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티'를 비웃는 당신에게

당신은 늙지 않을 거라 믿는가

by 강훈

근래에 온라인 공간은 '영포티 극혐'이라는 키워드가 부쩍 등장했다. 억지로 젊어 보이려 애쓰는 아저씨들의 패션, 유행어를 섞어 쓰는 어색한 말투를 보며 젊은 세대는 '안쓰럽다'거나 '추하다'며 희화화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비웃는 청년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로 그들이 '미워서' 비웃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변해갈 당신의 미래가 '무서워서' 비웃는 것인가.


심리학의 거울: 조롱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심리학에는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노화와 죽음을 직감할 때 극심한 불안을 느끼며, 이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집단을 비하함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확인하려 든다는 이론이다.

청년들이 '영포티'를 조롱하는 행위는 일종의 심리적 '투사(Projection)'다. 그들은 선배 세대의 어설픈 젊음을 비웃음으로써, 자신은 여전히 '진짜 젊음'의 권력을 쥐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으려 한다. 즉, 당신의 비웃음은 "나는 저들처럼 추해지지 않을 거야"라는 무력한 주문이자, 필연적으로 다가올 노화라는 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비겁한 방어기제일 뿐이다.


당신들이 만든 '취향 존중'의 성역은 어디로 갔나

지금의 2030 세대는 인종, 성별, 취향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왜 그 대상이 4050 세대가 되면 갑자기 냉혹한 '검열관'으로 돌변하는가? 40대가 스니커즈를 신고 힙합을 듣는 것이 '기괴'해 보인다면, 당신은 이미 사람을 '나이'라는 틀에 가두고 평가하는 고정관념의 소유자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당신이 말하는 다양성이 '내 나이대'에만 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진영 논리'일뿐이다.


그들은 당신이 누리는 '문화적 영토'를 개척한 원주민이다

사실 '영포티'라 불리는 X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나이답게'가 아닌 '나답게'를 선택했던 세대다. 지금 당신들이 누리는 수평적인 문화, 개인주의, 스트릿 패션의 뿌리에는 바로 그들이 있다. 그들이 젊음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은 단지 당신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평생 지켜온 '나다움'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투쟁이다. 원조가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을 두고 '따라쟁이'라고 비웃는 것은, 클래식 음악가가 록을 한다고 비웃는 초보 밴드와 다를 바 없이 촌스러운 일이다.


'꼰대'는 싫으면서 '노력'은 역겹다는 이중성

지금 젊은 세대들은 선배 세대가 권위적이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선배들은 권위를 내려놓고 '영(Young)'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과 대화하기 위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젊음'이라는 가면을 쓴다.

이 소통의 노력을 희화화의 소재로 삼는다면, 당신들은 어른들에게 다시 '엄격하고 차가운 권위'의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는 셈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오는 손길을 '역겹다'고 밀어낸 뒤, 나중에 "어른들과 말이 안 통한다"고 불평할 자격은 당신들에게 없다.


품격 있는 냉소는 없다

기억하라. 시간은 인류에게 허락된 가장 공평하고도 냉혹한 형벌이다. 누군가의 노력을 비웃는 것으로 얻는 우월감은 값싸고 천박하다.

오늘 당신이 던진 그 조롱의 언어들은, 십수 년 뒤 당신이 조금 더 젊어 보이고 싶어 거울 앞에 섰을 때 당신의 목소리로 다시 들려오게 될 것이다. 나이 듦은 죄가 아니며, 젊어지려는 노력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타인의 나이 듦보다 타인의 노력을 대하는 자신의 옹졸함을 먼저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먼저 살아온 이들에 대한 예의이자, 곧 그 길을 걷게 될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다.