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처방받는 시대

소유된 몸, 상실된 나

by 강훈

한 알의 알약, 혹은 한 번의 주사가 인류의 오랜 난제를 해결했다. 뉴욕의 파티장부터 서울의 강남 피부과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두는 단연 'GLP-1' 계열의 비만 치료제다. 마치 마법처럼 식욕을 잠재우고 살을 빼준다는 이 약물은, 지난 수천 년간 인류를 괴롭혀온 '다이어트'라는 단어를 역사책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바야흐로 '다이어트 종말'의 시대다. 하지만 환호성 뒤편에서 나는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의 말을 떠올리며 묘한 서늘함을 느낀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Desire is the very essence of man)

스피노자는 욕망을 부정해야 할 죄악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고 뻗어나가려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힘, 즉 '코나투스(Conatus)'로 보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본질'인 욕망을 화학적으로 차단하려 한다. 뇌 속에서 끊임없이 음식을 갈구하게 만드는 '푸드 노이즈(Food Noise)'가 꺼졌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평온을 얻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평온이 나의 생명력이 거세된 결과라면, 과연 우리는 온전히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지 박약'이라는 누명을 벗다

물론, 긍정적인 면도 분명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비만을 게으름의 형벌로, 날씬함을 자기 관리의 훈장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과학은 이제 증명했다. 비만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호르몬의 오작동, 즉 질병이라고. 평생 자신을 탓하며 자존감을 갉아먹던 이들에게 이 약은 단순한 체중 감량이 아니라, "네 잘못이 아니었어"라고 말해주는 거대한 위로다.


노력의 가치가 사라진 자리, '돈'이 들어오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보면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든다. 우리가 그토록 숭배했던 '노력'의 가치가 자본으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과거 땀 흘려 만든 몸이 성실함의 증거였다면, 이제 그 결과물은 돈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이 되었다.

여기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현대인의 불행을 날카롭게 진단했다.

"현대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한다."


우리는 이제 날씬한 몸을 '존재(Being)'로서 가꾸는 것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고 '소유(Having)'하려 한다. 월 100만 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건강과 미(美)를 살 수 있다. 과정의 고통과 성찰이 생략된 채 돈으로 '소유'한 몸에서, 우리는 과연 진정한 자아를 느낄 수 있을까?


허기를 채우던 자리,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다음이다. 약물로 생물학적 허기를 지워버렸다고 해서, 마음의 허기까지 사라질까? 우리는 종종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스트레스 받아서, 혹은 사랑받고 싶어서 먹는다. 약이 뇌의 스위치를 억지로 내리면, 갈 곳 잃은 그 마음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식욕이 사라진 자리에 찾아오는 공허함, 일명 '무쾌감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체중계 너머에

기술은 우리에게 '날씬한 몸'을 선물할 수 있지만, '나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처방해 주지는 않는다. 욕망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 지금, 역설적으로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고민 앞에 서게 되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살을 뺄까?"가 아니라, "욕망이 침묵하는 그 고요한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존재로 나를 채울 것인가?"라고. 부디 그 답이 또 다른 소비나 쾌락이 아닌, 내면을 돌보는 깊은 응시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