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라는 마약

당신의 눈물은 정의롭지 않다

by 강훈

"너는 왜 이렇게 공감 능력이 떨어져?"

요즘 시대에 이 말은 사실상 "너는 인격 파탄자야"라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서점에는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베스트셀러를 점령했고, 정치인들은 저마다 시장통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따뜻한 심장'을 전시한다. 바야흐로 '대(大) 공감의 시대'다.

하지만 나는 이 역겨운 '감정의 과잉'에 침을 뱉고 싶다. 단언컨대, 지금 세상을 망치고 있는 것은 무자비한 사이코패스들이 아니다. 오히려 섣부른 정의감에 취해 눈물을 흘리는, 선량하지만 무지한 당신들이다. 아니, 솔직하게는 나 자신이다.


공감은 '스포트라이트'다 : 좁고 편파적인 시선

우리는 공감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거라 착각한다. 천만에. 예일대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그의 저서 <공감의 배신(Against Empathy)>에서 공감의 실체를 이렇게 까발렸다.

"공감은 좁은 무대 위, 단 한 명의 배우만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편파적이고, 근시안적이며, 수에 약하다."

생각해 보라. 당신은 주인에게 학대당하고 버려진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당장 지갑을 열고 눈물을 쏟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수천 명의 아이들에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그 잘난 공감은 통계와 팩트를 무시하고, 당장 눈앞의 자극적인 비극에만 반응하는 '감정적 편식'일 뿐이다. 이것을 휴머니즘이라고 포장하지 마라. 그저 세련된 이기주의다.


히틀러도 '공감 천재'였다

더 끔찍한 진실은 공감이 '혐오의 연료'라는 점이다.

우리는 나와 닮은 사람, 내 편, 우리 민족에게만 공감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편을 아프게 한 놈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히틀러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그는 독일 민족의 고통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했기에,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히틀러가 옳다거나 그의 행동에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옹호가 절대 아니다.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쓰는 포퓰리즘과 테러, 양극화된 정치 싸움의 뿌리에는 모두 '내 편을 향한 과잉된 공감'이 도사리고 있다.

공감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족벌주의(Nepotism of the heart)'다. 내 새끼, 내 편이 아프면 세상의 원칙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는 그 맹목적인 뜨거움이 법치를 무너뜨리고 공정을 박살 낸다.


뜨거운 눈물 대신 차가운 이성을

의사가 수술대 위에서 환자의 고통에 공감해 같이 울고 있다면, 그 환자는 죽는다. 환자를 살리는 건 의사의 눈물이 아니라, 피가 튀는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메스를 들이대는 '차가운 이성'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감정에 취해 훌쩍거리는 '공감(Empathy)'이 아니다. 거리가 먼 타인의 고통까지도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돕는 '합리적 연민(Rational Compassion)'이다.


제발, 그 얄팍한 공감 좀 집어치워라.

감성에 젖어 "불쌍해서 어떡해"라고 중얼거리는 것으로는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세상을 구하는 건 당신의 뜨거운 심장이 아니라, 냉정한 판단과 행동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눈물은 생각보다 영향력이 없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