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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Jul 01. 2022

당구 치는 여자 - 3쿠션 당구


취미 정리 글을 시작한 진짜 이유, 그것은 지금은 즐기지 못하는 당구다. 꼭 한 번은 당구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포켓볼을 치러 당구장을 가봤다. 포켓볼을 치는 내내 나는 옆 당구대의 남자들이 치는 공 서너 개짜리 게임이 궁금했다. 빨갛고 노랗고 하얀 공이 놓인 모습만 보아도 아름다웠고, 공이 돌고돌아 결국에 다른 공을 만나고야 마는 장면이 경이로웠다.


대학생이 되어 당구를 치를 남자 동기들과 선배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남자들만 즐기는 놀이 같아서 감히 나도 껴달라 말하지는 못하고 가끔 당구 치는 게 보고 싶다며 당구장에 따라가곤 했는데, 가만히 구경하다가 희한한 공의 움직임을 보면 "왜 공이 뒤로 튕겨 나오는 거야?", "어떻게 공이 한 바퀴를 돈 후에 여기까지 올 거라고 알 수 있어?" 하며 질문 공세를 펼쳤다. 남학생들은 입사각이며 반사각이며 공의 회전이며 설명을 하다가, 게임이 끝나면 '직접 한 번 쳐보라'며 연습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당구장까지 따라오는 여자애라니, 어쩌면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사뭇 설레는 마음이었을 남학생들은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가르쳐줬다. 남자의 순정을 이용한 것만 같아 미안하지만 매우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남의 당구 게임을 구경하고 연습구를 치면서 나는 10년에 걸쳐 이런저런 타법과 돌아치는 길과 빈쿠션치기까지 어깨너머로 배운 셈이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갔더니 동료들이 당구 마니아였다. 야근이 있는 날이면 저녁식사 후에는 무조건 당구장으로 향했다. '공짜 커피 마시러'라는 빈말로 은근슬쩍 몇 번 따라갔더니 한 놈이 자꾸 같이 쳐야 된다는 거다. 당구는 직접 게임을 해봐야 진짜 재미를 알게 되는 거라며, 부득부득 당구 큐를 손에 쥐여주고 3점만 걸어놓고 치라는 거다. 10년을 바라만 보던 당구를 그렇게 얼렁뚱땅 시작했다.


처음 시작부터 3구라고 불렀던, 3쿠션 당구부터 시작한 셈이다. 10년의 서당개 기간 덕분에 공을 맞히는 것 까지는 어렵지 않았고, 이런저런 복잡한 '길'은 눈동냥한 것들을 흉내 내고 다시 설명을 들으며 익히기 시작했다.


직접 친 당구는 퍼즐게임, 퀴즈와 같았다.


모든 공의 포지션은 퀴즈이고, 두 개의 공을 맞히는 동안 반드시 벽을 세 번 맞혀야 하는 방식의 퍼즐이다. 미세한 각도와 타점과 밀어치거나 잡아치는 타법의 강약 조절을 계산해서 답을 찾아내야 한다. 비가 오면 습기를 먹어 늘어지는 공의 습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당구를 치면 칠수록 알고 싶은 풀이법이 늘어나고, 당구 채널을 등록해 시청하기 시작했고, 유튜브의 난구 풀이를 즐겨보면서 내 당구 수지는 점점 올라 120에 이르렀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사각의 당구대와 아까 놓친 공 세 개가 떠올랐다.


억지로 당구 큐를 쥐여주던 직장동료는 남편이 되었고, 우리 데이트는 늘 당구장, 식사는 당구장 건물 아래 김밥집이었다. 여행을 가면 숙소 근처 당구장을 들렀다. 단골 당구장 사장님은 전용 큐를 따로 챙겨주셨다. 전용 큐가 손에 익고 각종 난구들까지 터득해갈 즈음, 허리가 한 번 더 고장 났고, 내 열띤 당구 생활은 끝이 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구치고싶다



당구장은 많고 스승도 많지만 여자가 즐기기 어려운 이유


동네마다 있고 시골 읍내에도 있는 게 당구장이다. 당구 칠 줄 아는 사람도 많고 아는 사람이 없으면 당구 아카데미에 등록하면 된다. 그것도 어려우면 당구장 사장님한테 시간 결제할 테니 알려달라고 부탁해도 된다.


하지만 당구장에는 여성들이 많지 않다. 여성이 없어서 여성화장실이 아예 없는 곳도 많다. 흔치 않은 여성이 당구를 치고 있으면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하고, 눈길을 받으며 당구를 치는 것이 편할 리가 없다.


한마디로, 여자들이 많이 없어서 즐기기 어렵고, 즐기기 어려워서 여자들이 많이 찾지 않게 된 것이 당구다.


