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장을 넘길 때마다 늘 마음에 걸리는 구절이다. 손만 뻗으면 닿는 자명한 진리처럼 보이는데, 오늘 지갑은 가볍고, 시간은 모래처럼 새고, 마음은 자꾸 다른 사람들의 속도로 흔들린다. “없다”는 단어가 습관처럼 먼저 나온다. 돈이 없다, 재능이 없다, 인맥이 없다. 그런데 정말 없는 걸까, 아니면 없다고 여기는 걸까.
심리학은 말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부족’의 대부분은 외부 현실이라기보다 “평가(appraisal)의 산물”이라고. 리처드 라자루스(Richard Lazarus)의 "스트레스 평가 이론(cognitive appraisal theory)"에 따르면, 동일한 상황도 “나에겐 감당 불가”라고 해석하면 위협이 되고, “배울 기회”라고 해석하면 도전이 된다. 숫자와 사물의 총량이 변하지 않아도, 평가가 바뀌면 마음의 날씨가 바뀐다.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us)는 더 직설적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다.”
신앙은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선언은 평가 이전의 관계를 말한다. 나의 부족을 계산하기 전에, 나를 채우시는 목자가 먼저 계신다. 그래서 시편의 문장은 심리적 암시가 아니라 신학적 고백이다. “없음”을 헤아리는 계산표가 아니라 “누가 나의 목자인가”를 먼저 확인하는 자리.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주문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관계의 재정렬이다.
한 번은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회사 후배가 한숨을 쉬었다. “형, 저는 진짜 다 부족해요. 지식도, 발표도, 스펙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물었다.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 세 가지만 말해봐.” 후배는 멈칫하더니 “언제나 내 편인 가족, 밤에라도 만날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아직 포기 안 한 마음.” 그날 둘 다 조금 생기가 돌았다. 통장의 숫자는 그대로였지만, 해석의 방향이 뒤집히니 마음의 체감 온도가 달라졌다. 부족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자리를 바꿨다. 결핍이 주어가 아니라 배경이 되었다.
센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과 엘다르 샤피르(Eldar Shafir)가 ‘스케어시티(Scarcity)’에서 보여준 장면도 비슷하다. 결핍은 단지 가진 것이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attention)를 빨아들이는 틀”이다. “부족하다”는 느낌은 시야를 좁히고, 장기적 선택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결핍을 이기는 첫걸음은 역설적으로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시야를 다시 넓히는 “의식적 재평가(reappraisal)”다. 신앙의 언어로 옮기면 이것은 감사다. 감사는 예의 바른 덕목이 아니라 인지적 재배열이다. “없는 것”이 프레임을 장악하기 전에 “이미 받은 것”을 불러내는 행위이다. 바울이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했을 때, 그는 낙관을 강요한 게 아니라 프레임을 바꾸는 영적 기술을 가르친 셈이다.
“하지만 정말 없을 땐요?” 나도 안다. 카드값이 쌓이고, 치료비가 급하고, 도무지 시간이 모자랄 때가 있다. 그럴 땐 시편의 고백이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럴수록 나는 기도의 순서를 거꾸로 잡는다. “주님, 이것이 없습니다”로 시작하지 않고, “주님, 주님이 나의 목자이십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묻는다. 오늘 내게 이미 주신 것은 무엇이고, 내가 잘못 묶어 둔 것은 무엇인가. 종종 답은 현실적이다. 바꿀 수 있는 작은 지출 하나, 도움을 청해야 할 이름 한 사람, 체면 때문에 쥐고 있던 쓸모없는 자존심 하나. ‘없다’는 마음은 줄어들고, ‘할 수 있는 일’이 보인다. 기도는 결핍을 지우는 마술이 아니라, 결핍의 지형을 읽게 하는 지도다.
교회 전통은 오래전부터 이런 전환을 훈련으로 길렀다. 금식은 ‘먹을 것이 없다’의 체험이 아니라, ‘먹지 않기로 선택’해 보는 연습이다. 스스로 부족을 선택해 보니, 실제로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보게 된다. 자비량으로 나눈 한 끼의 식사, 익명으로 보낸 작은 헌금, 시간을 떼어 돕는 섬김은 모두 “나는 비어 있지 않다”는 몸의 고백이다. 부족을 해석하는 근육은 이렇게 길러진다.
돌아보면 내 삶의 전환점도 그랬다. 늘 돈이 없어 배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진 5만 원을 쪼개 첫 레슨비를 선불로 걸었던 날, 나는 “나는 배울 수 있는 사람”으로 해석을 바꿨다. 실력이 없어서 글을 못 쓴 게 아니라, 매일 30분을 비워 책상에 앉지 않았기 때문에 못 썼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부족’은 운명에서 과제로 바뀌었다. 그 순간 부족은 나를 규정하는 말이 아니라, 길을 지정하는 표지판이 되었다.
신앙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친다. 하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이미 부요하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벧후 1:3) 둘, 그 부요를 해석하고 누리는 법은 배워야 한다. 심리학이 말하는 재평가(reappraisal)와 습관의 힘은 여기서 도구가 된다. 철학이 일러준 통찰 - 사물을 바꾸기보다 보는 법을 바꾸라는 말 - 도 여기서 빛난다. 그러나 시작점과 종착점은 같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그래서 오늘도 작은 연습을 한다.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구하되, 먼저 받은 것을 소리 내어 세어 본다. 내게 있는 이름들, 오늘 허락된 시간, 포기하지 않은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부르시는 분.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아직 없는 것들이 더 이상 나를 삼키지 못한다. 부족이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부족이 주인이 아닌 삶’으로 위치가 바뀐다.
부족의 반대말은 풍족이 아닐지도 모른다. 신뢰다. 목자에 대한 신뢰. 그 신뢰가 해석을 바꾸고, 해석이 길을 만든다. 그러니 오늘도 이렇게 시작한다.
“주님, 제 삶 속의 여러 계산보다 먼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보게 하소서.”
그러면 이상하게, 없는 것 사이로 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