내가 기대한 바로 그것을 배웠다면 나는 배운게 아니다. 깨닫기 전에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소비주체는 내가 무엇을 소비할지를 꼼꼼하게 다 아는 상태에서 구매결정을 한다. 내가 돈으로 값을 지불하는 그만한 가치를 재화로 구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원산지라든지 사용후기라든지 정보를 통해서 제품의 품질을 파악한다. 그런데 배움은 내가 배워보기 전에는 그 값어치를 따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르니까 배우러 가는게 아닌가. 교육 서비스라는 단어는 그래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킨다. 교육은 서비스화 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검색 사이트에서 받는 서비스가 내 행동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앎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