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어떻게 혐오가 되었나
광장의 함성은 잦아들었지만, 강단의 분노는 여전히 뜨겁다. 불법 계엄 사태가 남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2025년 12월,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픈 손가락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다.
일부 기독교 세력은 여전히 계엄을 옹호하고, 독재를 시도한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 강변하며, 반대편에 선 이들을 '사탄'이라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 십자가는 혐오의 깃발이 되었고, 찬송가는 정치 집회의 군가로 전락했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서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던 한국 교회의 영광은 이제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듯하다.
신을 참칭하는 정치적 욕망
그들은 왜 극우의 최전선에 섰을까? 표면적으로는 '구국(나라를 구함)'을 외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공포'와 '욕망'의 기괴한 동거가 보인다.
독일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일찍이 경고했다.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고 사람들을 치고 있다면, 목사는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핸들을 꺾어 그 미친 운전사를 멈춰 세워야 한다."
본회퍼에게 신앙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책임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일부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정반대다. 그들은 미친 운전자의 핸들을 꺾기는커녕, 그 운전석 옆에 앉아 "더 빨리 밟으라"고 축복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치적 우상숭배'일 뿐이다.
값싼 은혜, 그리고 성찰의 부재
이 기이한 현상의 뿌리에는 본회퍼가 지적한 '값싼 은혜(Cheap Grace)'가 있다. 회개 없는 용서, 진리 없는 세례, 십자가 없는 은혜가 한국 교회를 병들게 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단순 도식은 사회적 정의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찰을 삭제해 버렸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는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타인을 향해 서슴없이 저주를 퍼붓는 '괴물 같은 이중성'이 탄생했다. 자신이 믿는 정치적 신념을 성경의 권위와 동일시하는 순간, 그들에게 대화나 타협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자신들은 '선(善)'이고 상대방은 멸해야 할 '악(惡)'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앉을 자리가 없는 교회
가장 뼈아픈 역설은, 그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예수님의 자리가 정작 그들 안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2천 년 전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 권력과 종교 지도자들의 카르텔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당했다. 예수님은 철저히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들의 친구였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일부 교회는 권력자의 친구가 되어 약자들을 혐오하고 배제한다. 만약 오늘날 예수님이 한국 땅에 온다면, 그는 화려한 대형 교회의 강단이 아니라, 그 교회들이 손가락질하는 거리의 농성장이나 소외된 이들의 곁에 서 있을 것이다.
광기를 넘어설 진짜 믿음을 기다리며
물론 모든 기독교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소란스러운 혐오의 목소리 뒤편에는, 여전히 묵묵히 이웃을 섬기며 부끄러워하는 다수의 '진짜' 신앙인들이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대답해야 한다. 손에 든 것이 혐오의 짱돌인가, 아니면 사랑의 십자가인가.
태극기와 성조기로 뒤덮인 십자가를 내려놓고, 다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신앙의 본질은 내 뜻을 관철시키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기꺼이 죽어주는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광기 어린 확신보다, 고통스러운 성찰이 더욱 절실한 1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