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착한 것과 만만한 것은 달라

적절한 거절과 경계 설정

by 강훈

딸아, 조별 과제를 할 때 다른 아이들이 제대로 못해서 네가 도맡아서 했던 때가 기억이 나. 분명 조별 과제인데 너의 과제가 되어버렸지. 할 일도 많은데 다른 아이들 몫까지 하느라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했었잖아. 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어지는 걸 보면서 생각했어. 착함이 때로는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는지.


우리는 '착한 아이'로 키워졌어. 양보하고, 배려하고,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지. 그런데 세상에 나가보니 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소진되더라. 불을 밝히는 양초가 자신을 태우듯이.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고 맞는 것이라고 어렸을 적부터 널 가르쳤던 것이 왠지 후회스럽기도 하더라고. 착한 행동으로 오히려 네가 손해 볼 때마다 내가 잘못 키운 건가 싶었어.


착함과 만만함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건 아마도 '선택'인 것 같아. 착함은 내가 선택해서 베푸는 거고, 만만함은 거절할 수 없어서 주는 거야.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마음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

물은 가장 부드럽지만 바위를 뚫어. 그런데 물도 그릇이 없으면 흘러내리기만 해. 우리의 착함도 그래. 경계라는 그릇이 있어야 힘이 되지, 없으면 그저 흘러내리고 말아.


네가 "미안하지만"으로 모든 거절을 시작하는 걸 봤어. 왜 미안해? 네 시간과 에너지를 지키는 건 당연한 권리인데. 미안함은 잘못했을 때 쓰는 거지, 자신을 지킬 때 쓰는 게 아니야.

예수님도 때로는 혼자 산으로 가셨어.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 혼자 앉으셨지. 그들조차 모든 이를 항상 도울 수는 없었어. 무한한 사랑도 유한한 몸 안에 있을 때는 경계가 필요한 거야.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듣는 안내방송이 있지. "먼저 본인의 산소마스크를 착용하신 후..." 이게 이기적인 걸까? 아니야. 내가 숨을 쉴 수 있어야 남도 도울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야. 착한 사람의 비극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려다 정작 자신은 불행해진다는 거야. 그런데 불행한 사람이 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될까. 텅 빈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 수는 없어.


"No"라는 한 마디가 왜 이렇게 무거울까. 거절하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고, 관계가 끝날 것 같고, 미움받을 것 같아. 하지만 진짜 관계는 거절에도 살아남아. 오히려 서로의 경계를 알게 되면서 더 건강해지지.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주기만 하면 언젠가는 비어. 받는 것도 필요해. 그런데 착한 사람들은 받는 걸 어려워해. 주는 게 익숙해서, 받으면 빚진 것 같아서. 하지만 받는 것도 사랑이야. 상대에게 베풀 기회를 주는 거니까.


경계를 세운다는 건 벽을 쌓는 게 아니야. 문을 만드는 거야. 열고 닫을 수 있는 문. 때로는 활짝 열고, 때로는 살짝 열고, 때로는 굳게 닫을 수 있는. 그 조절권이 네게 있다는 걸 잊지 마.

착함이 진짜가 되려면 힘이 있어야 해. 사자가 토끼를 해치지 않는 건 착한 게 아니라 선택한 거야. 토끼가 사자를 해치지 못하는 건 착한 게 아니라 약한 거고. 네가 거절할 수 있음에도 돕는 것, 그게 진짜 착함이야. 세상은 착한 사람을 원하면서도 존경하지는 않아. 이용하기 쉬운 사람으로 볼 뿐이지. 하지만 경계가 분명한 착한 사람은 달라. 그들의 친절은 선물이 되고, 도움은 감사의 대상이 돼. 그래서 ”부당거래“라는 영화에서 아주 유명한 대사가 탄생하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지만 뿌리는 흔들지 못해. 네 착함도 뿌리가 있어야 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 뿌리가 단단하면 아무리 많이 베풀어도 네 중심은 흔들리지 않아.


딸아, 네 착함이 네 선택이 되기를 바래. 의무가 아니라 선물이 되기를. 그리고 가끔은, 아니 자주, 너 자신에게도 그 착함을 베풀기를.

"미안하지만 안 돼"가 아니라 "안타깝지만 이번엔 어려워"라고 말해봐. 미안할 게 없어. 네 삶의 주인은 너야. 그리고 주인은 때로는 문을 닫을 권리가 있어.

착하되 만만하지 마. 부드럽되 단단해져. 물처럼 유연하되 얼음처럼 굳을 줄도. 그게 이 거친 세상에서 네 착함을 지키며 사는 방법이야.

기억해. 네가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하지만 너 자신은 구할 수 있어. 그리고 그것부터가 시작이야. 구원받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남을 구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