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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Apr 26. 2022

내 낡은 전자책기기

크레마사운드에서 크레마S로

내 몸속에 알레르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항히스타민제에 절여져 코와 목 어디쯤에서 항상 걸리적거리며 괴롭히는 점액들과 싸우는 동안은, 핸드폰 불빛조차 눈이 아파오고 이리저리 검색해가면서 들락날락거리며 소모할 에너지도 부담스러웠다. 기댈 수 있는 것은 가벼운 전자책기기 하나였다. 그렇게 기댄 내 낡은 이북리더기는 드디어 주인 따라 병이 났다.


크레마 사운드는 내 첫 리더기였다.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스마트폰으로 전자책 몇 권을 보다가 책 읽기 전용 기기가 존재하는 걸 알게 되고도 한참을 망설이다 샀던 하얗고 작은, 보기보다 가벼워서 조심스러웠던 기계. 플라스틱 버튼을 딸깍딸깍 누르면 책장이 넘어가는 게 옛날 오락기를 만지는 듯도 해서 이걸로 책을 읽노라면 확실히 '노는 중입니다'라고 선언하는 팻말을 드는 기분이었다.


오래도 같이 했다. 불량이 많은 기계로 유명했지만 다행히 문제없는 녀석이 와줘서 편히 잘 썼다. 이런저런 다른 기능도 잘 쓰지 않고 구입한 책을 읽고 또 읽곤 하는 나에게는 부족하지 않은 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계가 수명이 다했음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다. 투명했던 젤리케이스가 노란색이 된 지도 오래다. 전원 한번 켜기 위해 리셋 버튼 구멍에 핀을 찔렀다 뺏다, 전원선을 꽂았다 뽑았다 하는 것도 그만하기로 했다. 눌러도 반응 없는 버튼들을 될 때까지 눌러대며 괴롭히는 것도 그만. 갑자기 다른 메뉴 화면으로 넘어가서 읽던 페이지를 찾느라 헤매는 것도 그만. 우리는 이별할 때가 된 것 같다.


새 기계를 구했다. 서점의 당일배송 서비스가 하루 만에 집 앞까지 데려왔다. 크레마 S. 쌩쌩하다. 딸깍 대는 버튼이 없는 건 아쉽지만 화면에 손가락이 닿는 대로 곧바로 반응해준다. 빠르다. 화면도 더 선명하고 조명 조절도 좋다. 이것도 더 좋고 저것도 더 좋다. 신형 기계라는 건 어떻게 비교해도 더 나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제 오래된 기계로 책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읽을 수 없다는 말이 더 옳지만. 읽을 수 있었다면 새 기계를 사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서,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장 난 녀석을 중고로 팔 수도 없다. 살 사람도 없겠지만 고장 난 놈을 멀쩡한 척 사기 칠 배짱 같은 것도 나에겐 없다. 고장 나지 않았더라도 몇 년이나 내 베개 옆에서 잠자리를 지켰던, 먼 거리를 떠날 때마다 가방 한 구석을 차지했던, 열차 안에서 조는 내 무릎 위를 지키던, 내 손때를 켜켜이 쌓아 누런 색을 입은 이 놈을 다른 사람이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도 별로 유쾌하지 않다. 못된 헤어진 애인 같은 심보랄까.


물티슈로 꼼꼼히 닦고 휴지로 한번 더 닦아서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무심히 서랍을 열고 닫는 동안은 별로 손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눈에 띄었을 때 '아, 이런 게 있었지, 참 좋았지'라고 생각이 들면 다시 넣어두고, '아니 이걸 아직도 안 버렸네, 그러니 서랍이 좁아터졌지' 싶을 때, 그때 버리기로 했다.


고작 기계일 뿐인데. 낡고 고장 난 기계일 뿐인데도 이별은 나에게 이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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