그럼에도 커플, 부부의 취미로 좋은 당구


시작의 어색함만 극복하고 나면, 어떤 다른 스포츠보다 남녀 간 신체적 차이와 상관없이 평등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당구다(프로선수나 전문가 수준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약간의 실력 차이도 게임 시작 시 점수에서 핸디캡이 적용되기 때문에 충분히 보정된다.


무엇보다 당구라는 게임은 혼자 즐기기 어렵고 언제나 파트너가 필요하며,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게임 중에 서로의 호흡과 공에만 집중하게 된다.


여성에게 편한 당구장 찾는 법


여성용 화장실이 있는 당구장을 찾는 것이 좋다. 새로 지은 건물에 입주한 당구장이면 높은 확률로, 포켓볼이 구비된 곳은 보통의 확률로 여성용 화장실이 있다. 입장할 때 미리 확인해두는 편이 좋다.


당구장 매너


옆 당구대에서 당구를 치거나 치려고 자세를 잡는 중인 사람에게 너무 가까지 가서는 안된다. 심지어 살짝 건드리는 경우도 있는데, 매너 없을 뿐만 아니라 싸움을 부를 수 있는 행동이다. 상체를 굽히고 호흡을 조절하기 시작했다면 "지나갈게요" 하고 말을 거는 것조차 조심해야 한다. 길을 돌아가거나 1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 잠시 기다리는 편이 좋다.


당구는 집중력과 정신력의 게임이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자신의 게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소란을 피워서도 안된다. 가끔 재미를 붙이면 너무 흥분한 나머지 '꺄악'하고 소리 지르는 여성들이 있는데, 이해한다. 하지만 같은 비명이면 여성의 고음 파괴력이 더 크다. 쳐다보는 눈길들은 예뻐서 보는 게 아니라 '저 팀 대체 언제 끝내고 나가나'하고 두고 보는 중이니 자중하도록 하자.



여자친구와 같이 당구 치고 싶은 남성들을 위한 TIP


 먼저 깨끗하고 쾌적하며 여성용 화장실 이용이 편한 당구장부터 찾자. 여성 이용자(구경하는 사람 말고)가 많이 보이는 당구장이면 더 좋다. 남자들만 노는 곳에 여자 혼자 들어가면 약간의 긴장감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다른 여성 이용자들이 있다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여성들이 이용하고 있다면 그 당구장은 여성친화적인 부분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쉬운 4구부터'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는 게 보통이지만, 내 경우에 타법도 큐질도 모를 때는 4구공을 밀기가 조금 무거웠고 오히려 3구공이 쉬웠다. 공을 맞혀야 기분이 좋은 편이라면 공이 큰 4구공을 더 선호할 수도 있다. 처음 한두 번 정도는 게임은 하지 말고 시간을 정해서 원하는 공으로 놀면서 자세를 잡고 공을 미는 감각만 익히도록 놔두자.


가르쳐줄 때는 설명부터 줄줄 읊은 후에 "자, 알겠지? 그대로 쳐봐."라고 하는 건 딱 한 번만! 공을 배치해 두고 나서 "이건 어떻게 칠 수 있을까?", "그쪽으로 치면 이쪽으로 올 거야" 하는 식으로 스스로 퍼즐을 풀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감각을 익힐 시간적 여유를 주자. 


게임을 시작했다면 많이 져줘라. 적어도 여자친구가 80 수준이 될 때까지는, 나도 모르게 자꾸 점수를 먹고 싶어지겠지만 이악물고 많이 져줘라. 알고 있지 않은가? 이겨야 더 재미있다. 수지가 100 정도 되기 시작하면 져주는 거 눈치채니 그만해도 되고, 그때쯤이면 한창 재미있을 때다. 여자친구가 먼저 관리 잘 된 당구대를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칭찬할 때는 "여자치고 잘하고 있다(X)" 대신, 당구장 손님 중 초보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서 "저 남자보다 네가 더 잘하는 듯(O)"이 낫다. 비교평가는 당구인들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객관적이지 않은가. 여자치고 잘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여자인데 당구 치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놀림으로 들릴 수 있으니 조심하자. 단, 대회전이나 리버스를 능숙하게 쳐낸다면 "여자인데 이런 걸 치네!"라는 감탄사도 허용된다. 


이것저것 자신이 없다면 자본의 힘으로 당구 아카데미에 등록하거나 전문가 레슨을 같이 받는 편이 낫다. 교육은 교육전문가에게! 도제식 교육보다 학원형 교육을 더 편하게 느끼곤 하는 여성들이 많다. 다만, "저 여자 잘 치네" 하는 남자친구는 용납할 수 없어도, "어머, 저 선생님 멋있어~" 하는 여자친구에게는 삐지지 않고 웃어줘야 한다는 삶의 부조리와 마주하게 될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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