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기 Mar 30. 2022

오래된 이야기- 산수유꽃이 피었다

봄을 반기러 먼저 피어나는

긴 면담을 끝내고 나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따라 나온 이씨 아저씨도 거칠고 두툼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긴 이야기는 듣는 사람만큼이나 이야기를 하는 쪽도 지치게 마련이었다. 한숨 돌리려 돌린 시선 끝에 분무기를 뿌려놓은 듯 아련하게 빛나는 노란 꽃들이 눈에 띄었다.


- 개나리가 벌써 피네요

하고 중얼거리자 이씨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다.


- 저건 산수유입니다.


- 꽃 이름도 아세요? 멋지십니다.

그을린 얼굴에 묵은 작업 때가 다 지워지지도 않고 색만 바랜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가 꽃 이름을 대는 것이 어색하긴 했지만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지쳐서 대충 하는 말일뿐이라는 편이 더 정직했다.


씨 아저씨는 노란 꽃들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 제가 어릴 때 살던 데가 촌구석 산동네였지요. 가스보일러가 다 뭡니까, 연탄도 없고 나무 떼다 불 지피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랑 둘이 사는데, 산에 떨어진 나무들 주워다 지게에 메고 오는 건 내 몫이었지요. 겨울이면 아궁이를 지펴야 하니 매일 나무를 해야 했어요. 방학이면 괜찮은데, 어떤 때는 학교도 못 가고 나무 지러 갔습니다. 학교 갔다 오는 데 두 시간이 걸리는 깊은 산골이라 학교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해가 져버리면 산에 갈 수 없었으니까요.

  지게 메고 오르내리다 산수유 꽃이 노랗게 피면, '봄이구나, 아궁이 안 때어도 되겠다. 학교 갈 수 있겠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반가웠어요, 저 산수유꽃이. 다른 꽃들 피기도 전에 제일 먼저 노랗게 피어서는 봄이 온다고 알려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어떤 때는 저 산수유꽃이 봄을 불러와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서 고마운 꽃이었지요.


- 고생하셨네요.

- 고생은 무슨, 우리 어머니가 다 했지요. 중학교는 포기하고 집에서 밭 갈고 사는데 어머니가 그만 가버리시지 뭡니까. 고생만 하다 가셨지. 나는 그 길로 도시에 나와서 일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도 기술배워서 입에 풀칠은 하고 살게 됐지요.

  몰랐지요? 나 국민학교밖에 못 나온 거? 좀 부끄럽네요.

- 부끄럽기는요. 어지간히 가방끈 긴 사람들보다 말씀도 잘하시고 생각도 깊으시던데요.


- 그러면 뭐합니까, 무식쟁이에 가진 것도 없는 건 그대로인데요. 그러니 같이 살자는 각시도 없이 지금껏 혼자지요. 허허.

  그래도 이렇게 가진 것 없고 잃을 것 없으니 좋은 것 하나는 있네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번거롭고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는 이 일. 누구한테 대신하라고 하겠어요, 잃을 것이 무서운 사람들은 살던대로 밖에는 못살거든. 그러니 내가 해야지. 나는 잃을 것도 없고, 건사할 식구도 없으니 딱 좋지 뭡니까.


- 굳이 왜 이씨 아저씨여야 하나요? 잃을 게 무서울수록 자기 일이면 같이 나서고 같이 행동해야지, 혼자 나서시면 꼭 대신 싸워주는 사람 같잖아요.

- 굳이 왜 나여야 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네요. 굳이 나만 참아 넘기지 못하는 것뿐일지도요. 그냥 그런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고, 그냥 나라도 나서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이러는 거니까요. 언젠가는 누군가 볼 테고, 언젠가는 다른 사람도 일어설지 모르고, 그러다 무언가 변할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을 할 뿐이니 말리지 마시고 도와만 주세요.


돌아서며 웃는 이씨 아저씨의 눈 속에 산수유꽃이 담겼다.


그리고 올해도 산수유꽃이 피었다.


봄이 오면 산수유꽃이 가장 먼저 피어난다. 겨울을 끝내려고, 봄을 불러오려고, 아직은 쌀쌀한 바람을 이겨내고 산수유꽃이 핀다.


작가의 이전글 청딱따구리와의 만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