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비를 싫어할 이유는 늘 충분하다. 하늘은 잿빛이고, 신발은 젖고, 한 손은 우산에 묶인다. 약속 앞에 서면 옷의 색도, 머리 모양도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 그 모든 불편을 묶어 탓을 돌리면, 애꿎은 비가 죄가 된다. 사실 비는 자기 뜻대로 내리지도 않는다. 구름이 품은 무게가 임계점을 지나면, 그저 떨어질 뿐이다. 떨어지며 땅을 적시고, 뿌리를 깨워 싹을 밀어 올린다. 거기에 죄가 있다면, 생명의 과잉일 것이다.
한 번은 두 달을 기다린 글램핑 날에 폭우가 쏟아졌다. 취소할까 망설이는 사이, 아이들 얼굴이 먼저 젖어들었다. 그날 나는 아주 조심스레 말해보았다. “다른 날 다시 갈 수 있어. 그런데 아마 오늘 같은 날 가면 평생 기억날지도 몰라.” 정말 그랬다. 우리는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텐트 천장에 부서지는 빗소리를 듣고, 물웅덩이를 가로질러 뛰어다녔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우산 없이 웃어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창밖에 빗줄기만 보여도 신이 난다. “우와, 비 온다!” 첫눈에만 유효하던 감탄사가, 어느새 소나기에도 배정되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인생에 마음껏 비를 맞을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까. 대개 우리는 지붕 아래 숨고, 목적지에 닿자마자 물기를 털어낸다. 비는 늘 불청객이다. 그런데 그 불청객 덕분에만 켤 수 있는 등이 있다. 젖은 흙에서만 나는 냄새, 소리의 층위를 바꾸는 백색 잡음, 기다림을 묵직하게 만드는 시간의 질감. 어떤 날의 불편은, 그날만 가능한 선물을 동반한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불편한 날도 우리를 단련하는 은혜의 형식일 수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야고보서 1:2–4).
우리는 자주 햇빛의 꼭대기에서만 축복을 찾지만, 하나님은 비를 통해서도 말을 거신다. “메마른 땅이었지? 그럼 물부터 주자.” 응답이 늘 해가 떠오르는 모습으로만 오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삶이 눅눅해진 계절에도, 하늘을 탓하기 전에 물어볼 일이 하나 생긴다. 이 젖음으로 무엇이 자라날까.
심리학은 이를 “재평가(cognitive reappraisal)”라고 부른다. 일어난 사건을 바꾸지 못할 때, 그 사건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꾸는 일. 바로 관점을 바꾸는 일. 하나님 나라의 언어로 바꾸면, “상황은 주권 아래 있고, 나는 해석을 선택한다.” 비가 온다는 사실은 내 영역이 아니지만, 비를 ‘망친 하루’로 부를지 ‘기억될 하루’로 부를지는 내 작은 주권 안에 있다.
물론, 어떤 비는 너무 많이 온다. 계획은 흐트러지고, 마음은 축 처진다. 그럴 때 비를 미화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속삭여 보고 싶다. 오늘의 젖음이 내 뿌리까지 스며들어,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늘을 내어줄 날이 오리라. 우리는 비를 피하지만, 하나님은 그 빗속에서 길을 만드신다. 돌아보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날의 불편이 선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요셉도 형들에게 그런 고백을 하였다.(창세기 50:20) 떨어진 비가 흙을 통과해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다시 하늘로 오르듯, 오늘의 불편도 당신 안에서 순환하며 의미를 만든다.
그러니 다음에 비가 오면, 우산을 펴되 마음까지 닫지는 말자. 비를 피하되 비를 미워하지는 말자. 가능하다면 단 한 번쯤은, 우산을 접고 잠깐만 서 있어 보자. 물방울이 이마와 뺨을 타고 흐르는 동안, 하나님이 오늘 당신에게만 들려주시는 박자와 냄새와 문장을 받아 적을 수 있을지 모른다. 비는 죄가 없다. 그리고 그 비를 어떻게 부를지, 그 이름 짓기는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