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7 - 군복은 군바리에게만 특별하다.

by 강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언 29:25)


첫 휴가 전날, 내 침상 위엔 작은 제식 공장이 가동됐다.
초(初) A급 군복을 꺼내 칼날 같은 주름을 잡고, 군화는 가죽에 얼굴이 비칠 때까지 문질렀다. 선임들은 “이 정도면 손 베인다”며 엄지를 세웠다.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 나는 꽤 특별한 사람이었다. 동서울 터미널에 내려서도, 내 눈엔 군복의 각이 먼저 보였다. 반짝이는 군화, 부대마크, 견장.

“저 친구는 뭔가 다르네.” 같은 군인끼리는 눈빛으로 다 알아봤다.


그런데 민간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목적지로 바빴고, 내 군복의 딱 떨어지는 각과 빛나는 군화의 광택은 아무의 시선도 오래 붙잡지 못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생했다!” 어깨를 두드려 주는 손길은 있었어도, “야, 이 각 좀 봐!”라고 감탄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자 나는 번쩍거리는 군화를 벗고, 빨리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군바리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나만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웠지, 사실 누구도 내가 군바리인지, 휴가 중인지, 어제 몇 시간을 광냈는지 모른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알 필요도, 관심도 없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엘카인드(David Elkind)는 이를 ‘상상적 청중(Imaginary Audience)’이라 불렀다. 남들이 늘 나를 보고 판단한다고 믿는 마음. 그 마음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자주 거울을 보고, 더 자주 숨는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하루를 견디느라, 우리에게 주목할 여분의 시선을 갖고 있지 않다. 바쁘다. 힘들다. 그리고 잊는다. 어제 터미널에서 스친 내 각 잡힌 군복을, 오늘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믿음은 여기서 다른 길을 걷는다.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서는 길.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사무엘상 16:7)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4)


사람들 눈을 쫓으면 금세 지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심을 가다듬으면 그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진다. 누가 보든 말든, 내가 나를 헷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군복의 각은 나를 위해 잡는다. 내 소속과 수고를 스스로 존중하기 위해.
휴가의 사복도 나를 위해 입는다. 편안하게 쉬고 사람답게 웃기 위해.
둘 다 타인의 판정표가 아니라, 나의 마음을 위한 선택이면 충분하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라디아서 1:10)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타인의 시선을 빌려 자기 가치를 재려 한다.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괜히 숨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하루가 무너진다. 그러나 자존감은 남의 눈에서 자라지 않는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는가"에서 자란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가복음 1:11)


이 이름표를 가슴 안쪽에 달아두면, 밖의 라벨은 제자리를 찾는다. 과장도, 위장도 필요 없다.


벌써 아주 오래전 일이었지만 터미널을 떠나던 그날로 돌아가 본다.
유난히 반짝이던 군화, 허리춤을 꼭 조이던 벨트,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
그 얼굴이 묻는다.

'오늘 너는 누구의 시선을 먼저 입고 있니?'
대답은 짧아도 된다. 주님의 시선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각도 내려놓을 수 있고, 각을 잡을 힘도 다시 난다. 남이 보든 말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솔직하고 성실하게,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입어야 할 진짜 군복, 그리고 자존감의 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