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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Apr 27. 2022

너는 아이언맨이 될 수 있어.

나를 규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다.

 딸이 8살이 되고,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종의 새로운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기대감과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간 아이는 며칠이 되지 않아 충격적인 말을 듣고 상처를 받고 왔다. 친구 몇 명이 자기에게 "바보"라고 놀렸다는 것이다. 8살 여자 아이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관계적 충격을 맞이한 셈이다. 더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놀림'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4살 때 한글을 모두 마스터하였고, 심지어 영어도 조금은 할 줄 알고, 이미 구구단도 마스터를 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전혀 설득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똑똑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바보라니.' 그것도 새롭게 알게 된 초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라는 존재에게서 말이다. 


 8살짜리가 충격을 겪을 때에는 당연스럽게 펑펑 우는 것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펑펑 우는 아이에게 왜 그렇게 우는지 물었다. 

 "친구가 나보고 바보래. 우앙~"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뭐 그런 걸로 울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누가 그랬어? 어? 도대체 누구야? 이 노므 자슥, 아빠가 혼내줄게."라는 말로 편을 들어줄 수도 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아이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울음을 그치고 그다음 단계로 갈 수 있겠지만, 다음 단계로 가면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일단 '그런 걸로 울게 된 것'으로 결정되면 자존감이 더 떨어질 수 있다. '고작 이 딴 거'라는 개념은 작은 것에 흔들리는 존재밖에 안 된다는 것이니깐.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 그 이후에는 그런 일에 대해서 부모에게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랬냐'라고 물어보고 원인 해결을 해주려는 나름 든든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그 또한 좋은 선택은 아니다. 일단 8살을 먹은 동년배 아이들을 혼내주러 출동을 해야 하고, 그것만으로도 참 난감한 행동이지만 더 심각하게 확대되면 그 아이들의 부모들과도 싸워야 한다. 어린아이들이 '바보' '메롱' 이런 단어를 쓰는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도 내 생각이다. 그런 걸로 부모들과 싸우게 된다는 것은 거의 나비효과 수준이다. 


 난 펑펑 울고 있는 아이에게 일단 울음을 그치고 아빠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자 아빠 말을 한번 들어볼래? 그냥 듣지 말고 상상하면서 들어야 해."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리는 것은 사고력 확장에도 좋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기에도 좋다. 그냥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훨씬 더 각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친구들이 바보라고 놀려서 슬펐어? 그래, 정말 슬펐겠구나.”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친구들이 너에게 바보라고 말하면,
정말 그 순간 너가 진짜 바보로 뿅!! 하고 변신하니? 

그러면서 영구 흉내를 냈다. "띠리리 리리리~ 영구 없다." - 물론 아이가 영구를 모르지만 바보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대략 눈치를 챈 듯하다. 

 친구들이 바보라고 놀려도 내가 진짜 바보가 되는 건 아니지?

 "응"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겠어?" 

 "응" 남은 울음을 삼키듯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 이후로 딸은 어지간한 놀림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다. 되려 다른 친구를 위로한다. 

 "괜찮아. 친구야~ 바보라고 해도 너가 바보는 아니야."

 어느 날은 학교 끝나고 찾아와서 에피소드 하나를 말해준다.

 "아빠, 나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렇게 시작된 에피소드는 이렇다. 바보라고 놀렸던 그 친구들 무리가 - 이런 애들은 어딜 가도 존재한다 - 이번에도 누군가를 놀린 모양이다. 남자아이 중에 좀 약해 보이는 친구가 있었다. 아마 우리도 주변에서 볼 수 있을만한 캐릭터이다. 분명히 남자인데 남성스러움보다 여성스러운 면이 더 도드라지는 캐릭터. 미래의 꿈은 나쁜 악당들을 물리치는 액션 히어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도 가늘고 몸도 가늘고 키도 작다. 그래서 8살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그 친구(가명-훈이)가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되었나 보다. 그래서 바보라고 놀렸던 그 친구들이 이 연약한(?) 스타일의 친구도 놀렸다. 다소 충격적으로 말이다. 

"야, 너는 남자가 왜 그러냐? 너 꼬추 없는 거 아냐?" 

 훈이(가명)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심지어 꿈이 액션 히어로인데 꼬추가 없다는 건 충격 중의 충격임에는 틀림없다.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훈이(가명)는 소리치면서 곧장 울어버렸다. 

 "아냐! 우앙~ 우앙~" 놀리던 친구들은 이럴 때 더 격하게 더 놀린다.

 "얘들아 쟤는 진짜로 꼬추 없는 거 아냐?" 

 "진짜? 그런가? 크하하하" 

 "훈이는 꼬추 없데요~" 

 이렇게 놀리면서 사라졌고, 훈이는 상처받은 마음을 눈물로 모두 다 쏟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듯 더 소리 내서 울었다. 그걸 본 딸이 훈이를 위로하려고 마음을 먹었나 보다.

 "훈이야~ 친구들이 너 놀려서 슬프지? 화나지?" 

 갑작스럽게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위로의 말을 건네니 조금은 의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울음소리가 아주 조금은 사그라들면서 훈이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응, 우앙~ 난 아이언맨 될 건데 꼬추가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 우앙~"  

 딸의 위로는 계속되었다. 

 "그래, 정말 슬프겠다. 근데 내 얘기 좀 잘 들어봐. 그냥 듣지 말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들어야 해?" 

 내가 자기에게 해 준 그 방법 그대로다. 그러면서 말을 건넸다.   

 "훈아, 친구들이 꼬추 없다고 놀려서 정말 속상하지? 근데 친구들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정말로 니 꼬추가 없어졌니?" 

 그 말을 듣고 훈이는 울면서도 아랫도리 쪽을 양손으로 덥석 가리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대로 있어."

 "그래, 친구들이 놀린다고 니 꼬추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그러니깐 친구들이 놀려도 상관없어." 

너는 아이언맨이 될 수 있어.


 내 딸이지만 참 똑똑하고 기특했다. 그리고 참 귀여웠다. 지금은 중학생이 되어서 그랬다는 말을 하면 자기가 정말 그랬냐면서 웃는다. 그리고 훈이의 꿈은 여전히 아이언맨 인지도 궁금하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정한다. 설령 객관적으로 - 이런 것이 객관적인 차원이라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내가 진짜로 머리가 나쁘고 정말 바보라고 해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닌 거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떻다고 말만 하는 것뿐이다. 딱 거기까지다. 대신 살아주는 것도 가능하지 않고, 더 나아지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훌륭한 점이나 코칭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그것도 내가 받아들일 때에나 가능하다. 타인의 말이나 생각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제인가? 그렇다. 내가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맞게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얼마든지 거부해라. 나를 규정하고 바라보는 모든 의견과 시선들을 말이다. 

 내 삶은 오롯이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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